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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 가덕도 등대 타임캡슐에는 무엇이 저장되었을까?

by 실비단안개 200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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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전의 외양포 어린이가 기억하는 가덕도 등대

 

외양포 주민들은 어린 시절에 가덕도 등대로 소풍을 갔다고 합니다.

어린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등대가 가덕도 등대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당시 소풍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겠지만요.

등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불빛입니다. 외진 외양포 마을에 전기 시설이 된 것은 20여년전이라고 했습니다. 연대봉 너머의 세상 풍경을 외양리 주민들은 가덕도 등대 불빛을 따라 접했을까요.

 

가덕도 등대로 소풍을 갔던 외양포와 대항의 어린이들은 해가지면 먼 산길을 걸어 가덕도 등대로 갔습니다. 유일하게 텔레비젼 시청이 가능한 곳이 가덕도 등대였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젼이 있다고 등대에 전기시설이 된 건 아니며, 발전기로 등대불을 밝히고 텔레비젼을 시청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외양포 마을의 한 집에서 텔레비젼을 구입했으며, 어린이들은 어두운 산길을 걸어 가덕도 등대로 텔레비젼을 시청하러 가지않아도 되었는 데, 전기시설이 된 게 아니라 밧데리로 텔레비젼 시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군인들이 보초를 서기에 드나들 수 없지만, 가덕도 등대는 외양포 어린이들의 소풍지며 놀이터였고, 밤이면 사랑방 구실을 했습니다. 이런 일은 그 어린이들이 자란 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외양포 마을 입구에는 가덕도 등대 '100년 기념관'공사 안내가 있습니다. 또 군인들이 보초를 서기에 개인이나 단체일지라도 허락없이 출입을 할 수 없는 등대가 가덕도 등대입니다.

 

첫 방문날에 대화를 한 남자분이 그랬습니다. 외양포는 진해 해군사령부 아래에 있기에 등대 출입을 하려면 진해 해군사령부에 승인을 받아야 하는 데, 그 기간이 3일 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언제 외양포를 찾을지 모르며, 영영 찾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내친 걸음에 가덕도 등대를 찾기로 했습니다.

고맙게 마을 주민 한 분이 군부대에 연락을 해 주마 했는 데, 마을 주민들은 일부인지 모르겠지만, 출입이 가능한 모양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초소쪽으로 산책을 한다는 어른도 계셨거든요.

 

 

등대로 가는 길 

 

다시는 바다에 나가 숭어를 잡지않겠다고 맹세를 한 것처럼 숭어잡이 배는 온몸을 싸서 공중화장실 옆에 있는 데, 그 곁을 지나 언덕같은 산을 올랐습니다.

사진의 풍경에 잡힌 시간이 오전 10시 50분입니다.

나는 혼자 다닐 때 시간에 구애를 받지않기에 시간을 확인하는 일은 거의 없는 데, 사진을 편집하면 아~ 그 시간에 - 하며, 시간이 나옵니다.

 

언덕처럼 보이던 산은 결코 언덕이 아니었습니다. 흐리던 하늘이 개이고 경사가 진 시멘트길은 금방 지치게 했습니다. 걸어 온 길을 돌아 봤습니다. 마을이 제법 멀어졌기에 곧 군인 초소를 만날 것이며, 초소만 통과하면 가덕도 등대가 있을 거야, 어린이들이 텔레비젼을 시청하고 밤중에 걸어 온 길이 이 길이니까…. 천성에서 구입한 차가웠던 캔커피가 닝닝했습니다. 그러나 물과 커피가 고팠기에 맛을 따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마을 주민이 카메라는 가방에 넣고 가는 게 좋을 것 갔다며 염려어린 당부를 했습니다.

군사시설 지역은 사진촬영이 금지라는 걸 진해 시민이기에 알지만, 외양포 주민의 눈빛이 고마웠습니다.

마을을 벗어날 때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지만, 몇 발자국 가지않아 꺼내야 했습니다.

흔하지만, 외양포에서 만나는 들꽃을 담아야 했기 때문인데, 초소로 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번거로웠지만 반복했습니다.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열매 떨어진 후박나무가 팔을 벌려 반겨줍니다. 익은 꽃과 나무들이지만, 하나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카메라에 담으며 해병대 초소에 닿았습니다.

