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가본 곳

세계문화유산 화성- 화성행궁

by 실비단안개 2007. 4. 30.
728x90

 

내용 출처와 더 자세히 알기 - 세계문화 유산 화성(華城)

http://hs.suwon.ne.kr/html/sub2/sub2_001.asp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조때 최대의 역사였던 화성 성역은 1차적으로 화산의 현륭원 호위와 함께 팔달산 정상 바로 아래 성내 중심부에 건립된 행궁을 둘러싸면서 이를 수호하는 것을 중요 목적으로 설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화성 행궁이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서 정치적·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移置)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三門) 5칸, 좌변익랑(左邊翼廊) 9칸, 우변익랑(右邊翼廊) 6칸, 서변행각(西邊行閣) 5칸, 서상고(棲上庫) 10칸, 중문 5칸, 내아(內衙)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公須) 7칸, 관청 5칸, 창사(倉舍)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

한편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행궁과 관아 건물은 신축과 증축을 거듭하여 정조 14년 5월 초에는 득중정(得中亭) 9칸, 대문 1칸, 진남루(鎭南樓) 6칸, 좌익문 3칸, 좌우익랑 6칸, 남익랑 6칸, 북익랑 5칸, 강무당(講武堂) 16칸, 와호헌(臥護軒) 15.5칸, 대문 1칸, 익랑 8칸, 장용영전목고(壯勇營錢木庫) 1칸, 잡물고(雜物庫) 2칸, 미고(米庫) 5칸, 비장청(裨將廳) 15칸, 향청 19칸, 군향고대청(軍餉庫大廳) 5.5칸, 고사(庫舍) 42칸, 고마고대청(雇馬庫大廳) 4.5칸, 고사(庫舍) 6칸, 관청대청 .5칸, 고사 18칸, 어승마마구(御乘馬馬廐) 10칸, 군기대청(軍器大廳) 6칸, 군수고·미고 6칸, 군기총검고(軍器銃劍庫) 5칸, 명륜당(明倫堂) 10칸, 집사청(執事廳) 24.5칸, 관창 17칸, 방영군 관청(防營軍官廳) 12칸, 토포군관청(討捕軍官廳) 19.5칸, 별효사청(別驍士廳) 6칸, 작청(作廳) 28칸, 영선(營繕) 10칸, 교방(敎房) 6칸, 객사익랑(客舍翼廊) 4칸, 외삼문 3칸, 외담장 199칸 등 공해와 군영 건물이 새로 세워졌다.

정조 14년간 『수원신읍영건공해간수성책』에 의하면 수원 신읍치에 건립된 건물은 크게 공해와 객사, 향교 및 군영으로 구분하였다. 먼저 공해에는 장남헌(壯南軒)을 비롯하여 득중정(得中亭)·은약헌(隱若軒)·내아(內衙)·비장청(裨將廳)과 정문인 진남루(鎭南樓)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객사는 원래 그 안에 전패(殿牌)를 봉안하고 한달에 두차례씩 왕께 배례하며, 때로는 손님을 모시는 곳으로 수원 신읍치의 객사에는 벽대청과 동서헌(東西軒) 등이 있었다.

다음의 향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전사청(典祀廳)과 동·서무, 동·서재(東西齋)가 마련되어 있었다. 끝으로 편의상 군영과 기타 건물로 구분하된 건물로는 강무당을 비롯하여 군기대청·군향고대청·초관청(哨官廳)과 그밖에 영선·별고·미고·집사청 등의 건물이 들어 있다.
당시 군영 건물은 장용영이 성립된 초기였던 만큼, 정조 17년 신읍치에 장용외영이 설치되고, 정조 19년과 정조 22년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그 건물도 늘어난 지휘자와 병력수에 따라 그 수용을 위한 신·증축을 거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그 가운데는 이미 정조 13년에 건립된 부분 중 150여 칸을 활용하고, 거기에 더하여 새로 약 420여 칸을 증축한 것이었다. 즉 화성행궁은 신읍치를 처음 옮기던 정조 13년 9월에 행궁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을 신축한 이래 정조 14년 5월 정당(正堂)·내아·득중정·진남루 등이 증축되고, 정조 18년 성역이 시작되어 정조 20년 완공되기까지 계속하여 행궁과 부속관아를 대폭 증축 또는 신축하여 총 576칸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외관인 수원부사(뒤에 유수)가 집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왕의 원행시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정조 13년에서 24년까지 왕의 현륭원 차배가 정례화된 화성행궁은 특히 서울 경복궁(景福宮) 다음의 부궁이라 할 정도로 다른 지방의 행궁보다 그 규모나 건축구조·기능면에서 단연 뛰어나고 웅장하게 건축된 것이 특징이다.

