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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우토로 마을 가덕도 외양포

by 실비단안개 2009.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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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휴일 가덕도 외양포를 다녀와서

 

가덕도 외양포를 처음 찾은 날은 9월 6일 일요일었습니다.

외양포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지지 못한 채 천성에서 대항을 넘어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기에 달려갔습니다.

막연한 것은 산길과 해안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어디즈음에 '가덕도 등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긴 했습니다.

 

차 두 대가 겨우 비켜 다닐만한 산길을 달려 닿은 곳은 아주 작은 포구였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옥들이 일본식이라는 겁니다. 진해는 이미 알려진대로 일제의 잔재가 많기에 일본식 건축물이 남아 있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데, 굽이굽이 산을 넘은 깊은 포구에 있는 일본식 가옥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일요일이라 원주민보다 외지 차량이 더 많았기에 우리는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이상한 건물들과 마을을 살피는 데, 중년의 남자 한 분이 다가와 외양포의 역사 부분을 들려주었습니다.

 

'가덕도 일주하고 해산물 정식 먹고 '의 가덕도 소개에서, '가덕도는 역사의 섬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일본의 침략이 잦았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군사기지와 곳곳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병기를 만들던 곳집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왜군이 외양포에 만든 군사기지와 인공동굴 등 아픈 역사의 현장을 남기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 마을의 주택 부분입니다. 주택 대부분의 모습이 비슷한데 생각나는 풍경이 없나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외양포 가기

      

일요일 방문 때 사진은 충분히 찍어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 할 것 같아 9일 오전 7시에 집을 출발하여, 용원에서 가덕행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오전 7시 42분 승차였으며, 종점은 가덕도 '천성'이었습니다.

버스는 약 1시간 간격으로 배차가 되었으며, 15인승 미니버스였지만, 요금은 시내버스 요금이었고 교통카드(하나로 카드, 마이비 카드 가능)가 가능했습니다.

 

마을 버스의 종점이 천성이기에 대항과 외양포로 가는 길은 모릅니다. 그러나 가다보면 길이 있겠지하며 가덕행 마을버스에 올랐고, 승객과 버스 기사님에게 정보를 얻어야 했습니다.

차편(선창마을에서 택시 승차 가능)이 없을 경우 외양포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는 데, 감사하게 대항과 외양포간 도선이 천성에서 오전 9시에 출발을 하며, 하루 4회 운항이 된다고 하니 외양포에서 머물 수 있을만큼 머물더라도 천성으로 나올 걱정은 하지않아도 되었습니다.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길이지만 교통편은 마을버스 안에서 해결했습니다.

 

기사님께서 천성 종점에 내려주며, "일찍 나온다꼬 아침을 몬 묵었을테니 저 집(손가락으로 식당을 가르키며)에 가서 기사 이야기 하고 밥 달라하소. 뭐 묵고 가야지, 외양에는 식당이 없으께."

 

용원에서 가덕 천성까지의 이동 시간이 약 40분이었기에 밥집에서 식사를 하다가는 9시 발 도선을 놓칠 것 같아 40여분간 마을과 천성의 들을 둘러 보기로 했습니다.

 

천성의 들에서 고구마꽃을 만나고 도선 출발 10분 전에 선착장에 도착하여 캔커피와 제크를 구입해 가방에 넣었습니다.

 

8월 17일 이후부터 용원과 가덕도간 도선이 없어졌기에 슈퍼에서 매표가 불가했으며, 선권은 진양호에서 선장님에게 구입을 했는데, 안내와는 달리 외지인은 2천원이며, 지역 주민은 무료입니다.

 

천성을 출발하여 대항을 거쳐 외양포로 가는 진양호에는 선장과 기관사와 승객은 나 혼자였습니다.

승객 한 사람을 위해 큰도선이 파도를 가르며 천성항을 출발했습니다.

 

천성에서 외양포로 가는 길에는 침매터널 공사 현장과 거가대교 공사 현장, 진해의 연도와 시루봉 등이 보이며, 가덕도의 연대봉과 거제의 섬들이 겹겹으로 보입니다.