철망울에 철망문입니다. 이제 조금만 가면 등대겠구나…. 활짝 웃으며, "조금전에 마을에서 연락을 했지요?" 하니까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개(犬)인데, 묶어졌지만 큰개가 있으며, 보이는 건 울이 둘러진 건물과 초소와 숲인 데, 연락을 받지 못했다니 완전히 급당황이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마음으로 쓸어내리며 보초병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 계속 연락을 했고, 마지막으로 주민등록증을 보여 드리고 통과를 했습니다.

'야호'는 산 정상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초소를 통과하면 바른 길과 숲으로 향하는 길이 있는 데, 바른 길로 곧장가면 등대고 왼편의 숲길은 동백군락이 있는 곳인 데 군사보호지역이라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바른 길은 차량 통행이 가능하지만, 흙과 시멘트 길이 반복됩니다.

초소를 통과했는 데, 흙길이면 어떻고 시멘트 길이면 어떻습니까. 고지가 저기인데.

 

봄 밥상에 오르던 취나물이 꽃을 피웠습니다. 등골나물도 꽃을 피웠고, 며느리밥풀도 하얀밥풀을 진분홍 입술에 물고 있습니다. 몇 종류의 나비가 날고 앉고, 그냥 산길에 주저앉아도 충분히 좋은, 등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에서 출발할 때 흐리기도 했지만, 기온이 높은 곳에 가거나 여름이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에 나는 언제나 긴팔옷을 입고 다니는 데, 땀이 팥죽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등대로 가는 길이고 가는 길에서 원없이 꽃과 나비를 만나니 투정을 절대할 수 없습니다. 꽃과 나비를 만난다고 잠시 멈추었던 걸음은 내딛으면 다시 씩씩해졌고, 중간에 다시 캔커피를 꺼냈습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릅니다. 출발을 할 때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으며, 길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산길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였고, 드디어 저마치 소나무 숲속에서 등탑이 솟아올랐습니다.

하하 등대다!

 

         ▲ 해군부대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한 채 반가움에 줌으로 잡은 가덕도 등대

 

소풍장소로 좋은 넓은 터가 나왔고 쓰러질듯 한 장승이 반겨주었습니다.

등대가 코앞이지만 나는 길섶에서 만나고 또 만난 등골나물과 참취에 앉은 나비와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복병을 만났습니다. 물론 만났을 때도 복병인줄 몰랐는 데, 해병대 초소와는 다른 해군부대였으며, 역시 저지를 당했는 데, 당당하게, "초소에서 연락을 받지못했나요?"하니,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 그 부대와 우리는 다릅니다"하더군요.

육해공을 구분 못하며 군인의 계급을 읽을 줄도 모릅니다.

 

해병대 초소에서와 같은 대화를 했습니다.

등대 체험을 원하는 1인으로.

다시 주민등록증을 꺼내 드리고 보초병은 어딘가로 또 전화를 하고, 나중에 나도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사인을 한 후 통과를 했습니다.

 

연병장 기웃거리지 않기, 군부대 어떤 시설도 사진으로 찍지않기.

앞의 초소와는 달리 해군부대였습니다.

건물이 있고 길이 제대로 없기에 연병장의 군인을 불러 안내를 받아 등대로 갔습니다. 등대 입구는 공사중입니다. 낮 12시 25분입니다.

거리는 4km쯤? 들꽃과 노느라 보통인과는 달리 시간이 더 걸렸는 데, 외양포에서 등대까지 1시간 30여분 걸렸습니다.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

 

여행인구의 증가로 등대는 더 이상 신비의 대상이 아니며, 어릴 때 불렀던 '등대지기'노래도 이제 몽롱한  노래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 등대입니다.

그래도 궁금한 부분이 있는 데, 그중 등대의 정확한 임무와 언제 세워졌을까 입니다.

 

오래전의 노래 제목에 '등대불이 왜 켜져 있는지 그대는 아시나요'가 있었습니다. 가사는 모르지만, 대중가요 중에서 제목이 가장 길다고 했지요.