이 화성행궁 이외에도 서울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路呈)에도 왕의 주필하는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果川路) 때는 과천행궁·사근참행궁을 건립·이용했고, 정조 18년 시흥로(始興路)가 새로 개척됨에 따라 이 해 시흥행궁(114칸)과 안양행궁, 이듬해 안산행궁 등을 건립·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시흥·안양·안산·사근참 등 속읍(屬邑)에 건축된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고, 또 그 규모와 활용면에서도 화성행궁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성행궁 배치도 - http://hs.suwon.ne.kr/html/sub2/sub2_801.asp

 

 ▲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 유여택 - 사진 위로 1, 2, 3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 복내당의 단청 - 화려하지 않은듯하면서도 화려한 단청이기에 담았다.

 

복내당 -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험마당의 풍경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체험마당에는 사도세자 뒤주 들어가보기가 있다. 좀은 섬뜩한 체험 - ^^

 

사도세자의 죽음

때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영조 때, 영조는 무수리 집안의 딸이며 숙종의 후궁인 이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천한 신분에서 태어나 열등 의식과 혹시나 세자에서 폐위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영조는 남 모를 편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색당파의 회오리 속에서 힘들게 왕으로 등극하였고, 항상 모반과 반역의 당쟁속에서 그 자신 또한 수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영조와 중전 서씨(徐氏) 사이에서는 아들을 두지 못하였고, 정빈(靖嬪)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진종(眞宗)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향년 10세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영빈(瑛嬪) 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는데, 이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영조는 그 후 김한국의 딸인 15세의 김씨를 중전으로 맞아 81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인군(仁君)·현군(賢君)으로 칭송되었으나, 사도세자와는 친하지 못하였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였으나, 그 성격이 괴퍅하여 여러 일로 영조의 성미를 건드리며 눈 밖에 났는데, 무수히 많은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세자는 궁궐 정원에서 호미로 개미집을 부수고 일일이 손으로 개미를 잡아 죽였는데, 이를 본 대신들은 '세자는 모름지기 어질어서 마땅이 하찮은 미물이라도 귀중히 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성격이 괴퍅하고 모지니 장차 왕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하였다.

한번은 영조가 매우 귀여워하는 외국의 개가 있었는데, 세자가 그 개를 못살게 굴자 그 개는 세자를 보고 짖으며 물려 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세자는 감히 왕세자인 자기를 몰라 본다고 그 개를 즉석에서 칼로 베어 죽였다. 이 사실이 영조에게 알려지자 영조는 극도로 화를 냄은 물론 세자의 자질을 의심하였다.

그 이외에 세자가 대행 왕의 직무를 수행할 때, 하루는 영조가 사랑하는 숙의 문씨가 남동생인 문성국을 병조 참의로 등용하여 줄 것을 왕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행 왕인 세자에게 검토를 부탁하였으나, 세자는 이 것이 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청을 거절하여 왕의 노여움과 더불어 숙의 문씨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대리청정에서 물러난 세자는 그 후로 더욱 분별을 잃고 고집스러워졌는데, 세자의 의대공포증(衣帶恐怖症)은 유명하였다. 이 증세는 한 번 입은 옷은 벗지 않고 계속 입으려 하는 일종의 정신병으로, 빨래와 왕의 알현을 위하여 반드시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는데 세자는 고집을 부리며 벗으려 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궁녀가 세자의 옷을 갈아 입히려다

세자가 밀어 젖히는 바람에 벽에 부딪쳐 죽은 일까지 있었다. 계속되는 꾸지람에 세자는 급기야 그 돌파구로 밤을 틈 타 몰래 담을 넘어 여승들과 동침하는 미행(微行)을 서슴치 않았으며, 평양까지 가서 기생과 술로 소일하고 왔다.

이 때는 당파 싸움으로 조정이 시끄러운 상황이었는데, 나경언(羅景彦)의 상소로 세자의 미행이 낱낱이 밝혀지자 영조는 세자의 미행을 추궁하였고, 이 책임을 짊어진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민백상(閔百祥), 좌의정 이후(李후) 등이 연이어 자살을 하였다. 계속되는 세자의 파행과 남동생의 등용에 불만을 품은 숙의 문씨의 이간질로 영조는 더 이상의 자제심을 잃고 햇볕이 내려 쬐는 여름날 세자를 문초한 뒤, 뒤주에 가두고 밖에서 못을 박아 7일 만에 죽게 하였으니, 그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였다.

이것이 전대미문의 극형으로 전해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며, 이 현장에는 11살 된 아들(뒤의 정조)이 할아버지인 영조의 옷을 부여잡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영조는 끝끝내 손자의 애원을 무시하였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