 

역사의 포구 외양포 도착

 

외양포에 내가 또 갈 수 있을까, 꼭 다시 가야 하는 데… 하며 다시 찾은 외양포입니다.

집을 출발 할 때 부터 흐리던 하늘은 외양포에 도착했을 때도 흐렸으며, 낚시꾼들에게는 밤낮이 없는지 갯바위와 방파제 곳곳에서 손맛을 느끼고 있더군요.

 

9월 6일과 9월 9일 외양포를 찾았으며,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6일 - 50대 남자, 마을 할머니 두 분이었으며,

9일에는 50대와 60대 남자와 70대 할머니 한 분입니다.

여섯명과 나눈 이야기를 제 생각을 곁들여 엮겠는 데, 이 기록이 100% 정확하지 않을 수 있기에 추가 정보와 더 정확한 정보는 댓글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선창에서 본 외양포 마을

 

6일에 만난 50대 남자는, 지난해에 지역으로 내려왔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기에 주민에게 수소문을 해야 했습니다. 거가대교와 등대 등 주변으로 공사가 많기에 공사장에 근무를 하는 분들이 더러 있었는데, 젊은 남자에게, 혹 그런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니, "소장님"하며 다른 건물을 찾아 남자 한 분을 부르더군요. 그런데 며칠전에 만난 분인지는 가물거렸습니다.

참 애달픈게, 제가 사람 얼굴을 금방 익히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분은 식사 중이었기에 나중에 다시 들리마하고 마을을 둘러보며 마을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 얼핏 보기에는 나무나 벽돌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가옥은 함석입니다. 마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담장이 대부분 없으며, 경계는 텃밭인데 바람막이용인지 옥수수를 많이 심었습니다.

 

외양포는 한국의 우토로

 

지난주에 50대 남자가 그랬습니다.

자녀가 일본에 유학 중이기에 일본에 9번 정도 다녀왔는 데, 일본 어디에도 외양포 마을같은 건축물은 없다고요. 우리나라에 초가가 사라졌듯이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일본의 주택이 대부분 현대식 건물이라는 이야기지요.

꼭 한군데 있는 마을인 우토로 이야기를 하니, 그 분은 우토로는 모른다고 하더군요.

 

2년전 여름 우리 블로거를 뜨겁게 했던 '우토로에 희망을'을 기억하시지요?

블로거와 네티즌이 우토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희망을 드리고자 블로거 뉴스(다음 뷰)에 무수히 송고와 추천을 했으며, 블로그 연대를 뜨겁게 느낀 기간이었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비행장 건설이 중단되는 바람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한 이후, 일본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우토로 51번지에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마을이 우토로입니다.

 

 

우토로 마을

 

일본 교토부[京都府] 우지[宇治] 이세탄초[伊勢田町] 우토로 51번지에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마을.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1년 교토[京都] 군비행장 건설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1,300여 명이 집단 합숙을 위해 건설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비행장 건설이 중단되는 바람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한 이후, 일본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전후보상도 받지 못한 채 우토로마을은 방치되었다. 같은 해 9월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조선인학교를 세웠지만, 이마저도 1949년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더욱이 원래 교토부 토지였다가 닛산차체(주)로 넘어간 우토로 토지는, 1987년 닛산자동차 그룹이 경영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주민들 몰래 주민회 회장에게 매각하였다. 주민회 회장은 다시 4억 5000만 엔에 부동산 회사인 서일본식산에 매각하였고, 매입과 동시에 서일본식산은 주민 전원에게 퇴거를 강요하였다. 1989년에는 교토지방재판소에 주민들을 피고로 '건물수거토지명도' 소송을 제기해 1998년 승소하였다. 주민들은 이에 불복해 오사카고등재판소 항소를 거쳐, 최고재판소에 상고하였으나 모두 기각됨으로써 사법적 판결은 끝이 났다.

이로써 우토로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갖은 노역에 시달린 것도 모자라,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며 자신들의 손으로 피땀 흘려 세운 터전마저도 빼앗기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진 출처 : 우토로 다음 카페 - 카테고리 '우토로' 참고)

 

외양포 마을은 일본 해군사령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던  곳으로, 마을이 외지기에 외부에 노출이 되지않으며, 러일전쟁  당시 적의 비행 레이다에도 포착이 되지않아 비행폭격에 무사했다는 마을입니다.

