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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고향 이야기/흑백다방 그리고…

오늘같은 날은 '꽁뜨(conte)'에서 죽쳐야 맛인데

by 실비단안개 2009.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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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아직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흐린 날, 지금처럼 빗방울이 막 떨어질 듯 한 날에는 뜨신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손으로 먼저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쓴 글에서 - 

고물쟁이 김씨 이야기

단순한 나는 언제나 머리가 지시하는대로 앞만보며 다닌다.

얼마전과는 반대로 9월 부터는 김달진 생가를 먼저 방문하고 다음으로 김달진 문학관, 그리고는 가까운 들판이 순서인데, 어제는 김달진 문학관의 前학예사님과 관리인 아저씨께서 앞장을 서기에 따라 나섰다.

집수리를 하는듯한 그저그런 집이었는데, 일 장갑을 낀 집주인을 만났다. 시원한 머리, 편안한 눈빛, 열정의 목소리, 그리고 커피 한잔!

 

'김씨 박물관'을 만드는 김현철씨다.

 

'김씨 박물관',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다. 아무려면 김씨 박물관이라니, 아주 대중적인 성씨이니 나를 놀리는거겠지. 그런데 참말로 '김씨 박물관'이다.

차 한잔을 권하기에 커피로 주문하고 방안을 둘러 보았다.

 

오호~ 내가 좋아하는 여자 사진, 아주 낡은 - 지금이 몇년인가, 코흘리게 시절 이웃에 놀러가면 걸려있던 여배우(그때는 배우인줄 몰랐으며, 그저 이쁜 여자로만 알았다.)가 있는 달력을 몇십년만에 만났다. 오후 햇살이 열려진 창문으로 정답게 내려앉고, 간식인지 찐고구마 두개가 책상위에 있으며, 대충 책장겸 선반으로 이용하는 고가구 위에는 여자들의 사진 만큼 낡은 책 몇권이 꽂혀있고, 그 앞에 내 동생이 어릴 때 복용하였던 '용각산'이 있었다.

남자의 침대이니 앉아볼 수가 없어 다른방으로 가니 작업복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이 또한 얼마전까지 우리 이웃들의 평범한 방안 풍경이라 좋았으며, 방 가운데 상위에는 도면이 있었다.

 

커피를 준다. 나 만큼 할 일이 많은 분인지 머그잔 5분지 4 정도의 양이었다.

커피의 색과 양이 마음에 들었다. 쉬엄쉬엄 마시는 커피, 일을 하다가 생각나면 한모금씩 마시는 편인데 많은 양도 두어시간 지나면 바닦이지만, 그렇다고 커피를 양푼에 담아 마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열려진 창문으로 바깥분들에게 커피가 배달되었고, 알지 못하는 숫자로 가득한 도면이었지만, 도면 여러장을 오래 살폈다.

 

'김씨 박물관'은 공사 기간이 2년 예정이며, 모든 공사는 수작업으로 진행될 것이다.

 전시품은 우리 근현대사라고 하기에 전시품은 준비되었냐고 여쭈니, 근현대사 물건(물품)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계시단다. 우리는 잠시 부산 서면의 개인 박물관 이야기도 하였다. 

개인이 몇십년 수집한 물건을 지역과 이웃을 위하여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고 말씀하였다. 어릴 때부터 '칭찬'으로 자신감을 준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물상을 뒤지며 옛 물건들을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이제 객지의 생활을 접고 고향에 그 터를 마련하여 소장중인 우리 근현대사와 함께 한 물건들을 여러 이웃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단다.

 

박물관의 간판 중에 '웅천사진관'이 있기에 왜 '웅천사진관'이냐고 여쭈니 본가에서 웅천사진관을 30여년간 운영하여 '웅동(박물관 건립 지역)'이 아닌 '웅천'사진관이라고 하였다.

웅천 사진관 간판을 만들기 위하여 낡은 양철을 구해 두었는데, 간판을 그려 던져두면 비와 바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녹이 슬테니 더 멋지지 않겠느냐며 웃기에, 나와 비슷한 사고에 나도 웃어주었다.

칠하고 칠하고 또 덧칠하는게 멋이 아니란 걸 아시는 분, 시원한 머리위로 가을빛이 곱다.

 

그는 김현철이란 이름보다 '고물쟁이 김씨'로 불러 달라고 하였다. 거리감 없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웃 아저씨, 꿈을 현실로 이루는 멋진 고물쟁이 김씨.

 

언제부터......

1987년, 김씨는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군단위의 민속관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후 일본을 몇번 더 방문을 하면서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우리의 것을 모으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 대구의 칠성시장, 서울 청계천의 황학시장, 부산 자유시장과 망미동등을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쓰레기로 분류되어 버려지고 잊혀져가는 생활용품부터 무차별적으로 구입하여 창고를 마련하여 보관하였다.

이렇게 모은 고미술품과 포스터, 물품등으로 1997년부터 전시회를 열었으며, 2000년 복지부 주관의 '건강 2000'행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김현철씨를 내외부로 알리는 기회가 되어 전시회는 20003년까지 계속되었다.

 

소장중인 물품은...... 보관은?

그의 일화를 보자.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8½...

내 가까이에 늘 있어 내 일을 (Tom & Judy) 도와 주었던 종필이는 내가 커피숍 공사를 하자 "8½"이 디자인 된 Logo를 가져왔다. "자기 자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모자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라는 의미있는 충고의 말을 남기고...