이 글을 읽는 그대는 등대불이 왜 켜져 있는지 아시나요?

 

등대의 기능

선박이 안전한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박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연안을 항해할 때나 출입항할 때에는 육상의 뚜렷한 목표 예를 들면 섬, 곶, 산봉오리 등을 이용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는 곳이나 야간에 항행할 때에는 이들 자연목표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선박의 위치 확인이 곤란하다. 


특히 대양에서 연안으로 접근하거나 항만에 이르는 좁은 접근수로 및 항내에서는 침로를 변침하거나 위험한 암초, 천소 등 자연적 위험물과 침선 및 각종 해상공작물 등의 인위적인 장해물이 있는 장소나 야간, 무중 또는 강설, 폭우 중 항행시에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머지 읽기 : http://www.lighthouselove.com/01_find/find04.jsp

 

등대의 역사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었다.
그뒤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국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온다.

또한 등대건설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의 인천 도착 날짜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하였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하였다.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도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등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등대의 효시이다. 결국 우리 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출처 : 등대와 바다 http://www.lighthouselove.com/index.jsp)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국의 힘에 부쳐 등대를 세웠지만, 설사 그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에 우리의 필요에 의해 등대를 건립했을 테지만,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는 우리 근대사와 맞물려 있는 슬픈 역사입니다.

 

 

가덕도 등대에는 누가 살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팔미도 등대로 1903년에 세워졌으며, 가덕도 등대는 1909년 12월 83.6㎡ 규모로 지어졌으니, 꼭 100살이 됩니다.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은 가덕도 등대 건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 조성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중이라고 합니다.

 

가덕도 등대의 정식 명칭은 '가덕도 항로표지관리소'며, 기념관은 등대 입구에 건립중이며, 섬 남단 절벽 끝에 매달리듯 서 있는 데, 등탑에 오르지 않더라도, 대마도, 영도, 다대포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 그날도 오전에 대마도가 보였다는 데, 제가 간 시간에는 어렴풋하게 보였습니다.

 

        ▲ 가덕도 등대 정문입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벅찼습니다. 사진의 등대가 100살이 되는 등대며, 이 등대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대신 옆에 2002년 새 등대(105.6㎡)를 지어 운영 중이며, 위의 등대는 현재 

등대가 처음 불을 밝혔을때의 모습으로 리모델링하여 관리가 되며, 세미나실로 운영이 됩니다.

 

해병대 초소와 해군 부대를 통과했는 데 복병을 또 만났습니다. 내가 무서워하는 개인데, 무려 두 마리입니다.

뒤로 물러서기에는 걸은 길이 너무 멀며, 상대가 개다보니 돌아 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 데, 그때 직원이 나오며 물지않으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의 신분을 확인하는 걸로 보아 해군 부대에서 연락을 받은 모양입니다.^^

 

외양포에서 가덕도 등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왔다, 등대의 역사 등을 안내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점심 식사 시간이었기에 소장님과 직원이 식사를 하는 사이 개 두마리를 피하며 등대 외부를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개 두마리가 계속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배낭을 내려 제크 한 봉지를 뜯어 등대 뜰에 휙 뿌렸습니다. 하나씩 주다가는 일이 틀어질 것 같았거든요.

 

     ▲ 나를 못살게 군 놈은 흰색의 백구며, 갈색은 칠복이입니다. 백구는 등대 소속의 개로 나이는 겨우 3개월이고,

칠복이는 해군 소속으로 백구보다 나이가 많지만, 백구에게 지는 듯 백구가 과자를 먹는 걸 구경하다가

두어  개 남으니까 그때서야 먹더군요. 또 고양이가 많은 데 등대 주변에서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가덕도 등대에는 3명이 근무를 하며, 6박 7일 근무 후 3박 4일의 휴식이 주어지기에 2명이 근무중이더군요.

이종학 소장님과 강성군 씨였는 데, 강성군 씨에게 2층 사무실에서 커피를 대접받고 등대도 안내받았습니다.

