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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노역지 전라병영성과 오래된 은행나무와 교회 풍경

by 실비단안개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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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스마트폰이었습니다. 얼라아부지가 병영면에 대해 검색을 하더니 근처에 하멜 기념관과 전라병영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근처라고 하니 일정에는 없지만 우리는 그곳으로 갔습니다.(0.8km)

맞은 편에 거대한 성벽이 있었으며 우리는 하멜 기념관에 주차를 하고 뒷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그곳으로 먼저 갔습니다.

은행나무는 잎과 수피 모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울이 쳐져 있어 울안에 들어 가지 못 했습니다.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康津 城東里 銀杏─) 안내 표지판입니다.

천연기념물 제385호로 나무의 나이는 800년으로 추정되고 나무의 높이는 32m, 둘레는 7.2m로 큰 손상이 없고 생육상태도 매우 양호하고 수형도 아름다운 편입니다.

 

이 은행나무는 동성마을 중앙에 우뚝 솟아 마을을 대표하고 있으며, 주변에 민가가 8채 있는데 은행나무 뿌리가 민가의 부엌, 방 밑까지 뻗어나가 왕성한 수세를 보이고 있으며, 나무 주변으로 고인돌이 있기도 합니다.

강진군 병영면은 네덜란드의 하멜(Hamel) 일행이 1656년3월 ∼1663년2월까지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으로 그들이 억류생활을 하면서 은행나무 노거수를 보았다고 「하멜표류기」에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나무가 바로 이 은행나무였다고 추정된다고 합니다.

오래된 나무에는 대부분 전설이 전해지는데 성동리 은행나무에도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이곳에 부임한 병마절도사가 폭풍으로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로 목침을 만들어 베고 자다가 병이 들어 명의를 찾아 치료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목침을 나무에 붙여주면 병이 나으리라는 어느 노인의 말을 따라 그대로 하니 병이 감쪽같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 뒤부터 마을에서는 이 일을 기려 매년 음력 2월 15일 자정 은행나무에게 마을의 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생겼으며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은행나무 안내 표시판 옆에는 하멜 체류지라는 안내도 있었습니다. 하멜 일행이 머문 마을로 엄밀히 말하면 유배지입니다.

 

 

 

 

 

 

 

 

 

은행나무 조금 안쪽으로 오래된 교회종탑이 있어 다가갔습니다. 마치 우리 동네 교회의 종탑갔았기에요. 아니나 다를까 이 교회는 100주년이 넘은 오래 된 교회였습니다. 교인은 아니지만 오래 된 성당이나 교회의 종탑이나 건물을 보면 저 뿐만 아니라 누구나 끌릴 겁니다.

 

 

 

강진 병영교회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1902년 8월 19일 삼인리 신경문씨댁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17년 병성교회당입니다. 교회내에는 지역아동센터도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하멜 기념관에 왔습니다.

주차장쪽에 하멜 동상과 풍차가 있었습니다. 하멜은 네덜란드인입니다.

전남 강진군 병영면은 네델란드인 하멜 일행이 1656년 3 ~ 1663년 2월까지 약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하멜 일행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했으며,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델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또 이 지역 일부에 남아있는 담장중에 빗살모양으로 쌓인 담장이 있어 하멜 일행이 잡역을 하면서 쌓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멜 일행은 이 곳 은행나무 밑에서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했으며, 1663년 병영 생활을 마치고 좌수영 12명, 순천 5명, 남원 등지로 5명이 분리 이송되었으며, 마지막 체류지인 여수에서 1666년 9월 탈출후「하멜표류기」를 저술함으로써 이곳에서의 생활을 최초로 서양에 알렸습니다.

 

 

 

벽안의 하멜을 만나기 위해 기념관으로 갑니다. 기념관은 요란하지 않고 단출했습니다.

 

 

 

퇴비냄새가 심하게 났는데 전날 퇴비를 하여 코스모스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높고 푸른 가을에 코스모스가 피면 하멜 기념관은 지금보다는 정겨운 풍경이 될 겁니다.