 

1904년말 러시아는 육군에서 일본에게 밀리자 발틱 함대가 원정길에 올랐는 데, 발틱 함대는 로제스트 벤스키 해군사령관 휘하의 발틱 함대와 3천명의 병사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1905년 4월 7일에 가덕도 포대 사령부를 편성하였습니다.

발틱 함대

러일 전쟁 때 일본 원정을 명령받은 발틱 함대는 Z. P.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이 지휘하는 가운데 1904년 10월 15일 리바우 군항을 출발, 사상 최장의 원정길에 올랐다.

기함 '스와로프호'를 비롯해 전함 8척, 장갑 순양함 3척, 순양함 6척, 장갑 해방함(海防艦) 3척, 가장(假裝) 순양함 5척, 구축함 9척 및 공작선·병원선·수송선을 동반하고 있었다. 1905년 5월에 동해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벌어진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관이 지휘하는 일본 연합함대에 섬멸당했다. 발틱 함대는 또한 소련 해군의 4개 함대 중 하나였다.(출처 : 다음 사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시킬 목적으로 남부지방에 군사령부(거제와 진해에는 해군 사령부, 부산은 육군사령부)를 견고하게 만들어 나갔으며, 1909년 7월 외양포 군사령부를 마산으로 옮기고, 1914년 11월 진해로 최종 이전하였습니다. 현재 외양포는 진해 해군사령부 관리 아래에 있습니다.

 

 

해방이 되어 일본군이 자국으로 돌아간 후, 외양포는 버려졌으며, 가옥이 없는 이웃 마을 주민들과 대항리 주민들이 외양포로 이주를 했는데, 이주 결정은 제비뽑기로 했다고 합니다. 대항에서 외양포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며, 당시 우리나라의 주택은 대부분 초가인데 반해 일본 해군의 막사의 외형은 우리나라 서민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황송한 건물이었기에 너도나도 이주하기를 원했나 봅니다.

 

대항마을의 주민들이 이주를 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지만, 해방 후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주민들은 불하를 받지 못했고, 후에 주민들이 불하 요청을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어지더니 60년 대 간첩 침투건이 많을 무렵 외양포는 국방부 소유가 되었으며, 개량이나 증축 등이 불가능한데 건물주는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입니다. 그러나 땅이 국방부 소유이니 거래 등은 실제 없는 상황입니다.

일본군이 남긴 시설로 군막사, 우물, 포대, 동굴 등이 있으며, 그들의 군막사(장교 관사, 무기창고, 군인 사택)는 현재 내부가 개량되어 주택 구실을 합니다.

 

형무소와 방풍림(위장림)

 

선착장에 내리면 마을 왼편으로 구멍가게가 있는 데, 외양포의 유일한 가게로, 일본 해군의 형무소로 지하가 있었는 데, 현재 거주하는 할머니께서는 "한 며칠 잡아 가둔 것 같다"라고는 하셨지만, 형무소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고 하시더군요.

 

할머니께서는 20세에 시집을 와서 54년을 외양포에서 생활을 하시는 데, 현재의 안방에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지하가 있었으며, 위는 나무를 덮어 두었기에 외지인이 볼 때는 마루같았으며, 겨울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지하에 짚을 둘러 고구마를 보관하기도 했는 데, 후에 직접 돌을 넣어 메웠다고 했습니다.

 

가게는 외양포 매표소였지만, 8월 17일자로 용원행 도선이 중지되었기에 현재는 가게와 민박을 운영합니다.

 

외양포 앞 마을인 대항 마을 입구가 좁기에 1톤 트럭 정도만 드나들 수 있기에 과자 등 물건을 어떻게 들여오느냐고 여쭈니, 혼자 생활을 하시니 부산에 거주하는 자녀가 필요한 것들을 부산에서 마련해 온다고 합니다.(제가 염장질을 많이 했기에 할머니께 죄송합니다.)

