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박물관의 산책로를 오르면 구지봉이 있으며, 구지봉에서 김해시내의 모습을 부분 감상할 수 있다.
구지봉의 정상에는 바둑판식의 고인돌 1기가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구지봉의 동쪽으로 내려오면 수로왕릉비(사적 74호)가 있는데, 왕릉비 형태는 원형봉토분이다. 높이 5m, 지름 6m이며,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이라 적혀 있다. 16세의 나이에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와 왕비가 되었고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 능앞에는 파사석탑이 있으며, 주변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위치한다.
허황후가 배를 타고 내린 곳이 경남 진해시 용원동에 위치한 망산도이다.
(▼ 2005년 12월 6일 게시물 중에서 - 사진 3점)
망산도 - 돌로 된 섬인지 돌배인지...
왕비릉을 오르노라면 오른편에 '파사석탑'이 있는데,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고 전한다. (이미지의 설명 참고)
망산도와 파사석탑 이야기 - 출처 : 우현(jjhyun1577)
후한 광무제 24년 즉, 수로왕 즉위 7년(48) 7월 27일이다. 구간들이 조회를 할때에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사오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간택하시어 배필로 삼으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짐이 이 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뜻이거늘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경들은 심려 마시오."
드디어 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몰고 망산도(望山島)산에 가서 망을 보게 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勝點)에 나아가 망을 보게 분부하였다.
그 때 문득 가락국 앞 남서쪽 해상에서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망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등이 먼저 횃불을 올리니 배는 마구 내달아 와 배 안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뭍에 오르려 했다. '신귀간'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바로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급히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깎아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려고 하니 왕후는 엄숙히 말했다.
"나와 그대들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등은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옳게 여겨 '유사'를 데리고 대궐에서 남서쪽으로 6천보 쯤 되는 곳에 가서 만전(장막으로 된 임금의 임시 궁궐)을 치고 그 곳에서 맞이하기로 하였다. 왕후는 산밖의 別浦 나루에서 배를 대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에서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을 폐백 삼아 산신령에게 바쳐 제사를 지냈다. 왕후에게는 시종해 온 두 사람이 있어서 이름을 '신보'와 '조광'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는 '모정'과 '모량'이라 했고, 그 밖의 노비들까지 합쳐 20여 명이 있었다.
또한 왕후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의상 그리고 검은 주옥, 패물 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왕후가 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오게 되자 왕은 나아가 정중히 맞이하여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었고, 시종해 온 신보, 조광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알현하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시종 내외들에게는 방 하나씩을 주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에게는 한 방에 오륙 명씩 들어가게 하고는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향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를 깔아 자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왕후가 가지고 온 금, 은, 보화와 비단들은 군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왕과 왕후는 침전에 드니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許'이고 이름은 '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금년 오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꿈에 황천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 곳으로 떠나거라.'라고 하셨답니다.
저는 배를 타고 증조(蒸棗 : 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을 찾고 하늘에 가신 반도(蟠桃 : 복숭아는 3천년만에 한 번씩 열린다고 전함)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오. 그래서 왕비를 맞으라는 신하들의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라고 왕이 답을 했다.
왕은 드디어 공주와 혼인을 했고, 함께 두 밤을 지낸 후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는 황후가 타고 온 배를 돌려 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으로 각각 쌀 열섬과 비단 30필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는 8월 1일에 본궁으로 돌아오는데, 왕은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왕후의 히종해 온 신하들도 수레를 나란히 했으며, 그들이 가져 온 이국의 패물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서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막 정오가 되려 했다.
(중략)
수년 후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 중편 6년(189) 3월 1일에 왕후께서 붕어하시니 보수 157세였다. 김해시 '구지봉'의 동북쪽에 안장하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닻을 내린 그 나루의 마을(渡頭村)이름은 '主浦村'(혹은 임개)이라 하고, 왕후가 비단 바지를 바쳤던 그 산 언덕은'綾峴'(비단고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旗出邊'이라 부르기도 했다.(後略 : 原文 省略)
돌배를 타고 왔다고 하지만 돌로 만든 배가 아니라 '석탑'을 싣고 와서 그렇게 통칭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 석탑은 왕후의 능곁에 안치되어 있다.
