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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김씨 박물관이 변했다, 추억을 팔고 있었다

by 실비단안개 2019.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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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갤러리 마당을 나와 소사천을 따라 소사마을의 김달진 문학관으로 다시 갔습니다. 학예사님과 인사를 나눈후 생가의 변화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김씨 박물관이 달라졌다고 하기에 함께 가보자고 했습니다.

골목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술사진관, 부산 라듸오 간판이 있으며 꽁뜨는 여전히 김씨공작소 간판을 달고 있었고 담장에는 빙수기가 있었습니다. 처음 김씨 아저씨를 만났을 때는 김씨공작소에서 작업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느날 가면 김씨 박물관 간판이 달려 있었으며 또 여러 해가 바뀐 후 꽁뜨가 간판을 달기도 했으며 지금은 소사주막까지 간판을 달았습니다.

 

 

그 사이 도로명 주소가 대문쪽에 붙었으며 빨간 우편함도 그대로였습니다. 마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의 건물이 김씨 박물관으로 근현대의 공산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왼편의 건물은 주거공간입니다. 처음 주거공간은 꽁뜨안쪽의 작은 방이었으며 그때 벽에는 오래된 잡지의 화보와 달력 등이 붙어 있기도 했는데 그 방에 가면 김씨 아저씨는 이것저것 막 펼쳐 자랑을 했었습니다.

 

 

담장에 이정표가 새로 생겼습니다. 요즘 이렇게 생긴 이정표가 유행인지 장림에서도 만났으며 기장 대룡마을에서도 비슷한 이정표를 만났습니다. 간결하며 빈티지한 느낌이 나서 좋습니다.

 

 

김씨 박물관입니다. 요즘 10대가 이 풍경을 본다면 웬 고물 할 것들이 다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아래의 빨간가방 비슷한 가방을 메고 먼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가방도 당시에는 아주 귀했는데 아버지께서 먼데로 어망일을 다니시며 첫 딸이 초등학교에 간다고 입학전에 사다주었습니다. 가방은 할머니의 고가구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가끔 내려서 메어 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봐도 고물로 느껴질법한 물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김씨 아저씨는 물건 하나하나의 출처까지 다 기억하며 물건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할 때는 얼굴이 함박이 되기도 했습니다. 애정을 가지는 일은 그 일이 어떤 일이건 신나는 일입니다. 그 과정이 비록 힘이 들더라도요.

 

 

가정의 조명 변천사입니다. 유리대병(큰병)은 기름병인 모양입니다. 이 병은 소주병으로 참깨도 넣고 잘 말린 봄콩도 넣어 두고두고 먹었으며 때로는 호롱불의 기름(등유)을 받아 오는 병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 온 건 초등학교 고학년때였지 싶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기전까지 우리도 호롱불을 켰습니다. 가끔 촛불을 켜기도 했었는데 당시에는 밤에 화장실가는 게 무서워 방안에 요강을 두었었는데 오줌을 누고 일어서나 촛불에 머리카락이 살짝 타기도 했습니다. 50여년전 이야기지만 아주 오랜 된 이야기같습니다. 반세기만에 우리나라는 모든면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마당벽의 목각인형입니다. 요즘은 합성수지로 인형을 만들지만 당시에는 목각인형이었습니다. 어쩌면 도시 아이들은 고무재질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았을 수도 있습니다.

 

 

김씨 아저씨가 거주하는 공간의 마루입니다. 텅비었던 마루에 빽빽하게 작은 인형들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마나~

 

 

1970~1980년대를 살았던 세대라면 한번쯤은 봤을 정도로 당시 초대박 히트를 쳤던 인형인 못난이 삼형제입니다. 이 인형은 '한국 베이비 킹(킹 완구 1978년 설립)'이 1990년대에 생산한 제품으로 현재는 품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 김씨 박물관에서 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추억 전시에서 이제 판매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변화가 없기에 답답했었는데 드디어 김씨 박물관이 변했습니다.

