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금시당 · 백곡재를 나온 우리는 다시 활성교를 건넜습니다. 활성교를 건널 때 맞은편에 아름다운 누각이 보였기에 이쯤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정차를 하기에 마땅찮아 달려 언덕위의 누각 용호정을 스쳐 용평(백송)터널옆에 주차를 했습니다.
밀양팔경의 하나인 월연정은 조선시대의 별서(別墅) 건축물로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43호로, 담양의 소쇄원과 비교될 만큼 아름다운 정자로 달이 강에 비쳐 만들어내는 달빛에 달님도 반해 머물렀다는 곳이 바로 월연정이라고 합니다. 월연대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집합을 이루고 있는 월연정은 정자 단독으로 건립되는 조선시대 정자 건축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는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는 월연대 영역을 두고, 좌측에는 쌍경당 영역을 두었는데 계곡 사이로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을 통합하였으며 어느 건물에서나 밀양강이 보입니다.
월연정은 본래 월영사가 있던 곳으로 밀양강가 월영연(月影淵)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 별서를 창건한 것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 月淵 이태(李迨)가 기묘사화를 피해 귀향한 다음해인 1520년(중종 15)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는 쌍경당과 월연대 등 주건물을 세우고, 직접 이름을 붙인 쌍청교(雙淸橋)·영월간(迎月澗)·수조대(垂釣臺)·탁족암(濯足巖)·행단(杏壇)·죽오(竹塢) 등으로 주위를 아름답게 조경했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것을 1757년(영조 33)부터 후손들이 계속 중건,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안내글에는 亭謝라고 되어 있는데, 정사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기 위하여 지은 집을 뜻하는데 월연정은 놀기에는 너무 큰 규모이며, 별서(別墅)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으로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시절 귀향양반이긴 하지만 설마 농사를 지었겠느냐 싶어 별장이라고 합니다.
주차후 밀양강을 끼고 낙엽이 소복한 호젓한 길을 걸어 들어가니 언덕위에 월연대가 있었습니다. 검색으로 알게 된 건 월연대가 밀양팔경임에도 출입문이 닫혀있다고 했기에 헛걸음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강섶의 오솔길을 걸어 언덕을 오르니 규모가 큰 건축물이 나왔으며 앞쪽에는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은행나무는 후손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라는 교육적 의미가 있기에 서원 앞에 많이 심었다고 하는데, 은행나무는 노랗게 단풍이 들어서야 아' 은행나무구나 할 정도로 평소에는 관심밖의 식물인데 밀양은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었는지 나이많은 은행나무가 많았습니다. 방금 다녀온 금시당의 은행나무보다 잎이 더 많았습니다. 같은 지역이라도 물이 드는 시기가 달랐는데 참 다행이지요.
안내표지판을 확인하는 일보다 은행나무 단풍을 찍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건물의 담장과 길을 두고 은행나무가 있었습니다.
또 다행이었습니다. 월연정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살림집이 있었으며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기에 인사를 드린 후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니 마음껏 찍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살림집은 찍을 수 없어 살림집을 거쳐 쌍경당(雙鏡堂)으로 들었습니다.
'쌍경당(雙鏡堂)'이란 이름은 '강물과 달이 함께 맑은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라는 말에서 왔으며, 쌍경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집입니다.
쌍경당 편액에 보면 雙鏡堂아래에 숭정기원후이갑신(崇禎紀元後二甲申)이라고 나오는데,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1628~1644)의 연호로, 따라서 '숭정기원'은 1628년입니다. 숭정기원 一甲申은 1644년이며, 두번째 갑신년인 崇禎紀元後二甲申은 1704으로 숙종 30년때입니다. 명이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편액에 까지 기록했는데, 기묘사화를 피해 귀향한 양반이 최고의 정원을 가진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편액에까지 기록한 맹목적인 사대주의가 놀랍지요. 그런데 1520년에 월연정을 건축했다고 했으며 임진왜란(1592년)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가 1757년(영조 33) 쌍경당을 중건했다고 하는데 쌍경당 편액의 년도를 보면 1704년이니 연대가 맞지 않습니다. 잠시 샜는데 다시 월연정에 듭니다.
정면 5칸이면 상당한 규모인데 쌍경각은 많이 낡아 있었으며, 금시당의 축대와 마루 사이 공간이 앞에서 뒤까지 트였기에 건너편의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쌍경당 역시 그러했습니다.
아궁이입니다. 벽면에 한글낙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어딜가나 이렇게 흔적 남기기를 즐기나 봅니다.
쌍경당에서 바라본 밀양강입니다. 월연정의 건물은 모두 ㅡ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따로 찍었는데 양이 많다보니 이었는데 가운데 나뭇가지를 제거해야 하며, 오른편 사진의 끝부분에 가려지긴 했지만 금시당이 보입니다. 밀양강을 통째 양반가에서 차지하여 즐긴듯 합니다.
이제 주거공간을 다시 거쳐 제헌으로 갑니다. 가는 길에 아주머니께서 부르시기에 다가가니 문중묘사날이라 떡을 했다면서 먹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거주민은 문중의 후손인 모양입니다. 월연정이 문을 연것만으로 반가워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묻지 못 하고 하나면 된다면서 초록고물이 묻은 떡을 하나 입에 넣었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도 했지요. 나중에 밀양 시장에 들렸는데 그곳에서도 묘사를 지냈다면 떡을 돌렸는데 역시 초록고물이었습니다. 초록고물은 속청(서리태)으로 서리태 수확시기가 요즘이다보니 그런 모양입니다.
별장답게 꼭 정원이 아니어도 식물이 있었습니다. 작은 문을 들면 제헌(霽軒)입니다.