▲ 구지봉에서 내려다 본 김해시
▼ 구지봉 고인돌 - 바둑판식의 고인돌 1기,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 구지봉 신단수(신을 모신 사당의 종류중 하나)
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김수로왕의 탄생과 치적은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락 지역(경상남도 김해지역)에 촌장 아홉 명이 각각의 부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3월 어느 날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가서 하늘이 내려 주신 왕을맞이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촌장과 사람들은 구지봉으로 올라가 왕을 맞이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왔는데 그 속에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얼마 뒤 이 알에서 남자 아이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아이의 이름을 '수로'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대가락국' 또는 '가락국'이라고 했다.
나머지 다른 남자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이때가 42년(신라 유리왕19)이었다고 한다.
김수로왕은 다른 부족국가를 정복하여 금관가야를 세우고,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파사 석탑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오자 공주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수로왕은 왕위에 올라 157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죽었다.
수로왕은 허왕후와의 사이에서 여러 명의 왕자들을 두었는데, 그 중 일곱 명은 지리산에 들어가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고, 거등왕이 수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김수로왕은 199년까지 157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구체적인 사례는 알 수가 없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면서 가야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해 지방의 가야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는 고도로 발전한 문화 유물이 발견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금관가야나 대가야도 독자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바다 건너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것은 가야가 바다로도 진출했음을 알려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고조선 건국신화)
▼ 구지봉에서 본 파사석탑과 수로왕비릉
▲ 수로왕비릉<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
▲ 삼국유사
김수로왕은 우리 역사에서는 드물게 신화와 역사, 그리고 문학이 어우러진 인물이며,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는 우리 나라 최대의 성씨(약 600만명)이다.
구지가(龜旨歌)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구하구하 수기 현야)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구지가>는 가장 오래된 우리 옛 노래 3편 중 하나이다.
김해(金海)에 있는 구지봉(龜旨峰)은 가야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땅[聖地]이다. 매년 3월이면 온 나라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아직 임금이 없이 아홉 명의 부족장이 백성을 다스리고 있던 후한 건무 18년 3월에 추장들은 국민들을 구지봉에 모이게 한 후 <구지가>를 합창시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이것은 “우리에게 임금을 달라.”는 뜻의 위압적이고 명령적인 노래이다. 주술적인 노래일수록 고대에는 강요와 협박의 성격을 띠었다. 300여명의 민중이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이 노래를 불러댈 때, 하느님이 얼마나 지겨웠을까?
드디어 하늘로부터 자색의 끈이 구지봉 위에까지 드리웠다. 끈에는 붉은 천에 쌓인 황금의 상자가 달려 있었다. 그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둥근 해처럼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민중들은 모두 놀랐으나 즐거웠다. 환성이 온 가락국에 울리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기적의 알에 경배하였다. 부족장들은 민중을 해산시키고 금상자를 높은 자리에 모셔두었다.
며칠 후에 그 알에서 한결같이 귀여운 옥동자가 깨어났다. 그 중에 제일 큰 아이가 수로왕이요,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왕이 되었으니 이 분들이 6가야의 시조들이다. ‘수로왕(首露王)이란 “머리를 내놓았다”는 뜻이라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수로왕의 신화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의 결혼까지 이어진다. 왕비는 인도의 아유타(阿踰陁) 왕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다. 수로왕은 고국을 떠나 이국에 온 공주의 외로움을 위로해주기 위해 둘째 왕자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물려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혼인을 안 한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제정 일치 시대의 신을 맞이하는 의례에서 사용된 무가(巫歌)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흙을 쥐고 발을 구르며 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실적으로는 노동 가요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전설에 나오는 <해가(海歌)>와 비슷한데, 이 같은 스타일의 노래가 우리나라 남해안으로부터 동해안까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이 노래도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학자는 거북은 “검” 곧 “신(神)”이라고 풀이했다. 그렇게 되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는 “신이여, 신이여 우리에게 머리(우두머리, 즉 왕)를 주세요.”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해석으로는 거북을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노래는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의 노래, 즉 원시사회에서 지신족(地神族)이 천신족(天神族에) 대해 동맹을 요청하는 것을 여자가 남자에게 구애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출처 : 상남중학교)
2008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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