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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제 2경 남해대교와 충렬사와 5경 이락사

by 실비단안개 201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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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많은 지역에는 그 고장의 경치가 아름다운 8곳을 지정하여 보통 8경이라고 하는데, 곧 그 고장의 자랑거리입니다.

관동 8경, 단양 8경 등을 들어 봤을 텐데, 경남 남해군은 무려 12곳을 지정하여 남해 12경이라고 합니다.

- 남해 12경 : http://tour.namhae.go.kr/program/tour/tourinfo/outTourInfo.asp?idx=25&cate=T0200

 

남해로 들어 가는 관문 남해대교

 

남해대교는 남해군이 시작되는 관문이며,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한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놓이기 전 남해 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에서 물살을 가로질러 다녔습니다.

남해군 노량은 1973년 남해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한적한 나루터였습니다.

옛날 귀양 살러 오는 선비들이 이 나루를 통해 남해로 들어갔는데, 어느 귀양객이 이곳 앞바다에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 이 나루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물결이 일어 이슬방울처럼 뭉치고 흩어지는 모습이 다리처럼 보여 이슬다리(露梁)라 하여 노량나루라 불렀습니다.

 

이슬다리가 놓이던 그 자리에 남해와 하동을 연결하는 남해대교가 놓였으며, 남해대교는 남해군이 시작되는 관문 역할을 합니다.

 

 ▲ 남해각에서 보는 남해대교

 

남해대교는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를 연결한 다리로, 길이 660m, 폭 9.5m, 높이 52m. 국도 19호선상에 있으며, 맬다리 또는 허궁다리라고도 부릅니다.

 

1968년 착공하여 1973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현수교로 상부구조는 현수교로 된 3경간 연륙교로 한 때 동양 최대의 현수교로 신혼여행과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로 인기가 높았으며, 1973년 준공식때 박정희 대통령은 하동에서 남해대교를 걸어 건넜다고 했습니다.

다리의 건설로 육지로부터 고립되었던 남해도지역과 부산·여수·마산·하동 등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남해도 각지에 산재한 명승고적과 한려해상국립공원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의 유치와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남해대교는 바다와 어우러지는 낮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은 모두 알겠지만 밤 풍경도 여느 야경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남해대교 입구에 남해대교 조명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남해대교 경관조명은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과 환희를 우아한 곡선의 케이블에 따라 아름다운 무지개 빛으로 연출하게 되는데 대교 케이블과 상판 난간에 LED조명으로 남해의 아름다운 사계를 계절별 대표 색상으로 나타냈습니다.

또한, 주 탑의 UP-Lighting과 상부 LED 연출로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불멸의 빛을 연출하고 주말이나 축제일에 맞추어 주제별로 차별화된 경관 조명이 연출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남해대교의 조명은 마치 꿴 구슬이 빛나는 듯 한데, 일몰 후 대교를 걸으면 (혼자 걸었기에)약간 무섭기도 하지만, 특별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하동 노량 바닷가에서 봐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집니다.

 

 

거북선과 충렬사

 

지금은 단풍으로 물들지만, 남해대교를 지나면 봄이면 벚꽃터널이 장관인데, 그 길을 지나 독립지사 윤병호 선생의 비를 뒤로하고 노량마을로 내려오면 충무공 이순신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잠시 모셨던 충렬사와 바로 앞 바다에 떠 있는 실물 크기의 거북선이 있습니다.

남해군이 1999년 해군사관학교에 있던 거북선을 인수한 뒤 보수해 설천면 노량리에 정박해놓고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거북선에는 이순신 장군과 수군의 밀랍인형을 비롯해 총통 등 각종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어 남해를 찾는 관광객들이 한번씩 들러는 인기 관광상품입니다.^^ 

 

▲ 노량 횟집촌과 거북선, 충렬사(붉은 동그라미 안)

 

먼 길을 달려왔다면 횟집촌에서 신선한 자연산회를 즐겨도 좋으며, 먹는 것 보다는 거북선과 충렬사를 먼저 방문하고 싶다면 작은 포구에 정박되어 있는 거북선 관람 후 충렬사에 가도 좋으며, 순서는 바뀌어도 좋습니다.

