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삼랑진에 다녀온 후, '삼랑진,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의 글에 일본식집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댓글란에 그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분이 댓글을 주셨습니다.
"위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2층집에서 실제로 초등시절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우선 삼랑진의 지역적 특징(경부선과 경전선이 갈라지거나 합쳐지는 곳)으로 일제시대에 많은 일본관리들이 거주했던 곳이라 많은 일본식 집들이 많습니다. 특히 삼랑진역 앞 지역을 예로부터 '관사'라고 많이 불렀으니까요... 옛집을 다시 한번 보게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가끔 지나칠때면 지금은 남의 집이라고 생각을 하고 쉽게 돌아섰었는데... 지금 터널공사 중이지만 넓은 대나무밭에서 친구들과 무등을 타고... 그것이 지칠때면 긴 대나무낚시대를 들고 쪽색 강물에 하염없이 시간을 낚고... 암튼 그 집은 일제시대때 관리를 지내셨던 분의 집입니다."
블로그는 서로의 추억을 꺼내어 주기도 하며, 이웃이 되는 고리가 되기도 합니다.
김달진 문학관 동네는 우리 친구들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며, 대부분 고향을 떠났지만, 지금도 고향인것만은 사실입니다.
중학교 동창카페에 접속을 하니, 친구가 어릴적 생가 풍경을 글로 그려두었습니다.
친구는 지금 서울에 거주하며, 이 블로그를 방문하고 댓글을 남겨주기도 하는데, 얼굴이 뚜렷하게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어릴때 이웃 동네 방문이 잦지않았고, 혹 이웃 동네의 친구집에 가더라도 보통 여자친구끼리 어울려 놀았습니다.
이 글을 올려준 친구는 남자친구입니다.
늦은 가을 이맘때면(11월 20일)
계절탓인가?
나이탓인가?
늦은 가을 이맘때면
지금은 "김달진 생가"로 변해버린, 그러나 나에게는 태어나서 자라고 아름다운 추억과 아스라한 기억들이 살아있는 옛 고향집의 대나무밭옆 도우감(대봉감) 생각이 자주난다.
촌집치고는 600여평이 넘는 꽤나 큰 돌담장으로 들려 쌓인 안쪽으로는 40여 그루의 많은 감나무들….
단감, 일본단감, 떨감, 도우감 등, 감종류도 대여섯 종류가 되었고, 집안의 수호신인냥 오래된 회나무가 대문을 지키며, 밤에는 온갖 들새들의 잠자리가 되었던 대나무 군락들….
가끔씩 불어오는 늦가을 바람소리에 부딪히면 들려오는 스산한 대나무 소리
마당이 넓어 동네애들 불러서 축구도 하고 배구도 하고 족구도 하고….
늦가을 타작한 나락을 말리려고 넓은 마당 덕석에 펼쳐놓은 나락을 먹으려고 나타난 참새들을 새총과 함께 바지개에 나이론끈 묶어서 잡아 당기던 시절이 생각난다.
봄이면 살구꽃, 자두꽃, 복숭아꽃, 앵두꽃 등, 수없이 피었던 과일꽃들과 천리향 등 화단에 가득한 봄 꽃 내음으로 여름이면 앵두와 볼똥, 자두, 살구, 복숭아며, 가을이면 온갖 감과 무화과, 뒤뜰의 호두….
담장을 휘감아 매달렸던 으름열매….
대나무옆 담장 너머로 민가에서는 아마도 보기힘들었던 으름 덩굴들….
참으로 풍성했던 과일들로 가을이면 내가 가장 살맛났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께 집을 팔고 대구로 이사 가셨던 김달진 어른의 생가로 변하여 [김달진 생가 및 문학관]으로 변해있는 나의 집
훌륭하신 분의 생가이기에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고향의 훌륭하신 문화인으로 예술과 문화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고마움이 앞서지만은 그래도 내가 뛰어 놀던 마당과 집의 형태는 사라져버린, 나의 마음속 영원히 간직할 고향집의 향수는 퇴색되어버린 채….
늦은 가을 이맘때면 생각난다,
끝까지 꼭대기에 대롱대롱 메달려있는 붉디 붉은 홍시감이….
- 김달진 생가의 감 따는 날 풍경 : 감 따는 날 풍경
문학관에서 앨범을 넘기면 생가의 옛 거주인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친구의 부모님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분들이 친구의 부모님이었습니다.
지금 생가에는 감나무와 비파나무가 있으며, 커다란 태산목이 있는데, 친구의 어린시절 풍경과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3년전쯤, 당시 학예사 조재영 시인과 열무꽃에 나오는 '훼나무'를 찾았습니다만 결국 찾지못했는데, 훼나무가 '회나무'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결론만 내렸는데, 훼나무가 회나무가 맞는 모양입니다.
열무꽃 / 김달진
가끔 바람이 오면
뒤울안 열무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
베적삼에 땀을 씻으며
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 향기에 취해
늙은 암소는
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매미소리 드물어 가고
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
우리들은 종이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별빛따라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이는 돌담을 돌아
아낙네들은
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
내 고향은 남방 천리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김달진 시인의 마당과 친구의 마당 풍경이 다르지만, 같이 기억하는 것은 훼나무(회나무)입니다.
회나무는 김달진 시인때 부터 내 친구의 어린시절까지를 기억할텐데, 복원 공사중에 어딘가로 가서 다시 뿌리를 내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친구의 글에 과실나무가 많은데, 집안의 과실나무는 꽃과 나비, 향기와 열매를 맛보게 하며, 그네를 매달거나 나무에 오르내리며 놀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했습니다.
또 옛여인이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아도 화초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고증의 중요함을 새삼 느끼는데, 블로거 천부인권 님은 노무현 대통령 생가의 기둥 하나를 보고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둥근 기둥은 궁 내지 관의 기둥이며, 네모기둥은 일반인의 가옥에 사용한 기둥이라고 합니다.
친구는 동창카페에 최근의 모습을 올리지 않아 여전히 까까머리로 아른거립니다.
▲ 11월 21일 시야 놀자!(김달진 문학관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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