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금오산(766m)의 여여정사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었습니다.
가끔 차가 비킬 수 있는 터가 있고,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골짜기에 드문드문 신식건물이 있으며, 천천히 달리는 산길 옆으로도 사람이 사는 듯 살지않는 듯 한 집이 있기도 했습니다.
기온이 낮은 탓인지 상사화가 아직 피어 있는 집이 있으며, 배롱나무꽃이 싱그럽게 피어 있기도 한 길을 따라 얼마간 달리니, 텃밭과는 다른 느낌의 밭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용도일 수도 있는.
아치형 입구가 예사롭지 않아 전통찻집일까, 농원일까, 그러면서 길 형편이 주차가 불가하여 여여정사에 올랐다가 하산길에 그 밭의 약간 아래 터에 주차가 가능하였기에 주차를 했습니다.
입구에 고추가 널려있으며, 양옆으로 방아꽃과 낮달맞이꽃이 피어 있습니다.
요즘 낮달맞이꽃을 심심찮게 만납니다.
녹산수문 입구에는 아주 많으며, 고성에 지난해에 갔나요, 청량사, 청량사에도 많이 피어 있었으며, 어떤 꽃집에는 화분에 심어 판매를 하기도 했습니다.
고추를 비켜 걸으니 잔디가 깔려있습니다. 조심조심 걸어야지, 그런데 그 생각은 입구에서 멈추었습니다.
저마치 사람이 어른거렸습니다.
계세요? 안녕하세요?
요즘 사람들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않습니다.
너댓살쯤의 사내아이가 있고 60은 넘은 듯한 부부가 원두막에서 일어나며 맞아주었습니다.
늦둥이라기에는 무리야 -
"손주에요?"
"네, 손준데, 부산에서 왔습니다."
할머니는 방울토마토를 따고 손주는 봉지에 방울토마토를 담아 부끄러운지 얼굴을 가렸습니다.
풍경을 담고 싶다고하니, 봄에, 꽃 많이 피었을 때 왔음 좋았을텐데, 하시며 풍경 담는 것을 허락하시고, 방울토마토를 건네주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농장이라고 하니, 농장이 아니고 밭이라고 했는데, 선한 분들 - 로 꽂혔습니다.
손주가 있으니 편의상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하지요.
할머니는 손주와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사생활을 물을 수 없으니 들려주는 이야기와 식물에 대하여 한 질문과 답만 이야길 하겠습니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께 나에게 커피를 대접하라고 합니다.
풍경이 참 좋습니다, 라고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작은 마당에 널려진 이부자리 풍경이 다른 어떤 풍경보다 좋았습니다.
솜이부자리였거든요.
▲ 본채, 마당, 장독대, 원두막
어릴때 할머니께서 아침이면 이부자리를 빨랫줄에 널었습니다.
널려진 이부자리 사이를 가르며 다니는 게 은근히 재미있었습니다. 동생과 잡기놀이라도 하면 신이 났습니다.
사라지는 온돌문화와 함께 우리의 이부자리 문화도 변했습니다. 혼인하여 얼마간은 나도 풀을 먹이고 밟고 했는데, 침대를 사용하면서 침대커버 세트를 마련하였고, 나이가 들어 침대를 치웠지만, 이부자리는 풀을 먹이는 그런 이부자리가 아닙니다.
이불호청은 보통 개울가에서 삶았습니다. 뜨거운 빨래통을 이고 개울가로 가는 일은 쉽지않으니까요. 개울가에서 삶아 그 자리에서 빨래방망이로 탁탁치며 개울물에 크게 흔들어 씻었습니다. 요즘 그 개울로 가면 어릴 때 그 개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얕고 잡풀이 무성합니다. 푹 삶아 하얗게 바랜 호청은 빳빳하게 풀을 먹입니다. 그리곤 약간의 물기가 있을 때 귀를 맞추어 잘 개어 꼭꼭 밟아서는 다듬이질을 했습니다.
귀를 맞출 때 할머니와 엄마가 네 귀를 잡아 이리저리 흔들고 맞추었지만, 가끔은 돕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촉촉한 풀맛, 그 풀맛을 얼굴에 대면 부드럽고 상큼했습니다. 땀을 닦듯이 얼굴을 닦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풀 먹인 호청은 마르면 칼날같았는데, 이불을 시치는 일은 언제나 할머니의 몫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이불을 시칠 때, 나는 그 이불이나 요 위에 눕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날밤은 꿈도 어서석거릴 듯이 이불과 요 모두가 당기지 않아도 어서석했습니다.
건물과 밭을 합쳐 200여평이 될까 넘을까 정도의 터입니다.
도시인들 대부분의 꿈이 노후에는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다입니다. 그 꿈은 우리가 살아서 이루고 싶은 마지막 꿈이기도 합니다.