횟집촌 주변으로 건어물과 남해특산품을 판매 하는데, 남해는 멸치와 유자가 유명합니다.

 

남해에서 1박을 하면 남해대교 야경과 함께 낮과는 사뭇 다른, 더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거북선의 야경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 남해대교와 거북선

 

 ▲ 충렬사에서 바라보는 거북선과 남해대교

 

남해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3일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고금도를 거쳐 12월 중순경 아산에 도착, 1599년 2월에 정식 발상하여 11일 안장,  금성산에 안장되었다가 1614년 현재의 어라산 묘소에 안장되었습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남해충렬사는 규모가 통영충렬사 등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1973년 6월 11일,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이충무공묘비와 사우 그리고 충무공비와 충민공비, 내삼문, 외삼문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청해루와 장군의 가묘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은 이러저러한 일로 풍경이 변할수 있지만, 우리 고장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시댁이 충렬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 마치 고향같은 남해이기에 충렬사도 그중 한 곳입니다.

예전의 충렬사 입구는 현재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돌계단을 올랐는데, 지금은 어린이와 노인층의 출입이 쉽도록 정비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할 줄 모르고 돌계단 풍경은 필카 사진뿐이기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충렬사의 돌계단입니다.

 

 

 

충렬사 외삼문으로 들기 전에 청해루가 있습니다.

청해루 앞에는 남해군민과 경남도내 초등학생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인보가 글을 짓고 김충현이 쓴 충무공 한글비가 있습니다.

'노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노라'

 

그리고 청해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렬사 참배기념 글이 있으며, 당시 가묘 옆에 히말리야시다 한 그루를 기념으로 심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충렬사(忠烈祠)'와 '보천욕일(補天浴日)액자가 있습니다.

  

▲ 충렬사 외삼문

 

외삼문은 충렬사로 드는 첫 문이며, 외삼문을 들어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습니다.

 

 ▲ 충렬사 내삼문

 

 남해 충렬사는 웅창한 숲 속에 있으며, 내삼문 아래에는 남해 충렬사비와 충렬사 중건비가 있고 충렬사 참배시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으로 담장 너무 멀리 남해대교가 보입니다.(아래 사진 가운데 줄)

 

내삼문을 들어서면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새겨진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안에는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 廟碑(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가 있는데 큰 비석에 깨알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한자는 일상적인 글이었지만 우리는 한자에 많이 약한데요, 남해 충렬사의 비 번역문은 아래를 클릭하면 됩니다.

- 남해 충렬사의 여러 비 번역문 : 남해충렬사(사적 제233호)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으로 가장 먼저 충무공을 기려 세운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는데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습니다.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고 했는데, 충렬사 사당 양쪽으로 충무공비와 땅에 묻었다는 충민공비가 있습니다.(아래 사진 셋째 줄)

헷갈리지요.^^

그리고 충민공비 담장뒤의 기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 히말리야시다입니다.

 

충민공비는1633년(인조 11년)에 남해현령 이정건이 세운 것으로 1793년(정조 17년) 충무공의 5대손으로 호남절도사로 있던 이명상(李命祥)에 의해 이충무공비(李忠武公碑)로 고쳐 세우고 충민공비는 매몰되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7월 매몰되었던 충민공비를 후일 참고하기 위하여 다시 복원하여 본당 좌우에 충무공비와 나란히 세우게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한국 금석문 참고 :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


남해 충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으나 무당이 드나들고 잡스러운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게 되자, '노량서원'을 지어 사당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고종8년인 1871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뜯겼다가 후손에 의해 다시 지어졌으며 노량서원은 현재의 청해루입니다.