 

등대를 지키는 사람을 우리는 등대지기라고 했으며 합니다. 소장님께서 서운하신 듯 했는 데, '지기'는 문지기를 이야기 하는 것이기에 비하 된 표현으로 등대를 관리하는 사람은 (항로표지관리소)소장이며, 다른 분들은 직원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종학 소장님은 등대 근무가 20년이 되었으며, 영도 등대에 근무를 하다가 지난해에 가덕도 등대로 발령을 받았고, 강성군 씨 역시  영도 등대에 근무를 한 경험이 있으며, 소장님과 비슷한 시기에 가덕도 등대로 발령을 받아 현재 함께 근무중이라고 했습니다.

 

두 분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가족들이 그립지 않나요?"

소장님은 가족을 잊었다고 하셨으며(잠시 웃음), 강성군 씨는 현재 총각이기에 부모님이 많이 그리운 나이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총각이라면 어머니의 손길이 더 필요할테니 당연히 그립겠지만, 등대에 근무하는 일을 천직인 듯이 답을 했습니다.

 

근무자들의 밥상은 일주일 내내 같습니다. 등대는 대부분 섬이나 외딴 해안에 위치하기에 잠시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얼 장만하러 가기에는 무리입니다.

등대 건물 벽에 낚싯대가 세워져 있기에, "낚시를 가끔 하세요?"하니, 낚시가 아니고 찬거리를 장만하는 일이라고 하더군요.(함께 웃음)

 

소장님께서는, 가덕도는 섬이지만 뭍과 연결이 되었고, 1주일 근무 후 나갈 수 있지만, 전라도의 먼 섬에 근무를 하는 분들은 한 달 근무에 한 달 쉬기에 그들의 생활에 비하면 가덕도 등대 근무는 양호하다고 했습니다.

가덕도 등대의 근무가 양호하다고 하더라도 일반 직장인과는 엄연히 다른 생활이기에 고충을 부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2층 사무실에 들어서니 여러 장비와 컴퓨터가 보이더군요.

커피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화에 어눌하며 기억력도 어눌하고, 글로 표현하는 일도 어눌하기는 마찬가지라 모두 기억은 못하지만, 컴퓨터 이야기는 기억을 합니다.

광통신 인터넷으로 제 블로그에 접속을 해 보니 속도도 괜찮았습니다. 소장님과 함께 블로그 구경을 했지요.^^

 

     ▲ 양식을 수확중인 이종학 소장님과 휴식중인 강성군 씨

 

가덕도(加德島) 등대

 

가덕도 등대에 도착하여 앞을 보니 100년전에 지어진 등대건물이 바로 보였으며, 발 아래에는 타임캡슐이 있었습니다.

부산 해운 항만청에 잠시 들려보겠습니다.

 

가덕도 등대

 

- 최초점등일 : 1909.12
- 위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산 13-2번지
- 구조 : 백팔각 콘크리트(40m)
- 등질 : 섬백광 12초 1섬광(FIW12s) 
- 특징 : 낙동강 하구언에 위치하며 조선시대부터 봉화를 올려 뱃길을 안내하였던 연대봉 등 고대역사를 간직한 섬으로 등대체험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연락처 : 가덕도 항로표지관리소(051-971-9710) (출처 : http://www.portbusan.go.kr/)

 

가덕도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자리잡아 동으로는 사하구 다대포, 서남북은 거제도 동북바다, 북으로는 유라시아와 환태평양의 관문이면서 동북아 허브항만으로 건설한 부산항신항(2006.1.19)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동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과의 거리는 4㎞, 인근의 거제도와의 거리는 10㎞ 정도이며, 대마도와의 거리는 48km입니다.

 

2002년 새로 지어진 지금의 등대는 팔각으로 된 돌출형이며 등탑높이는 40.5m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높은 등대로 같은 해에 건립된 울산  화암추등대(44.5m)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대였습니다.

