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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벚꽃 · 웅천요(熊川窯)

웅천요(熊川窯)의 봄2

by 실비단안개 2008.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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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웅천요(熊川窯) 를 방문하였다.

흙을 채집하는 기간이라 바쁘시며 요즘은 일본 손님의 방문이 많다고 하셨다. 

어디에서 취재를 나왔는지 세 사람이 오밀조밀 촬영중이었고 먼저 방문한 손님과 합석을 하였다.

 

입구의 목련은 지고 있으며, 벚꽃과 복사꽃이 피었다. 서부해당화는 가지마다 산호로 맺혔고, 전시실에서 마주하는 앞산이 봄뜰이었다.

 

 

 

웅천 차사발의 유래와 특징                                       웅천 사기장  최웅택

웅천차사발을 탄생시킨 웅천도요지는 조선시대(15~16세기)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진해시 웅천 보개산(점골)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500여년전 웅천 제포항을 개항하여 일본에 수출한 차사발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진웅천, 귀웅천, 후웅천으로 구분되며 우리의 분청사기인 차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차그릇으로 사용되면서 고려차완이라고도 불리우고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우리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큰영향을 미쳤음은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이며 특히 16세기부터는 우리나라 자기류가 일본에서 차완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웅천차사발의 하나가 일본 국보(기자에몬 이토)차완으로 지정 되었다는 학설이 있음은 우리나라의 찬란한 도예문화의 유산이며 진해의 자랑거리가 아닐수없다.
웅천차사발은 그릇의 선이 아름답고 단아하며 허리부분이 깊은 질그릇으로 원형이며 그릇의 끝부분이 젓혀있고 그릇안쪽에는 둥근 차앙금 자리가있어 다른 차사발과 구별이 되며 일본차인들은 그것이 작고 뚜렷하게 있는 것을 중히 여긴다.
사발 입시울이 되바라지고 허리에서 몸통에 걸쳐 둥글게 부풀고, 굽은 높고 크게 깍았으며 굽바닥에서 몸통까지 다소 두껍게 성형 되어있다. 소지는 흰색 흙, 붉은 흙을 같이 쓰고 있으나 흰색 흙을 더 많이 사용했다, 잿물빛은 비파색과 회백색을 기조로하고 있지만 산화와 환원의 작용에 따라 사발마다 색의 변화가 많다.
특히 웅천차사발에는 그릇의 태토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과 당당함이 느껴지고 덤벙 담그는 잿물과정에서 구김살없는 유아적 천진함마저 느끼게한다. 어떤 기교와 장식도 하지않고 무심으로 빚어 만들어 놓은 차사발에는 자연미와 격에 맞는 형식이 차사발에 담겨지며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란 오랫동안 숙련된 기술과 체험에서 우러나오며 도공의 손재주가 아닌 마음으로 빚은 그릇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일본의 국보 이도다완을 낳은 웅천 가마
                최웅택 (웅천 사기장)
웅천 옛가마터는 경남 진해시 웅천 보배산 147번지 정골(井谷)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지방 문화제 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마의 활동 시기는 1500년 초부터 시작하여 1598년을 끝으로 폐요가 되었다. 가마의 경사각은 15도 정도이며 자연석과 점토를 사용하여 가마 벽과 아치를 만들었고, 바닥은 계단식이 아닌 경사각을 가진 속칭 "누울가마"이다. 이곳에서 도예업을 하던 선조 도예인들은 1598년 (선조 31년) 조선군의 선전으로 왜군이 패퇴할 때 이곳 웅천 정골 가마터에서 사기장을 포함한 가족 등 125명은 일본 히라도 섬의 영주인 "마스무라 시게노부"에게 납치되어 일본 히라도 섬으로  끌려갔다. 납치되어 간 사기장 중 대표는 "거관"이라는 도예가로 전해온다.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도예업을 하다 숨진 조선 웅천 도공의 공동묘지에서 망국의 한을 안고 떠도는 원혼을 달래는 조선 웅천 선조 도예인 추모제를 매년 10월에 일본 히라도에 가서 본인이  올리고 있다.

웅천 옛가마터는 차사발의 명품 중에 명품이라고 일컫는 이도(井戶)다완의 제작처라 생각된다. 인근에 조선시대 대일 무역항인 제포항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수출품 도자기를 생산했던 민요가 있었으며, 흙과 물 그리고 소나무 장작, 바람 ,지세등 자연적 입지를 겸해 이도다완 생산지로 최적합지라 생각된다.
 조선 초 태종 7년 (1407년)에 교린정책으로 일본과 통상을 하게 될 때 개항을 한 무역항인 제포를 통하여 많은 웅천 정골에서 만들어진 사발들이 수출 되였다. 또한 삼포에 한동안 일본인의 거주를 허용했을 때, 약 2500명이  제포에 거주하였다. 이때 찻사발 수요 또한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제포의 냉이개 마을에 일본 사원 (사찰)이 11개가 있어 이곳 승려들에게 많은 차사발이 필요했고 ,일본과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주문도 많았으므로 웅천 가마에서는 찻사발의 수출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웅천 도요지가 있던 정골(井谷)이라는 지명이 제포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정골사발"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井戶)라고 명명되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로 일본 국보를 낳은 웅천 옛가마에서 만들어진 대이도차완의 굽 50점을 1차로 공개한다. 본인이  20여 년 간 연구자료로 소장하고 있다가 최초로 "차의  세계"의 지면을 통하여 공개한다.
(출처 : 사기장님의 블로그에서)

 

 


        ▲ 초록의 가루차는 아주 투박한 찻사발에 내어졌다. 사진으로 보면 대부분의 찻사발 모양이 울퉁불퉁 한데, 최웅택 사기장님의 작품이다.

 

        ▲ 매화, 쟈스민등이 혼합 된 차를 내리는 모습

 

        ▲ 가루차 - 색이 완연한 봄이다. - 봄차!^^

 

        ▲ 찻사발과 찻잔의 크기를 비교하였다. 웅천요를 방문하면 대부분 찻사발에 차를 마실 수 있다.

 

 

        ▲ 흰색천리향 - 먼저 일어나 요의 여러곳을 살폈다.

 

        ▲ 앞산

 

        ▲ 오얏꽃

 

        ▲ 오른편의 건물이 방금 차를 마신 전시실이다.

 

        ▲ 마당은 잔디밭이며 맞은편으로 가마가 보인다.

 

 

 

 

        ▲ 가마안의 작품들은 아직 온기가 있었다. 구경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 차를 마시면 곳곳의 풍경소리가 들리는데 아주 외딴 세상에 있는 듯 하다.

 

다른날과는 달리 어제는 긴장이 많이 풀렸으며, 간혹 웃으며 농담도 하였다.

그래도 마주할 때마다 어려운 분임에만은 틀림없다.

 

사기장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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