 

 

 

기념관 입구에 기념관 개요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이었던 23살의 네덜란드 청년 '헨드릭 하멜(Hamel, H.)'은 효종 4년(1653년) 풍랑에 배가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착합니다. 처음 하멜 일행은 비교적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일행 중 일부의 탈출 시도가 발각된 후 한양에 압송됩니다. 일행은 효종에게 고향에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조선에 표착한 외국인은 결코 본국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조선의 국법을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하멜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에서의 생활 부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멜 표류기에 소개된 조선에서의 생활 부분으로 그림은 하멜표류기 판본의 판화라고 합니다.

하멜표류기는 조선 기행문이 아닌 하멜이 조선에 감금된 13년 간의 임금을 회사에 요구하기 위해 상세히 작성한 보고서로 조선에서의 유배생활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17세기 아시아 시장 개척에 분주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이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 근해에서 난파되면서 하멜이라는 벽안의 이방인이 조선에서 유배생활을 합니다. 그 무렵 연이은 흉년과 기근으로 국가 파산사태에 직면하고 있던 조선은 하멜 일행의 억류사실을 대외적으로 은폐하는 데 급급했으며, 일행 중에는 소리소문없이 죽음으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멜은 동료들과 함께 13년의 세월 동안 갖은 고초를 겪은 뒤 조선을 탈출했고,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보고서를 통해 조선의 실상은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해남으로 온 이들은 영암을 거쳐 나주, 장성, 정읍, 태인, 금구, 전주, 여산, 은진, 공주 지역을 지나 서울로 들어왔지만 하멜 일행의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청나라 사신에게 이들의 존재가 알려질 것을 매우 두려워했던 조정에서 이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이들 가운데 일등 항해사 헨드릭 얀서와 또 한 사람이 조선에 왔던 청나라 사신에게 찾아가 그들이 체류하고 있던 사정을 알리는 돌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온 외국인을 청에 알리지 않고 국왕의 호위군사로 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크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었지요. 청나라 사신이 여러 차례 조선을 왔다 가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죽이자는 둥 여러 의견을 내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결국 전라도 강진의 병영으로 내려가서 살게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진에서의 생활은 한양에서와 달리 병영에 머무는 동안 이들은 여러 명의 병사(兵使)를 만날때마다 대우하는 방식은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는데 땔감 채취, 마당의 풀 뽑기 등의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하며 가혹하게 대우하거나 엄격하게 통제하기도 했는데, 네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1658년부터 1660년까지 2년 동안 재임했는데, 하멜 일행에게 매우 호의적이어서 보름에서 스무날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까지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 덕에 하멜은 조선인들의 생활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군청은 전라병영성이며 장터는 병영장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할 때는 이들도 조선 사람처럼 구걸을 하며 끼니를 마련하기도 하는 등 궁핍함을 겪기도 했습니다. 옆의 나막신은 하멜 일행이 생계를 위해 제작한 신발입니다.

 

 

 

네덜란드 호르큄 시에서 기증한 복제품 '하멜 보고서'입니다.

 

 

 

관람객이 신어볼 수 있는 나막신입니다. 나막신을 신으려고 하니 아이들이 무좀 걸리면 어떻게 할 거냐면서 말리기에 신지 못 했습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조선에서는 3년 동안 혹심한 천재지변이 발생하여 도처에서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 백성들이 기아상태에 빠졌고 유랑민이 속출했으며 떼강도가 극성을 부렸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까지 나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하멜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왕은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도록 하고 매일 발생하는 살인과 강도를 막기 위해 길목마다 감시를 강화하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토리를 줍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야 했고 심지어 잡풀까지 뜯어 먹어야 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헐벗고 굶주린 억류자들 역시 하나 둘씩 쓰러졌으며, 1663년(현종 4년)에 이르니 생존자는 22명뿐이었습니다. 억류자들의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순천과 남원, 좌수영에 수용했습니다.

 

당시 내례포(여수)에 있는 좌수영으로 거처를 옮긴 하멜은 전라좌수사 이도빈의 배려로 사흘 동안 인근 지방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하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이도빈은 그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왜 탈출하지 않느냐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이도빈의 뒤를 이어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민발은 전함에 불이 나서 세 명의 병사가 죽었는데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되어 태형을 받고 쫓겨났으며, 뒤이어 부임한 정영은 억류자들에게 매일 새끼를 꼬게 하는 등 고된 노역을 강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쇠약해진 동료가 죽자 하멜 일행은 마침내 탈출을 결심하게 됩니다.