전원생활은 나름 저축이 좀 되어 있어야 하며, 100여평 이상의 터가 있어야 합니다.
전원생활이라고 하지만 논농사는 사실 어려워 곡식종류는 팔아야 하며, 일상의 소소한 지출이 있기에 약간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농장을 경영하는 일이 아닌 전원생활은 소일삼아 즐기는 생활이 될 겁니다. 또 대부분 이런 생활을 염원하고요.
작은 터가 있다면 어떻게 꾸미는 것이 좋을까, 시골생활이라고 하양 풍경만 구경하며 보낼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텃밭의 풍경을 멋 보다는 맛을 위주로 담아봤습니다.
부부와 손주가 소식없이 찾은 객을 위해 원두막에서 내려왔습니다.
요즘은 원두막을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물론 손수 짓는다면 더 멋스럽겠지만, 전원생활을 선호하지만 많이 움직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듯 합니다.^^
본채와 원두막 사이에 수도와 장독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곳에 거주하시고 할머니는 부산에서 생활을 하시며 가끔 이곳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혼자의 생활에 비해 독이 많은데, 도시에서 생활하는 할머니와 자녀들의 농산물 내지 장아찌류의 보관이 목적같습니다.
넓지않은 터를 알뜰히 가꾸었습니다.
▲ 천일홍입니다. 천일홍은 흰색도 있는데 꽃이 오래 피어있으니, 여름 한 철 그만인 꽃입니다. 옆으로 채송화가 있는데 벌써 졌더군요.
위와 아래 사진을 보면 나무를 놓아 자연스레 통행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행로와 밭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돌과 기와도 있는데, 통행로와 밭을 구분해 주는 나무는 탁자가 되며 의자도 됩니다. 제가 가기전에 두 분이 무얼 드셨나 봅니다.^^
▲ 화단과 텃밭의 경계를 나무로 했으며 자연스런 통행로가 되었습니다.
아래의 풍경은 산벽쪽입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자연스레 담 내지 울이 되었는데, 수생식물단지더군요. 부들, 창포, 노랑어리연, 연, 부레옥잠 등이 심어져 있었고 잉어가 놀고 있었습니다.
손주의 자연학습이 이우러졌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식물의 종류에 따라 경계가 있는데, 돌과 기와입니다.
물론 골을 만들어 구분을 지을 수 있지만, 그럴 경우에 흙이 흘러내릴 수 있는데, 돌과 기와, 나무로 경계를 하니 흙이 흘러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좋았습니다. 반짝이는 생각은 식물을 편안하게 하며, 보는 이도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합니다.
수생식물 뒷쪽 언덕으로 유실수를 심으면 됩니다.
담장에 어울리는 덩굴식물은 전에 포스팅을 한적이 있으며 생울을 하고 싶다면 사철나무와 향기가 좋은 백정화가 좋습니다.
나무를 굳이 자르지 않더라도 숲에는 베어 버려진 나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나무를 필요한 높이로 잘라 화분대로 만들었습니다. 자르기만 하면 화분대, 탁자, 의자가 되는 것이 나무입니다.
나무화분대의 식물은 뱀딸기같습니다. 흔합니다. 물론 흔하다고 마구 채취를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솎아준다는 의미로, 해서 남은 식물이 더 번창하게 한다는 뜻으로 솎아 화분에 심었습니다. 자연스레 흘러내리며 먹지는 않겠지만 빨간 열매도 만날 수 있습니다. 흙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자연에 가까운 곳이기에 잘자라고 있었습니다. 솎아 준다고 뱀딸기를 채취하여 집(특히 도시)에 심으면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니 도시인이라면 아예 시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콩밭 가장자리, 통로쪽으로 당귀가 많았습니다. 우리 허브입니다. 당귀는 약재며, 잎은 쌈으로 먹고 꽃은 눈과 마음으로 즐기면 됩니다. 아주 향기로웠습니다.
집의 둑이라고 해야 하는지 밭의 둑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둑에 쑥이 말려지고 있었습니다. 쑥 역시 우리 허브입니다.
탈취재며 약재고 식용인 쑥입니다. 요즘은 불을 지펴 모기를 쫓습니다.^^
이집은 평상 대신 원두막이 마당가에 있습니다. 평상보다 원두막이 모기장을 치고 밤을 보내기에 더 좋을 듯 합니다.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었는데, 남해 어머니댁에 가면 여름에는 평상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날벌레가 많으니 당연히 모깃불을 피웠지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시골에도 분무용 내지 판매를 하는 모기향을 피우는데, 남해에는 모기향을 만드는 공장도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들깻잎 같은 삼을 삼았습니다. 허벅지가 벌개지도록.
"아가(혼인한지 20년이 지났을 때도 어머니는 새애기라고 했습니다.), 이불을 만들거라, 옷을 만들어도 좋고. 내가 해주면 좋겠구마는 요새는 신식모냥이 많으니 신식으로 만들어라."