임진왜란 때 월연정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가 1757년(영조 33년) 쌍경당을 중건하고, 1866년(고종 3년) 월연대를 복원했으며, 1956년 제헌(霽軒)을 신축해 오늘에 이른다고 하는데, 제헌은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 1504~1567)을 추모하는 건물로 담양의 소쇄원과 더불어 전통 정원으로 역사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고 합니다.
정원이 가장 아름답다는 제헌의 뒷면인데 툇마루가 빙둘러져 있으며 뒤뜰에도 정원수가 있습니다.
월연정에 들때 만난 은행나무는 제헌의 담장너머 밀양강위에 있었습니다. 마침 바람이 불었습니다.
만추탓인지 바람탓인지 샛노란 은행잎이 떨어지기에 얼른 동영상모드로 전환했습니다.
제헌의 뜰은 정원수와 수석이 어울렸으며 계절마다 달리 꽃이 피는 듯 했으며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담장너머에는 모래톱이 드러난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더 너머의 현대식 교량이 거슬리긴 했지만 가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982년 경남도지사 이규호 기념식수가 있었는데 계절탓인지 아니면 영영 죽었는지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살짝 담장너머 보니 월연정에 들기전에 찍었던 은행나무 노란단풍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찍었던 은행나무 단풍 풍경중에 으뜸으로 치고 싶을 정도로 색다른 풍경이었습니다.
다시 제헌의 뜰입니다. 보이는 작은 문으로 나갈겁니다. 빨간 열매같은 건 장미꽃이며 소나무도 은행나무잎을 꽃피웠습니다.
제헌의 뜰이 아름다워 건물을 다시 한바퀴 돌고 세월이 묻은 담장위의 기와도 살펴보았습니다.
방금 나온 제헌과 은행나무입니다. 제헌과 월연대 사이에는 작은 계곡이 있는데, 쌍청교는 쌍경당구역과 월연대를 이어 하나의 공간을 연출합니다.
쌍청교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월연대입니다.
쌍경당은 중간 높이 지대에 동향으로, 제헌은 가장 낮은 곳에 남동향으로 배치돼 있으며, 월연대는 가장 높은 언덕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공통점은 밀양강이 모두 보인다는 것입니다.
쌍청교를 지나니 백소나무 가는 길 안내가 있어 백소나무를 만나러 갔습니다. 백소나무는 월연대 아래를 돌면 안내가 있기도 하여 금방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백송(白松)은 말 그대로 흰 소나무로 이 소나무는 중국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흰 빛깔을 띠며, 게다가 이 나무는 생장이 느리고 옮겨심기 또한 어려워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선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백소나무는 어리게 보였으며 솔잎 또한 일반 소나무의 솔잎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여 카메라를 당겨 수피를 보니 마치 배롱나무나 모과나무의 수피와 비슷했으며 청회색이었습니다.
월연대 담장입니다. 지형을 이용하여 담장을 설치했으며, 담장은 돌로 축을 쌓은 후 돌을 황토흙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았는데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담장이었습니다.
월연대입구에는 배롱나무가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있었고 월연대로 드는 계단은 보통의 계단보다 높았는데, 조선시대 사람은 현대인보다 단신이었을 텐데 문신이었지만 월연 이태는 장신이었나 봅니다.
월연대(月淵臺)는 가장 북측의 높은 언덕에 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월연대 계단을 오르니 바로 편액이 들어 왔습니다. 쌍경당이나 제헌처럼 넓지 않은 터에 건물은 정방형에 가까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주위를 돌아가며 마루를 시설하였고, 평면의 가운데 칸에 방을 두고, 네 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아 정자의 기능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굴뚝은 아궁이(소화기 아래)와 떨어져 꽃계단(花階)위에 있었는데 제헌처럼 많은 화초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보니 집을 주로 산등성에 기대어 짓게 되므로 집 뒤쪽은 비탈 진 곳이 많은데, 이런 비탈을 그냥 놔두지 않고 화계라하여 층계모양으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꽃밭을 만들었는데, 화계는 주로 궁궐에 있지만 살림집이나 절집에도 있습니다. 화계는 근처의 창녕 하씨고가와 고성의 최씨종가에서도 만났는데 월연대의 화계는 하씨고가처럼 화계를 오르는 계단없이 축을 쌓아 위에 무언가를 심을 수 있도록 했으며 담장에 기댄 굴뚝이 있었습니다.
월연대를 나서면서 본 풍경입니다. 역시 배롱나무와 밀양강이 보입니다.
월연대 축대위에서 본 쌍경당과 살림채, 제헌입니다.
다시 쌍청교를 건너 월연대로 든 계단이 아닌 담장을 끼고 조금 걸어서 뒷쪽의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렸으며 뒷쪽에 감이 잘 익었기에 궁금했지요.
쌍경당과 살림채뒷쪽 풍경입니다. 늙은 감나무가 있으며 닭농장이 있었고 개가 몇 마리 있었습니다. 적어도 문화재로 지정된 이런 곳은 몇 백미터내에 이런 시설을 허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밀양시가 밀양 8경의 한 곳이자 국가지정 명승 제87호인 월연대(月淵臺) 일원을 관광명소로 활용하기 위한 관광 자원화사업에 나서, 월연대 일대를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탐방로 개설하고, 문화재적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정비사업을 추진한다고 하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월연정뒤에서 본 월연정과 밀양강 풍경입니다. 멀리 높은 곳의 건물이 월연대이며,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 제헌이고 가운데 마당이 보이는 건물이 살림채며 맨 오른편이 쌍경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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