 

외양포의 주택은 1가구도 있지만, 두 세 가구가 함께 생활을 하며, 30여 가구입니다.

태풍 매미 이전에는 지하수를 사용했지만, 매미로 마을이 부분 바닷물에 잠긴 후 수도 시설을 하여 현재는 지하 수도를 사용하며, 전기는 20여년전에 들어 왔습니다.

 

마을 앞으로 방풍림같은 소나무가 있는 데, 소나무는 일본군이 대항마을의 어린이들을 동원하여 심었는 데, 태풍 매미때 많이 유실되어 현재는 몇 그루만이 바람을 막으며,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됩니다.

 

할머니들은 소나무 그늘에서 마늘을 까거나 쉬면서  먼 바다를 보고 계셨습니다.

 

다니다가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성함을 여쭈면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는 성함을 밝히기를 꺼려 하시는데, 외양포 어르신들은 대부분 노령이며 90 세의 할머니도 계십니다.

 

주택 이용료랄까 부지 이용료랄까, 년 단위로 가구당 이용료를 내는 데, 가구의 면적과 위치에 따라 차등이 되는데, 년 5만원 이상이며 많이 내는 가구는 10만원을 넘게 내기도 한답니다.

 

가옥 (실제 소유지이지만)소유주임을 주장하고 싶으신 할머니께서 발끈 하시더군요.

"너그는 집 세나 땅 세 안 내나? 그거하고 같은 거 아이가?"하시면서요. 그러면서 선거철이 되면 부지 불하건이 공약에 꼭 들어 있다는 말씀을 주셨는 데, 선거철이 끝나면 정말 空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외양포는 고향

 

63세 이상욱 할아버지의 부모님(작고)은 일본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을 하셨는 데, 일본에서 비행기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조선인이 비행기 공장에서 일을 했다는 건 약간의 무리일 수 있는 데, 어쩌면 비행장 건설에 동원 된 우토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같은 생활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귀국을 한 부모님은 외양포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 할아버지는 대항분교 졸업 후 부산 해동중고를 나와 객지 생활을 하다가 뇌졸증 진단을 받고 휴양차 5년전에 식구들을 두고 혼자 고향인 외양포로 왔는 데, 현재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주택은 여동생이 관리를 했기에 크게 상하지 않았기에 생활에 무리는 없다고 했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데 찬거리 등은 어떻게 장만하시느냐고 여쭈니, 딱히 시장에 갈 일은 없으며, 채소는 작은 텃밭에서 거루며 생선은 마을에서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외양포는 젊은 세대가 없기에 어망일은 접어진 상태며, 갯바위와 방파제에서 사철 낚시가 가능합니다.

외양포 해변은 외양포 해수욕장이었지만, 자갈의 유실로 경사가 가팔라 해수욕장의 기능을 상실했기에 어패류 채취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뜰에는 둥굴레가 열매를 맺었으며, 감귤나무와 사과나무가 자라며, 옛날 장독대 자리에는 수도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의 내부를 보여주며, 현재는 천장이 도배가 되었지만, 어릴 때 천장의 풍경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었으며, 기둥이 있었고, 포를 매단 흔적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 할아버지의 집 내부

 

포부대 시설

 

주민 이성태(56세)씨의 고향은 외양포입니다. 이성태 씨의 아버지 고향은 하동으로 아버지는 7세 때 고향을 떠나 대항포로 들어 와 배를 탔으며, 마을 처녀와 혼인을 하여 몇 년간 고향인 하동에서 생활을 하다가 외양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이성태 씨는 대항분교, 가덕의 덕문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노모와 함께 생활을 합니다.

 

이성태 씨는 외양포의 역사적 사건을 비교적 많이 알고 있기에 외지인을 안내하며, 포부대와 마을 형성 과정 등을 설명해 줍니다.

식사를 하던 그가 포부대로 찾아왔습니다.