 

가덕도 등대는 대한제국의 말기인 1909년 12월에 완공 된 등대로서 대한제국 때 건립한 41개의 유인 등대 중 하나로 대부분의 등대가 등탑과 부속사가 따로 있는 데 반해 가덕도 등대는 두 기능을 합친 단일 건물입니다. 옛 가덕도 등대건물은 서구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하나로 2003년 9월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토해양부에서도 영구보존 시설로 지정해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 1909년에 건립 된 가덕도 등대 출입구 : 1m쯤 돌출된 현관 위에 꽃 문양이 새겨져 있는 데, 

대한제국과 황실의 상징인 오얏(자두나무)꽃으로 현관 옆 안내판은 이 문양에

'조선의 자주권 확립을 위한 열망이 담겨져 있다'고 설명합니다.(위의 두 번째  사진 참고)

 

가덕도 등대가 세워진 배경은 자주나 독립과 거리가 멀며,  등대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에서 가덕도 등대 건축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하기에 2003년 부산시 유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됐습니다. 작은 팔각형 등탑을 이고 붉은 벽돌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흰색으로 칠했는 데, 역사적인 사건을 떠나서 본다면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등대 건물 외관과 내부 풍경입니다.

 

     ▲ 부산시 유형문화재 50호 옛 등대 외관 - 아래는 팔각의 등탑과 지붕, 벽돌에 흰 페인트를 칠한 벽과 창문입니다.

고풍스런 모습입니다.

 

     ▲ 내부 풍경 - 옛날에는 온돌방에 앉아 사무 등을 봤으며, 등잔불을 밝혔습니다. 계단은 등탑으로 오르는 계단이며,

아래 아궁이는 부엌이며 가운데는 샤워실로 물을 데우던 통이고, 오른쪽은 현재 세미나실로 이용되며,

여름이면 '여름 해양 학교'가 운영됩니다.

 

 

가덕도 새 등대

 

2002년에 세워진 새로운 등탑으로 가겠습니다.

2002년 7월 3일에 준공된 새 가덕도 등대는 9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40.5m 높이로 지어졌으며, 대양으로 진출하는 선박을 형상화해 동북아 중추항만으로 도약할 부산신항만의 역동적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 40.5m높이의 등탑과 197계단

 

등탑에서 보내는 빛은 직선거리로 40km를 비추는 데, 대마도가 48km거리에 있기에 가덕도 등대 불빛을 대마도에서 볼 수 있으며, 대마도 등대의 불빛도 가덕도 등대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대단한 밝기지요.

 

등탑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하여 언제 오르나 싶더군요. 강성군 씨가 앞서 가고 뒤에서 약간 숨을 헐떡이며 따라 올랐는 데, 생각보다 빨리 정상에 오르더군요.

여수 오동도 등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더라고 하니, 우리나라 등대 중 엘리베이터가 있는 등대는 여수 오동도 등대가 유일하답니다. 얼마전 팸투어 때 오동도 등대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는 데, 눈 여겨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 오동도 등대 - 높이 27m

 

새 등대는 대양으로 진출하는 선박을 형상화했다고 했습니다. 등탑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면 선박모양이 나타나며 태극기가 게양 된 자리가 일반 선박의 태극기 게양 자리와 같습니다. 좀 더 넓게 담았으면 좋을텐데, 군부대이기에 더 넓게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 새 등대 지붕. 새 등대와 옛 등대 사이는 잔디가 깔려 있으며, 골목바람이 시원합니다.

 

         ▲ 옛 등대 옆의 2층 직원 숙소며, 뒤의 굴착기가 있는 곳이 가덕도 등대 100년 기념관이 들어 설 자리입니다.

 

가덕도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자리잡아 동으로는 사하구 다대포, 서남북은 거제도 동북바다, 북으로는 유라시아와 환태평양의 관문이면서 동북아 허브항만으로 건설한 부산항신항(2006.1.19)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동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과의 거리는 4㎞, 인근의 거제도와의 거리는 10㎞ 정도이며, 대마도와의 거리는 48km라고 했습니다.

 

등탑 아래에서도 보이지만 등탑 위에서는 더 넓은 바다를 볼 수 있는 데, 등탑에서 가능한 풍경은 다 담았습니다.

등탑에서 내려오면서 강성군 씨께서 계단을 세어 보라고 하더군요. 그렇잖아도 오를 때 깜빡했기에 세어야지 생각했는 데 가덕도 등대를 방문하는 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겁니다. 계단은 197계단입니다.