어머니가 주신 삼베로 우리 부부는 옷을 한 벌씩 짓고 삼베이불을 만들고, 우리 얼라들 옷 한 벌씩 만들어 주라는 삼베는 지금 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갯벌로 속을 잡으러 갔습니다. 속은 찌개를 하거나 튀김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갯벌에 발이 깊이 빠지니 지옥이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평생 그렇게 살다 가셨습니다.
이제, 오가리가 무엇인지 알고, 오시다, 가시다, 하게… 이 모든 뜻을 아는데, 어머니는 계시지 않습니다. 여름 휴가때 어머니께 다녀와야 했었는데, 여의치가 않아 뵙지를 못했는데, 곧 성묘를 갈 예정입니다.
다시. ^^
채송화는 번식력이 좋습니다. 그저 자라게 두어도 좋지만, 밭을 일굴 때 나온 돌을 쌓아 채송화밭을 만들었더군요. 처음 채송화밭을 만들었을 때, 이 둑에 앉아 차를 마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래는 까마중입니다. 이늠은 익으면 까만색인데 어릴 때는 먹거리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먹지않습니다. 특이하게 까마중이 밭의 울이었는데, 통로를 만드는 그런 울이었습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간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꽈리는 흔하지만 먹지는 않거든요. 물론 꽈리를 심는다면 요즘 붉어지는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새삼 주목 받는 게 독입니다. 음식점의 소품 0순위입니다. 텃밭 입구에 독을 두 개 두었으며 그 앞에 댓병이 있는데, 요즘은 이런 색의 병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엄마는 막걸리가 남으면 식초를 만들었습니다. 댓병에 담아 시꺼먼 부뚜막에 두었습니다.
흔들지 말고 살살 따라라~ ^^
갈색의 댓병이 반갑더군요.
독 뒤로 덩굴식물이 지지대를 감거나 타고 올라 있는데, 처음 보는 식물이었습니다.
'넝쿨풍선'이라고 하였는데, 꽈리같은 게 대롱대롱 달려있는데, 가을에 갈색으로 익는답니다. 풍선같은 껍질과 그 안의 알맹이도 갈색인데, 가을에, 덩쿨풍선이 익을 때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씨앗을 나누어 주시겠데요.^^
다른 곳을 다녀도 그렇습니다.
언제 오너라, 그때 주마 -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누기를 모두 좋아하나 봅니다.
부지깽이가 있는 정지입니다. 빗자루는 신식이지만 옛날 정지와 비슷했습니다. 방은 한 개 같았습니다. 아무리 허락하에 담는 일이지만 마루에 풀쩍 오르기도 그랬고, 방이 몇 개인가요하며 여쭙기도 좀 뭐 했기에 기웃거리기만 했습니다.
간단한 물 끓이기 등은 전기로 할 수 있겠지만, 가마솥이 걸려있는 정지며, 창(환풍구)을 배경으로 마늘이 걸려 있습니다.
딱 먹을만큼 그렇게요.
다음 달이면 메주콩을 타작하고 마늘을 심어야 합니다. 추석 즈음에 마당에는 콩이 말려졌으며, 우리는 마늘을 쪽을 냈습니다. 일손이 귀하니 추석때 조금이라도 도와야 했습니다.
남해에는 시금치와 콩, 마늘이 많이 났습니다. 모내기철에 남해에 가면 집을 지키는 것은 마늘이었습니다. 골목, 헛간, 담장, 지붕에서 여유롭게 집을 지키고 마을을 지켰습니다.
이제 남해아버지는 마늘농사를 짓지 않으며, 우리는 친정에서 조금씩 얻어 먹습니다.
이제 장을 담그는 일도 하지않습니다. 엄마는 어린 새댁인 나에게 독을 몇 개 사주며, 장은 담가무야 한다 - 라고 하셨는데, 이제 진짜 메주가 없기에 장을 담그지 않습니다. 간장과 된장이 아직은 어머니 때 담근게 좀 있지만, 설사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장을 담글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우리 엄마까지 가시면, 그때는 내가 이것저것 담가 올케들에게 주어야 겠지요.
시골살이가 이렇습니다.
편안할 것도 아주 불편할 일도 없지만,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덜 보고 덜 듣는 세상이만, 가공되지 않은 것들을 보고 만나기에 욕심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이비 시골살이입니다. 해서 위의 풍경들이 제가 꿈 꾸는 그런 삶이기도 합니다.
며칠전에 아버지께서 천사의 나팔이 피었다고 찍어라고 하셨는데 피곤하여 친정엘 못갔습니다.
새로운 꽃이 피면 연락을 해 주는 아버지인데 혹 마음이 상하신 건 아닌지 오늘은 친정과 들에 다녀올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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