 

일본은 1936~1938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많은 석비를 세웠는 데, 이는 조선 식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였으며, 러일전쟁 승리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 중 외양포 마을 안쪽에도 기념비가 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산봉우리를 '먼댕이'라고 하는데, 이성태 씨가 서 있는 뒷쪽의 산이 가덕도의 표현으로, '국시먼댕이'라고 하는 데, 국시먼댕이에는 관측소가 있었으며, 포부대에는 곡사포 3개가 있었는 데, 사진의 공터 3 곳이 곡사포가 있었던 자리로 일본군은 곡사포를 가리기 위해 나무를 심었으며, 지금은 베어졌지만, 둥그런 형태가 남아 있는 데 잡초가 자라며, 일본군의 포 창고는 염소의 훌륭한 잠자리 겸 안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포부대 입구에 '사령부 발상지지'기념비가 있습니다.

진해의 제황산(해발 90m) 정상에는 1927년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이긴 러일전쟁의 전승기념탑을 전함의 마스터를 본따 세웠으나(탑산), 해방 후 이를 헐고 1967년에 해군군함을 상징하는 탑(진해탑)을 건립하였습니다.

 

또 진해우체국이 승전 기념으로 건축한 건물인데, 일제가 러일전쟁(1904~1905)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09년에 진해 시가지를 도시계획 하면서 일본 해군깃발을 본떠 중앙광장(현 중원로타리)을 중심으로 방사선형태의 여덟 갈래의 길을 냈고, 도로사이의 부지위에 세계주요 8개 국가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설계, 8개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이중 7개 국가풍의 건물은 노후화되어 현대식 건물로 개축되어 그 모습이 사라졌고, 러시아식 목조건축양식으로 - 면적451㎡(136.7평)규모- 지어진 우체국(당시는 진해우편국)만 보존되고 있는 데, 현재 보존되고 있는 진해우체국 건물은 1912년 10월 25일 준공되었으며, 198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91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잔흔을 보존을 하느냐 헐어야 하느냐로 의견이 나누어지는 상태입니다.

 

외양포의 기념비 또한 그들의 흔적이기에 보존을 하여 역사적 교훈을 삼아야 하는지 헐어야 옳은지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요?

 

 

   

    ▲ 포부대시설 입구의 기념비 : 전면에 司令部發祥之地(사령부발상지지), 후면에 소화11년 6월 건립 명문이 있는 데, 소화 11년은 1936년입니다.

 

        ▲ 포부대는 3동의 건물이 있는데, 높이는 보통 여자의 키(제 키로 재었는 데, 160m입니다.) 높이였으며, 내부 길이는 10여 미터가 되는 데, 공터에 동그랗게 풀이 자란 곳이 그들이 위장을 위해 나무를 심었던 자리입니다.

 

     ▲ 손전등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내부는 들여다보는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일본군 장교 관사와 군인 사택이 변한 외양포의 주택입니다.

 

 

 

 

        ▲ 외양포에는 여러개의 우물이 있는 데, 제가 확인한 우물은 다섯개며, 위의 우물은 지붕이 보존 된 우물입니다.

현재 주민들이 어릴 때는 식수로 사용했지만, 지하수가 개발 된 후 부터 우물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한지붕이지만 칸칸 색이 다른 외양포며, 외양포 마을 윗쪽의 길이 대항으로 가는 길이고, 뒤의 산은 연대봉이며 솟은 바위는 외톨괴 바위입니다.

 

현재 외양포에는 어린이가 없습니다.(만약 아기가 태어난다면 이웃 마을에 있는 대항분교로 등교)

마을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젊은 세대가 모두 떠났기 때문입니다.

국방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지역민이 어떠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에, 평생 터전인 외양포가 자유로워져 주민들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입니다.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며, 섬 여행은 많은 이들이 선호합니다.

단순 관광도 좋겠지만 역사의 현장을 느껴보는 여행도 좋을 것 같으니, 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아 외양포의 과거와 현재를 느껴보시기를 권합니다. 또 가덕도는 섬 전체가 낚시터이기에 낚시와 (연대봉)등산도 가능합니다.

 

가덕도 마을버스와 도선 시간표

     ▲ 용원 <-> 가덕 천성 마을 버스 시간표                            ▲ 가덕 천성 <- > 대항 ·외양포 도선 시간표

     (클릭하면 확대 가능)

 

다음 편에는 '가덕도 등대' 100년사를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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