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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녹는 소금 언덕의 기와집 명례성당과 신석복 마르코 성당

by 실비단안개 2018.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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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수산 둔치의 십리 구절초길을 조금 걷다가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근처의 명례성당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명례성당은 2012년 여름에 한 번 다녀온 성당으로 당시에는 마을 언덕위에 있는 작은 기와 성당이었으며 성당 아래는 낙동강과 나루였으며 나루를 건너면 대산미술관이 있는 유등리로 나루의 이름은 명례·유등나루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교통발달로 나루의 역할이 사라졌습니다.

 

명례성지는 신석복 마르코 복자(福者·공경할만한 성도들에게 붙이는 존칭)의 생가 근처에 있는 작은 성당으로 성당 앞마당에 서면 낙동강이 보입니다. 성당은 단층 기와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태풍으로 전파된 성전(1928년 봉헌)을 축소 복원한(1938년) 것으로 남녀석이 구분되어 있는 성전 내부(45,59 평방미터)의 목조 구조는 전국에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오래된 형태로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전통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 2월에 경상남도는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교회사, 문화사, 건축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여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26호로 지정하였습니다.

 

명례성지로 가는 길은 완연한 가을이었습니다.

벼가 기분좋은 색으로 익었으며 연밥은 이미 떨어지고 있었고, 태풍피해를 입은 시설농지가 있는가하며 감자꽃이 피어 있기도 했으며, 명례성지 근처의 밀양 영화학교에서는 동창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마을길을 따라 명례성당으로 갔었는데 길이 바뀌어 낙동강 둔치에 주차를 한 후 성당아래의 재실건물의 시비(詩碑)사이를 걸어 성당에 닿았습니다.

 

 

 

 

명례천주교회입니다. 기둥은 낡았으며 명패도 글씨가 흐릿해졌습니다. 보이는 기와건물은 성당이 아닌 재실입니다.

 

 

 

입구에서 성당까지는 먼거리가 아닙니다. 성당 앞마당에는 오랜 수령의 팽나무가 있으며, 그 짧은 거리에 코스모스와 황색코스모스가 만발했으며 마침 일요일이다보니 신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명례성당을 찾았을 때는 2012년 여름이었는데 그때는 못 본듯한 문화재안내표지판이 있었습니다.

 

 

명례성당은 1897년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의 출생지 바로 옆에 서 있는 성당으로 경남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천주교회 본당입니다. 신석복은 1828년에 명례리 1209번지에서 출생한 누룩과 소금장수였는데, 1866년 병인박해 때 김해 가산에서 붙잡혀 대구감영에서 순교했습니다. 순교할 때 "나를 놓아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해는 지금 강 건너 진영 천주교 묘지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명례 본당의 초대 주임이었던 강성삼 신부(1866~1903년)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신부입니다. 1926년에 명례에 부임한 권영조 신부는 1928년에 기와지붕의 성전을 봉헌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건물은 1936년 태풍으로 전파되고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38년에 파괴된 성당의 잔해를 사용하여 축소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본당은 낙동강 하류역의 좌안에 독립구릉 남사면부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당시의 명례성당이 입지한 수산은 낙동강과 인접하여 수운과 육로가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마치 시골의 작은교회당같은 성당입니다. 옆에는 높은 종탑이 있으며 앞쪽으로 성모상이 있으며 아래에도 성모상이 있습니다.

 

 

 

성당마당입니다. 의자가 많은 이유는 많은 신도가 올 경우 성당내부가 좁아 밖에서도 미사를 본다고 합니다.

 

 

성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홑처마 우진각지붕입니다. 정면에 어칸(중앙칸)에 현관을 두고 별도의 박공지붕을 부가하여 전체적인 평면은 T자형이며, 평면구성은 좌측부터 제의실 1칸, 경당 4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명례성당은 전통적인 고급건축방식이 아닌 민속건축적 요소에 일식건축 요소가 가미된 건물로서 근대기의 과도기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성당으로 드는 중앙칸에서 돌아보면 낙동강과 건너편의 대산의 둑방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저같으면 미사보다 바깥구경을 더 했을 듯 합니다.

 

 

중앙칸에는 성당소식지와 방명록, 신발장 등이 있었습니다. 방명록을 기록하는 신자에게 내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니 다들 찍더라고 하기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 후 성당으로 들었습니다.

 

 

서까래와 맞닿은 곳에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믿지 않다보니 성호를 긋는 일을 할 줄 모르기에 목례후 사진을 찍었습니다.

 

 

성당내부에는 벽이없다보니 기둥이 벽역할을 하는 듯 했습니다.

 

 

성모상 이콘, 그리스도 이콘이 사이에 십자가가 있으며, JHS가 새겨진 제대가 있습니다.