 

 

외국산 인형들입니다. 스머프, 미키와 미니, 피노키오, 도날드 등의 인형이 앙증맞았습니다. 고가구를 이용하여 정리를 했으며 판매용입니다. 그동안 뜬구름 잡는 듯 한 생활이더니 이제 정말 돈이 되는 일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1970~80년대에 생산된 독일산 도날드 덕입니다. 그 사이 김씨 아저씨의 큰따님이 결혼을 하여 독일로 갔으며 그곳에서 공수한 제품들이라고 했습니다.

 

 

상품은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그림 작품도 한 점 있었습니다.

 

 

김씨 아저씨는 춥다기에 혼자 꽁뜨로 갔습니다. 꽁뜨벽에 온갖것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으며, 전선을 감은 탁자위에는 쫀디기를 구울 수 있는 일회용가스버너도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추억을 판매하는 모양입니다.

 

 

 

 

지금보면 조잡스러운 장난감이지만 예전에는 아주 귀했던 상품들입니다. 가면도 있었습니다.

 

 

불량식품코너입니다. 어릴때 이런 과자를 먹고 자랐습니다. 학교앞 문방구에는 판매를 했으며 하교시 아이들에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추억돋는 뽀빠이와 별과자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약국에서 포장을 그럴듯 하게 하여 이런 비슷한 상품을 팔기도 하는데, 꼭 불량식품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지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구입해 주나 봅디다.

 

 

 

딱지와 종이인형입니다. 이런 상품을 김씨 박물관에서 만날 줄 진짜 몰랐습니다.

 

 

종이인형입니다. 초등학교때 인형을 잘 그렸으며 가끔 도화지에 종이인형을 그린 후 가위로 오려 인형 옷 입히기를 했었는데, 주위에 친구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지금도 동창회에 가면 친구들이 당시의 이야기를 합니다.

종이인형을 보면 어깨부분에 흰색으로 솟은 게 있는데 그 부분을 접어 종이인형에 걸면 옷을 입은 인형이 됩니다. 우리 아이들이 오면 구입하여 인형옷 입히기를 해봐야 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처럼 인형놀이를 좋아하며 그림그리기도 좋아하기에 여학교때는 코스프레에 미치기도 했었습니다. 아이들은 옷을 직접 제작하여 코스프레 후 판매를 했는데 일본에서도 구입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재봉틀이 무서워 재봉질을 하지 못 하는데 아이들은 공업용미싱까지 구입하여 코스프레 의상을 제작했기에 종이인형을 보면 무척 반가워할 듯 합니다. 아이들이 늙긴 했지만 미미와 바비인형 세대입니다.

 

 

학교에서는 왜 어린 아이들에게 포스트 그리기와 표어를 만들어 오라고 했을까요. 그래서 나라살림이 나아졌을까요. 지나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당시에는 정말 큰 고민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집 맞은편의 담장에는 무찌르자 공산당, 방공 방첩 이런 표어가 색이 바랜 채 있습니다.

 

 

불량과자(?)와 장난감 등은 꽁뜨벽을 활용하여 이렇게 전시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꽁뜨안입니다. 손님 두 분이 김달진 생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카메라질을 하니 블로그 하세요 하기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추억이 돋는 이런 곳은 블로그들이 많이 방문하는 모양입니다. 저 또한 다른 고장의 이런 풍경을 찾아 간적이 있지만요.

 

 

꽁뜨가 꽁뜨의 일을 망각한 채 인형 팔기에 나섰습니다. 엘피판이 있던 자리에 여러 종류의 인형과 가면 등이 채워졌습니다. 주연씨 잠시 얼굴을 내밀더니 쏙 들어 갔습니다.

 

 

 

 

종이연에서 발달한 비닐연입니다. 종이보다 질기긴 하지만 추억의 연은 가오리 종이연 세대입니다.

 

 

꽁뜨입구입니다. 봄이 되기전에 다시 한 번 가야지 마음은 먹고 있지만 잘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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