 

자암 김구 비 옆에 있는 태상의 비는 태상의 공덕을 기려 세운 비로, 이태상은 충무공의 5세손으로 청해루를 세운 사람이며, 영조 임금 때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이 남해 바다를 지킨 장수입니다.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 廟碑(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의 '補天浴日(보천욕일)'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이충무공의 우국충정을 예찬한 글입니다.(아래 사진 첫째 줄) 

 

'補天浴日(보천욕일)'이라는 글귀의 보천은 중국의 고대 신화속에 나오는 여와가 뚫린 하늘의 구멍을 오색돌을 갈아 올라가 막았다고 보는 것이고, 욕일은 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자 희화라는 여신이 직접 해 10개를 낳아 씻어서 하늘에 띄워 세상을 밝게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합니다. 

  

통영의 충렬사(오른편 사진)에 가면 욕일보천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당은 문이 열려 있지만, 2년전 푸른통영21 위원장님께서 사당의 문을 닫으며, 기둥에 쓰여진 浴日補天을 설명해 주었지요.

 

통영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정침(正寢)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주련 (柱聯)에 쓰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은 노량해전 때 우리 수군과 연합함대를 구성했던 명(明)나라 도독 진린(陣璘)이 이충무공의 훈공을 일러『 해를 깨끗이 씻고 구멍난 하늘을 때운 공(浴日補天之功)』이라고 극찬을 했던 말에서 따왔으며,『맹산서해(盟山誓海)』는 이충무공의 정성으로『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고,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감동하더라(警海魚龍動 盟山草木知)』 에서 따온 글귀라고 합니다.

 

 

남해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3개월간 묻혔던 가묘가 있다고 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1599년 2월 11일 전라땅 고금도를 거쳐 외가동네인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되어 안장되었습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남해충렬사는 규모가 통영충렬사 등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1973년 6월 11일,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으며, 남해대교와 함께 남해 제 2경입니다.

 

▲ 이순신 장군의 가묘

 

 

남해 제 5경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분이며, 노량해전은 조선 선조 31년(1598)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병과 대결한 마지막 해전으로 이 해전에서 장군은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과 더불어 싸웠으며, 승리와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순신 장군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들은 이순신 장군을 포위하려 했고, 이때 진린의 명군이 와서 왜적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으며,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전쟁과정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전사하여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읍을 향해 4Km 달리다보면 오른편에 남해 제 5경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사적 제232호)'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순국한 관음포만 일대는 우리 나라 최고의 호국성지입니다.

이곳은 몽고의 침략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한 고려대장경의 목재를 들여왔던 곳이며, 관음포대첩과 노량해전이라는 두 번의 해전이 치뤄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락사 앞 뜰에는 유언비(戰方急愼勿言我死. 1988년 해군참모총장 류삼남 씀)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 있고, 이락사가 순국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으며, 이곳에는 육송이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 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락사'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大星隕海'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습니다.

'大星隕海'란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는 뜻이며, 비각에서 첨망대까지 연결된 솔밭길은 500m에 이릅니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이순신 영상관입니다. 

2008년 12월에 개관한 이순신 영상관은 국내 유일의 이순신 관련 복합미디어 전문전시관으로 666.86㎡의 전시공간을 갖추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영상관으로 들어서면 이락사 입구의 자연석에 새겨진 유언비 戰方急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 눈앞의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문구와 "만약 이 싸움에서 원수를 섬멸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는 축원기도문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전시돼 있습니다.

 

국내유일의 18m돔 영상관은 입체영상물로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세트장에서 실사 촬영한 영상을 컴퓨터 그래픽과 합성해 극적효과를 더했기에 관람객에게 시청각적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이락사 가는 길(땅에서 가지를 벌린 소나무), 이락사, 대성운해,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관음포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남해는 섬 전체가 연중 관광지니 바다가 그리운 날 훌쩍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경상남도 홍보블로그 따옥따옥(http://blog.naver.com/gnfeel)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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