 

     ▲ 거가대교 공사중인 삼도와 바다 멀리 다대포가 보이며, 목도가 보이고 다대포 너머로 영도와 영도의 주전자섬과 영도에서

수평선을 따라가면 대마도가 보입니다. 진해 연도가 보이며, 등대 아래쪽으로 숭어말끝단이 보이는 데,

봄철 숭어잡이 때의 숭어망이 있다고 합니다.

 

 

등대에서 하룻밤 보내기

 

이제 한 동이 남았는 데, 직원의 식당겸 숙소입니다.

금녀의 공간이니 식당과 숙소를 보자고 할 수는 없었으며, 2층에 있는 방문객 체험 숙소로 갔습니다.

여름이면 해양 여름 학교가 개최되며, 사철 등대 체험이 가능한 숙소는 연인들 보다 가족이 하루 묵기에 좋은 곳입니다.

등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건 나만이 가능한 체험입니다.

 

넓은 방과 주방, 테라스가 있는 데, 방에는 침대와 이불장이 있고, 주방 시설도 완벽하기에 개인이 먹을거리만 준비해 가면 됩니다.

 

그럼 아무나 아무 때나 가능할까요?

등대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등대를 관리하는 분들의 직장이며, 24시간 눈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부산 해운 항만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신청을 하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신청자로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특별한 하룻밤을 원하신다면 지금 부산 해운 항만청 홈페이지(http://www.portbusan.go.kr/)에 접속해 보시기 바랍니다.

  

     ▲ 등대 체험단 숙소

 

저는 낮에 방문을 했기에 등대불빛을 보지못했는 데 하룻밤을 묵는다면 빛이 쏟아지는 바다위에서의 하룻밤이 될텐데, 가덕도 등대에는 등대를 비추는 또 다른 조명 시설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하루를 묵기 원합니다.

 

등대는 관리를 하는 이들의 직장이며, 등대의 모든 것은 나라의 재산입니다. 그러니 체험이나 하루를 묵는다면 최대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6박 7일 동안 근무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불편을 느끼는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등대에는 개나리가 피었으며, 석류가 빨갛게 익고, 무화과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백일홍도 피어있습니다.

 

 

 

타임캡슐에는 무엇이 저장되어 있을까?

 

가덕도 등대 입구에는 타임캡슐이 있다고 했습니다.

2002년 7월 준공식에서 새 등대건설의 배경과 공사과정을 담은 기록을 영구보전하기 위해 타임캡슐에 넣어 저장하는 행사를 가졌는 데, 이종학 소장님도 준공식 현장에 계셨다더군요.

하여, "소장님, 타임캡슐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는지 아세요?" 여쭈니, "당시 있었지만, 무엇이 저장되었는지는 모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가덕도 등대를 분명 방문했는 데, 타임캡슐에 무엇이 저장되었는지는 저도 당연히 모릅니다.

타임캡슐 개봉일은 2103년 6월 3일, 가덕도 등대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누구 그때까지 산다면 가덕도 등대를 방문하여 타임캡술에 저장 된 내용물을 꼭 확인해 주세요.^^

 

 

 

가덕도 등대 안녕! 

 

낯선 여자 때문에 땀 흘린 군 장병 여러분과 가덕도 등대의 이종학 소장님, 강성군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또, 백구와 놀던 칠복이에게 통하지는 않겠지만 고마움을 전합니다.

칠복이는 나를 안내하여 외양포까지 왔으며, 다시 숭어망을 찾는 나를 따라 다녔고, 내가 외양포를 떠날 때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중간의 초소에 칠복이 이야기를 했으며, 외양포의 할머니께도 칠복이 이야기를 했는 데, 칠복이가 영리하여 잘 찾아간다면서 모두들 걱정을 하지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어린 게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를 따라 다니며 안내하고, 지켜주어 정말 고마웠습니다.

 

 

        ▲ 등대 방문 기념으로 소장님께서 찍어 준 사진입니다.

 

                           ▲ 가덕도 등대 입구에서 본 40.5m의 등탑

 

        ▲ 거제 미남 크루즈에서 담은 가덕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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