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맞아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젖줄이었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찾기로 하였다.
30여년전에 두어번 스친 거리의 기억을 더듬어 부산 동광동으로 가서 몇분에게 물어 백산상회가 '백산기념관'으로 다시 태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용두산 공원 아래의 한 화랑을 찾아 물으니 건너편임을 알려 주었다.
'백산기념관'은 부산시민들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위치에 있으며 '백산안희제 선생'은 숨어서 독립자금 조달을 하였기에 교과서에도 제대로 소개 되지 않는 분이다.
부산의 용두산 공원에는 백산 선생의 흉상이 부산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지만 공원을 찾는 많은 분들이 선생의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은 하여도 백산선생이 어떤 분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산기념관은 1995년에 건립 되었으며, 지하 1층이며 지하 2층인 2 전시실에서는 제 87주년 3.1절 기념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 전이 전시중이었지만 기념관 1, 2층 어디에도 관람객은 없었으며 공공근로요원인 '박현준'님에게 촬영을 허락 받고 안내도 받았다.
백산상회(白山商會)와 안희제(安熙濟) 선생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바쳐 일제침략에 항거하였으나 안희제의 경우처럼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안희제의 묘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이시며, 민족언론의 선각자이시자 민족의 지도자이신 백산 선생이 여기 잠들어 계신다.’
안희제의 활동을 정리해 보면 ① 교육구국운동(의신학교‧창남학교‧구명학교‧기미육영회, 민립대학설립 운동, 발해보통학교) ② 학회활동(교남교육회, 부산예월회, 조선어학회) ③ 비밀결사단체활동(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 ④ 민족산업육성(백산상회, 조선주조주식회사) ⑤ 항일언론투쟁(『독립순보』『동아일보』『중외일보』) ⑥ 사회운동(전조선수재구제회, 협동조합운동) ⑦ 노동운동(노동자 도항증명제 폐지투행) ⑧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발해농장) ⑨ 종교운동(대종교에서의 활동) 등이다.
백산 안희제는 1885년 8월 4일(음력)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에서 안발(安鏺)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그 후 안희제는 사립흥화학교에서 신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해 양정의숙 경제학과에 재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와 양정의숙 등에서 신문학을 수학하고 민중계몽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1907년 윤상은(尹相殷)과 함께 구명학교(현재 부산구포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고향인 경남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다음해 1908년에는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1909년 10월 남형우.서상일.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단장 남형우에 이어 2대 단장을 지냈다.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1911년 러시아와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지도자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대책을 협의한 결과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중책을 맡고 귀국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무역회사인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백산상회는 표면적으로는 해산물과 농수산물을 구매.위탁하는 무역상이었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국내연락망 구축을 위한 국내 독립운동기지였다.
독립운동자금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국내에는 서울.대구.원산.인천 등 18개소, 국외에는 중국 안동.봉천.길림 등 3개소의 백산상회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아울러 1919년 11월 부산에서 백산상회 주주들과 영남지역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국내 및 해외유학 시키기 위해 장학재단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였다.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통하여 양성 된 인재로는 초대문교부장관 안호상, 국문학자 이극로, 신성모, 전진환등이 있다.
1911년 러시아로 망명하여서는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를 간행하였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립발기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에는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중외일보(中外日報)’로 개칭하여 날카로운 항일봉필을 휘둘러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의 정간과 탄압을 받았다.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한 안희제는 일제의 대대적인 대종교 탄압인 ‘임오교변(壬午敎變)을 당하여 1942년 11월 19일 중국 목단강성 경무대 형사대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1943년 8월 3일 병보석 출감하여 안영제가 경영하는 영제의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3시간 만에 순국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백산기념관 가는 길
사진으로 보는 백산상회와 안희제 선생의 흔적
기념관 전시실을 내려가는 계단에 민족독립선언문이 있었으며 안희제 선생의 손자와 지인들에게 기증 받은 자료들이 전시실에 전시 되어 있으며 독립자금 조달은 지하 조직이다보니 안희제 선생에 대한 자료가 귀하다고 안내자인 박현준님께서 말씀하셨다.
팜플릿 외에 더 이상의 안내서가 없냐고 여쭈니 김홍주님께서 지으신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겨울 민들레'를 보여 주었는데 위인전으로 읽힌 것 같았다.
전시실의 안희제 선생의 초상화
옛날의 백산무역주식회사 건물 사진
1전시실을 나오면서 천정을 보니 독립신문과 백산선생의 모습이 있었다.
지하 2층 2전시실 입구
1 전시실에 이어 3개로 구분 되어진 2 전시실에도 관람객은 한사람도 없었다.
2전시실을 들어서며 다시 천정을 보았다, 태극기다.
천정의 태극기만 따로 담아 보았다.
근대사전에서 나란히 있어 더 비교 되는 사진이 있는데 일본인 가족의 모습과 우리나라 가족의 모습이다. 지배인인 일본인과 비교하니 피지배인인 우리 선조의 모습이 아프게 와 닿았다.
안내자와 관리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용두산 공원의 선생 흉상을 찾았다.
3.1절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 동상 주위로 태극기가 꽂혀 있었으며 용두산 공원의 상징인 비둘기의 구구거림이 즐거운 노래가 아닌 아픔이었고, 이순신 장군과 백산 안희제 선생 두분 모두 시대는 다르지만 일본과 싸워야만 했던 운명으로 태어나서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친분들이다.
두분을 함께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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