"여수에 내려온 이후 어떤 수령은 할 일도 없는데 우리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마당에 세워 놓았다. 또 어떤 수령은 자기가 쏜 화살을 하루 종일 줍게 했다. 우리가 항의하자 그는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결국 그 고생을 참지 못하고 동료 부르트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록 모험으로 끝날지언정 우리의 운명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멜 일행은 그때부터 세심하게 탈출 계획을 세웠습니다. 장사를 하여 돈은 마련했고, 선원들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항로를 알아냈으며, 조선인 친구에게 두 배나 비싼 값을 치르고 배를 한 척 구입했습니다.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밤이 이슥해질 무렵 하멜을 비롯한 8명의 억류자들이 은밀히 배에 올랐습니다.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였습니다.

나흘 동안 쉼 없이 동남쪽으로 항해하던 그들은 9월 8일 마침내 일본의 고토 섬에 다다랐습니다. 그들은 고토 도주의 배려로 9월 13일 밤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 끝자락에 있는 상관 입구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5척의 네덜란드 선박을 발견한 하멜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조선에 억류된 지 무려 13년 만에 보는 고국의 배였으며, 그동안 36명의 표착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16명,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8명이었습니다.

* 참고 : [한국 인물사 열전]

 

 

 

봄날 초등동창회에서 여수로 봄소풍을 갔었는데 여수해상 케이블카를 타니 하멜기념관 앞 방파제에 하멜등대가 있었습니다.

여수구항 해양공원의 방파제 끝에 있는 하멜등대입니다. 무인등대로 최초 점등일은 2005년 1월 28일이며, 광양항과 여수항을 오가는 선박을 위해 불을 밝혀줍니다.

"지금은 저 바다 위에 가득한 허공뿐이나 / 한 시절 이 땅에 네덜란드 젊은이들이 /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다가 하늬바람 일던 그 날 밤 / 귀향의 돛을 높이 올려 저 수평선을 넘어갔다오 / 이 땅에 한도 두고 정 또한 두고…… / 그 겨울 유난히 바람 잦고 오동도 동백꽃은 더더욱 붉었다 하더이다." - 하멜등대에 새겨진 비문

 

 

 

 

 

아이스커피를 마신 후 하멜이 노역을 한 전라병영성으로 갑니다.

하멜기념관에 대한 검색을 하지 않았다보니 이 마을에 '한골목'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다행이 기념관에서 병영성으로 가는 길에 찍은 사진인데 빗살무늬 형태의 돌담이 있습니다.

이곳 돌담은 얇은 돌을 약 15도로 뉘어 촘촘히 쌓은 뒤 다음 층에서는 다시 엇갈리게 쌓는 지그재그 빗살무늬 형태로 조성됐습니다. 이 방식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세계에 알린 하멜 일행이 7년간 머물며 전수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강진 전라병영성입니다. 성터가 꽤 넓었으며 복원공사중이었습니다.

전라병영성은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으로 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라병영성은 조성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로, 1417년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광산현(光山縣)에 있던 병영을 지금의 터인 당시 도강현(道康縣)으로 옮기어, 당시의 병사 마천목(馬天牧)이 쌓았다고 하며,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척 8촌이라 하였습니다.
병영성은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7년여 동안 억류생활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습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우리는 동문옆 출입구로 들었습니다. 더 넓은 성터가 펼쳐졌습니다. 이 성터에서 벽안의 하멜 일행은 풀뽑기 노역을 했습니다.

 

 

 

전라병영성의 역사와 복원 정비 계획안입니다.

 

 

 

 

 

 

 

전라병영성의 4대문은 복원되었으며, 성루와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도 복원되었습니다.

 

 

 

 

 

치성(雉城)입니다.

치성이란 성곽의 요소에 성벽으로 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치성의 '치(雉)'는 '꿩'이란 뜻을 가지는데, 이는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벽을 걸으면 하멜 기념관과 풍차, 오래된 은행나무, 병성교회가 보입니다.

한 번의 방문으로 전라병영성과 성동리를 다 알기에는 부족했는데 다시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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