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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옛길을 걷는데 비가 내렸다

by 실비단안개 202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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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요즘은 날씨 예보가 잘 맞습니다. 그러나 빗나가길 바라며 우리는 남한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성남시에서 고개고개를 넘고 또 넘어 경기도 광주시였습니다. 놀라운 건 그 산길을 버스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문화재를 말하는데,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뛰어난 보편적·세계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합니다.

한국의 문화유산으로는 2019년 7월 등재된 '한국의 서원'을 포함해 14차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산성으로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라고 합니다. 원래 2천여 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 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하는데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라고 합니다.

 

첫길이라 모든게 낯설었습니다.

큰 바위에 세계유산 남산산성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안내인데, 총 5코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근처 카페에 오긴 했지만 산성길을 걷는 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주차장 근처는 마치 유원지처럼 음식점과 카페가 많았습니다. 예스러운 담장길과 현대적인 건물을 끼고 걷다 보니 북문에 닿았습니다.

 

남한산성 탐방안내도는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https://www.gg.go.kr/namhansansung-2/namhansan-intro-fare)에서 모셔왔습니다.

테마길 1코스 위에 5코스인 북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문을 지나 국청사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북문 앞에는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도가 있으며, 테마길 1코스라고도 알려줍니다.

옛길 안내도에 보면 아래쪽에 스탬프함이 있는데, 남한산성 옛길 코스는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요,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가 방문객을 위한 '남한산성 옛길 스탬프 투어 모바일 앱'을 출시했습니다. 여행지나 관광지에 가보면 스탬프를 찍는 곳이 있는데, 예전에는 오프라인으로 도장을 찍고 다녔는데 이제 핸드폰으로 도장도 찍고 스탬프 (완주)수여 (증서)도 받으니까 훨씬 더 간편해졌으며, 따로 지도 같은 것 필요 없이 옛길을 안내받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길이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스탬프를 찍지 않았기에 무심히 지났습니다.

 

남한산성의 북문인 승전문입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4개소의 문이 있습니다. 성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련하고, 각기 그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동문이나 북문과 같은 이름들로 부르지만 남한산성의 북문은 조선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전승문'이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치욕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아시지요.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입니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습니다. 140년이나 지난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것도 당시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성문과 성벽입니다.

성문에는 철판을 덧붙였으며, 성문 문루 위에서 좌측을 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성을 쌓았는데 어느 산성이나 지형을 이용하여 쌓게 됩니다.

 

성벽 근처에 애기똥풀이 만발했습니다.

 

형태와 디자인에서 보면 남한산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의 포곡식 산성으로서 둘레가 12km가 넘는 토대형 산성으로 곡면을 이용하여 사격의 사각지대를 없앴고, 지세에 따라 남쪽 성곽이 북쪽보다 더 높은 특성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성곽보다 높은 곳에는 방어를 위해 외성을 설치하였습니다.

자재와 구성 물질에서 남한산성은 일부 화강암과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편마암을 이용하여 축성하였고, 여장 전돌은 주변의 재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전통 기술 관리체계에서 보면 시대별로 축성술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인조, 숙종, 영조·정조 대에 축성기법이 다르며, 관리를 위해 수어사, 승영사찰제, 3영2부제 등이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산성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관리가 수월치 않았을 듯합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가 찍어 보내준 사진입니다.

 

걷고 싶은 길이 성곽에 닿아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산성을 찾은 이들이 우산을 펼쳐 걷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을 걷다보면 아름다운 소나무의 꽃을 만나게 됩니다. 소나무의 꽃인 송화는 알레르기 비염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송화차를 만들기도 하지요.

남한산성의 소나무 숲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보기 드문 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로 확보하고 땔감으로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져 산성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림조합을 결성하여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하였기에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전승문에서 300m왔으며 서문인 우익문까지 700m입니다. 비가 더 세게 쏟아지기에 그만 돌아가자고 했더니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오겠느냐면서 조금만 더 걷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산을 두 개 준비해갔기에 바로 내리는 비는 피할 수 있었지만 카메라를 들고 설치다 보니 혼자 비를 좀 많이 맞았습니다.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습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출처 : https://www.gg.go.kr/namhansansung-2)

 

성곽에 핀 고들빼기의 꽃과 담쟁이덩굴입니다. 성벽에는 구멍이 숱하게 뚫려 있는데 이는 활과 총을 쏘는 총안구(銃眼口)로 여기서 소총에 대한 이야기를 작은 아이와 주고받았습니다.

최무선과 임진왜란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고려말 최무선의 화약제조 성공으로 소총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우리나라는 소총의 시초라고 하는 승자총통이 조선 선조 때 개발된 걸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곽 너머를 보니 도시가 앉아 있었고 주변의 산등성이가 흐릿하게 보였으니 상당히 높은 곳인 듯했습니다.

깊은 곳의 사찰이나 성곽을 볼때마다 민초의 고충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길이나 걷다 뒤돌아 보기를 잘합니다.

비가 내려도 여유로운 걸음이었습니다.

 

북문에서 출발하여 500m를 걸었는데 마치 천리를 걸은 듯했습니다.

 

흰색의 오판화가 피는 백당나무입니다.

 

송화가 빗물에 함께 흘렀습니다. 마치 물감이 흐르는 듯했습니다.

 

비가 세게 내리기에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마침 국청사로 가는 샛길이 있었습니다.

 

국청사 경내에는 들리지 않고 효자 우물을 지나 한경직 목사의 우거처를 지나 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계곡산장을 지나고 주차장 대신 등나무 카페로 갔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와 본 카페로 등나무꽃이 화사했습니다. 그런데 자리가 없었습니다. 야외는 비가 내려 손님을 받을 수 없는 듯했습니다.

 

행궁 근처에는 기념품샵과 안내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초가인 안내소 툇마루에 앉아 비를 피하며 뜨신 커피를 마셨습니다. 비가 그치면 조금 더 걷자고 하면서요. 그러나 비는 시간이 더할수록 더 세차게 내렸습니다.

아쉬운 남한산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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