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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無爲寺) 빨래 말리던 날

by 실비단안개 2019.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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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별바라기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강진 차밭을 지나 무위사로 갔습니다. 차밭과 백운동 정원을 관람한후 머지않은 거리에 있는 무위사로 갈 수 있었지만, 전날 작은 아이가 무위사에는 국보와 보물이 있다고 하여 작은 아이와 동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달빛 한옥마을에서 출발하는 '강진 월출산 달빛길'의 마지막 지점이 무위사이기도 했습니다.

강진 무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인데 해남 대흥사는 저녁무렵이나 다음날 일찍 방문 예정인 사찰이기도 합니다.

 

무위사는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하며,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조선 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하니 중건, 중수때마다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월출산 무위사에도 배롱나무꽃이 붉게 피었습니다.

 

 

무위사 안내표지판과 가람 배치도입니다.

 

 

 

사천왕문을 들면 누각이 나오고 맞은 편에 극락보전이 있습니다.

 

 

극락보전 설명과 문화재 안내도인데, 정확하게 보이도록 잘랐습니다.

 

 

 

일반 사찰의 대웅전격인 국보 13호인 극락보전입니다.

무위사는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를 행하였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입니다.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 겹처마이며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처럼 배흘림기둥이었습니다.

극락보전 마당 양쪽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으며 가운데에 배례석(拜禮石)이 있습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幢: 불화를 그린 기)을 걸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이며, 직사각형의 배례석이라고 하는 판돌이 하나 놓여 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앙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문양이 양각으로 하나 새겨져 있고, 그 안에 자방에는 연씨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 음각으로 태 즉 선을 두르고 모서리는 두께의 절반쯤 깎아 한층 멋을 냈습니다. 이런 배례석은 무위사를 비롯한 전국 전통사찰에서 드물게 찾아 볼 수 있는데 해남의 미황사에도 배례석이 있었습니다. 법당 정면이나 석등 혹은 석탑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용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배례석은 절을 찾는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라고도 합니다.

 

 

배례석(拜禮石)입니다.

 

 

極樂寶殿 현판입니다.

 

 

법당사진은 잘 찍지 않는데, 문화재가 있다고 하여 찍었습니다.

 

 

무위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은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본존 아미타불좌상과 왼쪽에 관음보살상, 오른쪽에 지장보살상을 협시로 하고 있는 삼존상으로 1476년작인 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극락전의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뒤의 토벽에 그려진 후불벽화로 국보  제3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476년 작입니다. 세로 270cm, 가로 210cm.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두 협시보살입상이 본존아미타불좌상보다 조금 낮게 위치하여 삼존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불화는 화기(畵記)에 의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외에 수십 명이 시주하여 대선사 해련(海連) 등이 그린 것으로 밝혀졌으며, 1476년 3월이라는 조성시기를 알 수 있어 불화연구에 귀중한 기준작이 된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극락전에는 수월관음도·아미타내영도·설법도가 그려져 있었으며 각종 꽃 등을 그린 벽화단편들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극락전의 배흘림기둥입니다.

기둥을 중간정도가 직경이 크고 위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을 배흘림기둥이라고 합니다.

 

 

사찰마다 스님들의 좌복(방석)을 법당에 깔아두거나 한쪽에 준비하여 놓는데, 극락전 앞의 당간지주에 방석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방석은 삼층석탑주변에도 널려 있었습니다. 솜이 들어 있으니 세탁을 하여 널지는 않았을 테고 습하여 햇빛이 좋아 말리는 모양입니다.

 

 

 

방석이 널려 있었지만 문화재를 관람하는데 크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신경은 쓰였습니다.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보물 제507호인 무위사 선각대사변광탑비(康津無爲寺先覺大師塔碑)이 있으며 뒤로 미륵전과 산신각이 있습니다.

 

 

 

보물 제507호인 무위사 선각대사변광탑비(康津無爲寺先覺大師塔碑)입니다.

선각대사 형미(逈微)스님은 신라 말기의 명승으로 체징선사(體澄禪師)를 사사하고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 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고 합니다. 918년 속년(俗年) 54세, 승랍(僧臘) 35세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편광탑(遍光塔)'이라고 하였으며,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인 946년(정종 1)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비제(碑題)는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해서로 썼습니다.

 

 

 

 

 

삼층석탑 아래에 있는 요사채의 대나무울에도 빨래를 널어 두었습니다. 맑아 뜨거운 햇빛이 아까워 빨래를 널지 않을 수 없었나 봅니다. 무위사의 곳곳에 빨래가 널렸기에 눈 둘 곳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배롱나무꽃과 이불빨래가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배롱나무꽃은 옛날에 양반가에서 심었다지만 요즘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며 여름날 가로수로 그만인 꽃입니다. 백련사에서도 봤지만 사찰과도 잘 어울리는 꽃입니다. 꽃말은 부귀,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함이라고 합니다.

 

 

 

 

얼라아부지와 큰아이는 그늘에 앉아 휴식중인데 작은 아이는 무위사를 샅샅이 뒤지고 다닙니다.

 

 

 

작은 아이가 돌아 옵니다. 이제 해남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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