JHS는 서방교회(로마교회=가톨릭교회=천주교회=공교회)에서 사용되던 상징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하고 크리스찬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모상 이콘 옆에 고해실이 있었지만 문을 열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제대쪽에서 보는 성당내부입니다. 오래된 창문과 옛조명, 선풍기와 에어컨이 있으며 맨뒤에는 긴의자가 있었습니다. 성당의 기둥을 중심으로 남자는 들어오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앉아 미사를 봤는데 지금은 구분을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릴때 근처 작은예배당의 긴의자에서 예배를 보고 찬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창문위로 그리스도의 모습 삽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는데 워날 어릴때 교회에 나갔기에 그림을 봐도 무슨 뜻인지는 모릅니다.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는데 날이 차다보니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성당안에서 창살사이로 보이는 낙동강입니다.

 

 

옆으로 돌아 뒤로 가 보겠습니다. 옆에는 높은 종탑이 있기도 합니다. 이 종탑은 마을로 들어설 때도 보입니다.

 

 

요즘 건축하는 교회는 종탑을 신식으로 만들어 조명을 넣기도 하는데 명례성당의 종탑은 변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성당뒤쪽에도 코스모스가 만발했습니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성당 오른편을 돌아 왼편으로 내려왔습니다. 나루터 가는 길 표지판이 한 켠에 있었습니다. 명례성지 조성과 함께 명례나루터 복원과 낙동강 주변 환경을 정리해 명례-진례-웅천을 잇는 순례길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신석복 복자의 생가는 축사로 변했었는데 2007년 명례성지의 역사적 가치가 새로 발견되면서 2008년 명례성지 조성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마산교구가 이를 승인하였다고 합니다. 2011년 1월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한 순교자 신석복의 생가 터와 그 일대를 매입하였고 담당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천주교 마산교구 명례성당이 성지화하기 위한 기념성당 봉헌식이 5월에 있었지만 주변은 정리중이었습니다.

 

 

명례성당옆에 있는 신석복 마르코 성당으로 가 보겠습니다.

 

 

1828년 경상남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하남읍 명례리 1209번지)에서 출생한 신석복 마르코는 농사를 지으면서 소금과 누룩 장사를 하였습니다. 누룩은 명례의 들판에서 얻었으며 또 그가 웅천장에서 돌아오다가 붙잡혀 순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금은 염전이 있었던 이곳 웅천에서 샀을 것입니다. 우리가 명례성지를 방문한 날이 이곳 웅천장날(4, 9일)이었습니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전파된 신앙은 신석복에게 전해져 마르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마르코는 소금 길에서 교우촌 소식을 전달하는 등 녹는 소금의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장사를 나갈 때 봇짐안에 교리문답과 성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순교자의 장삿길은 단순히 장삿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다녔던 소금길에는 교우촌과 많은 신자들이 있었는데, 그에게 이 길은 복음을 전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마르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쯤으로 추정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그를 잡으러 대구 감영에서 온 포졸들이 그의 집을 덮쳤을 때 그는 창원 웅천장터에 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강 건너 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다가 가산나루터에서 그를 체포한 후 대구로 압송하였습니다. 밀양 근처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포졸들이 그의 형제들을 포섭하려는 것을 알고 형제들에게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했는데, 순교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대구 감영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며 회유하는 관장에게 "나를 놓아 준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하고 대답하니 관장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고 합니다. 그가 순교한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은 성토요일이었고, 그의 나이 38세 때였습니다.

순교 후 그의 가족들이 대구로 가서 순교자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의 도둑골에 안장했는데,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이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습니다.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와 그의 동료 123위를 광화문에서 시복하였습니다.

 

▲가산나루터가 궁금하여 검색하니 가산은 김해 한림면에 있었습니다.

 

한때 축사였던 신석복 생가터입니다.

 

 

순교자탑입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입니다.

 

 

 

믿음을 가지지 못 했다보니 복자 마르코의 믿음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건물사이로 낙동강이 보였습니다.

마르코 성당은 마치 미로같았습니다. 분명 예배당이 있을 텐데 어디에도 안내글이 보이지 않았기에 다시 이층으로 올라 명례성당을 한 바퀴 더 돌아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성당입구에는 새건물이 있었는데 안내를 하며 성물판매, 카페,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일요일이다보니 많은 신도들이 있었으며 연신 성지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명례성당마당부터 입구까지 나무기둥 등에 그리스도의 상이 있었으며 아래에는 번호가 있었습니다. 안내실 입구에 '십자가의 길' 안내판이 있었는데 제가 그동안 보며 찍은 사진이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가는 길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명례성당 앞은 둑방은 낙동강 자전거길이며 아래 둔치는 오토캠핑이 가능하기도 하고 둔치에도 자전거길이 있는지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풀섶사이를 달렸습니다. 이곳도 4대강사업장 중 한 곳이었습니다.

 

 

 

 

 

신석복 마르코 성당은 완공되었지만 주차장과 기타 시설은 지금도 진행중이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았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세상의 녹는 소금이 되게 하소서!

 

* 이 글은 명례성지 다음 카페와 명례소식지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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