"길 가다가도 고물실은 리어카가 지나가면 세워서 뒤져보기 시작했고, 시간이 나면 부산에서 제일 많이 고물상이 있는 '동촌'일대를 돌면서 쓸만한 고물을 찾아 다녔다. 그 결과 내 작업실에는 오래된 라디오, 벽시계, 미싱다이 등이 재이기 시작했고, 몇달 안되어 이 공간이 다 차자 다음 장소를 택한 곳이 '8¹/₂커피숍'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인가  8¹/₂에 고물이 늘어갈수록 매출이 늘기 시작하는데.....

한잔 800원 커피 팔아 하루 매출이 50만원이나 되었다."(출처 :김씨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은

어머니의 성씨 또한 김씨이며, '김씨 박물관'은 어머니의 꿈이기도하다.

현재 건립중인 박물관의 테마는 과자 종류와 문구가 주테마이며, 1407년에 개항 된 제포항을 염두에 둘 때, 인천의 달동네박물관, 부산의 근대사박물관과 같은  근대박물관을 제포항을 중심으로 개항 마을을 만들어 진해 지역에 건립하는  것이 김현철씨의 희망이다.

 

▼ 고물쟁이 김씨의 홈페이지에서

 

나, 김현철

어머니는 외갓집 기질을 많이 가진 나를 "너는 큰자식"이다 하면서 항상 나에게 꿈을 키워 주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항상 어머니의 칭찬 속에 살아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꾸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여 내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왔다 .

그러나 연이은 성공은 나에게 자만과 교만을 주었고, 그 결과 1984년 5월에 시작한 "나의 제국"은 1998년 5월에 막을 내렸다.

 

Tom & Judy(이대점, 돈암점, 신창점), 8½ Coffee shop, Tom's House(이대점, 신창점) 그리고 5 년간의 방황의 객지 생활.........

 

2003년 내 외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왔다.

내 아내, 내 딸 주희, 주연이 그리고 어머니....

나는 내 집 고물창고 한 곁에 있는 내 책상에 다시 앉았다.

 

 

 김씨는 2 년 몇 개월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만났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의 연락을 받은지가 꽤 되었지만, 따로 낼 시간이 없었기에 미루다, 지난 10일에야 '김씨공작소'로 갔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간판은 '김씨공작소'였는데, 몇 달 사이에 '김씨 박물관'과 '꽁뜨'가 걸려 있었습니다.

김씨박물관은 이미 예상되었던 간판이며, '꽁뜨'는 전혀 예상을 못한 간판이었기에, 예나 편안하게 그이 어머니댁인 '김씨박물관'으로 먼저 가 기웃거렸습니다.

 

수고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대문과 부엌으로 가는 길, 어머니의 손길을 기다리던 옷감이 쌓여있던 창고가 개보수되어 보관창고에 있던 물품들이 부분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흠이라면 아직은 부족한 진열대와 어두운 조명이었습니다.

* 보관창고가 따로 있음.

 

앉은뱅이 책상에서 도면 등을 보던 방이 커피점 '꽁뜨'가 되었습니다.

인부에게 일을 맡긴 주인처럼 화장실부터 차례차례 점검(?)을 했습니다. 내 이미지와 코드가 잘 맞아 떨어졌는데, 방금 구입한 듯한 엉성한 플라스틱 장미화분 두 개가 거슬려, 창고에서 몇 십년전의 주전자를 가져와 그 속에 화분을 넣었더니, 장미꽃이 즐거워했습니다.

자극을 받은 김씨는 '남양분유'깡통을 가져와 나머지 장미도 담았습니다.

 

 

 테이블 너머로 김달진 생가의 텃방이 있으며, 겨울초 노랑꽃이 '꽁뜨' 엶을 알립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김씨가 직장인이 아닌 혼자일을 하는 이었기에 다행인 날들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작고 큰 헝겊 가방을 몇 개 주었습니다. 지퍼가 있는 작은 동전지갑은 자동차, 작업 가방,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졌으며, 큰가방은 봄과 여름 나들이용으로 좋은 가방이며,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여러 옷감도 혹, 하며 제법 가져왔고, 다른이들에게는 하잘것 없어 보이는 뚝배기, 항아리도 가져두었습니다.

(버릴려고 모아 둔 것들을 가져가니 김씨에게 어이없는 여자로 보였을 겁니다. 한 술 더 떠 집에까지 실어 달라고 했으니까요.)

 

아직 따끈한 커피점 '꽁뜨'의 간판은 개차반입니다. 아무리 고물쟁이라지만, 새집이니 페인트칠이라도 해야 마땅한데, 김씨는 1990년대 - 부산 신창동 미싱골목에서 하던 커피점 '꽁뜨'의 간판 그대로를 꺼내 먼지만 털어 걸어 두었습니다. 딱 김씨 모습입니다.

 

 

김씨의 고물 자랑이 늘어졌습니다.

이건 누구네 집에서 버린 도마고, 저건 어디 서까래가 성하기에 가져왔고 - 요건….

커피를 내리던 그의 딸이 가리개용 뜨개질을 합니다.

딸과 커피는 고물이 아닙니다.

 

버리는, 버려지는 것들을 닦아 문화로 잇는 이가 김씨입니다. 김씨의 문화가 지금은 꽁뜨와 김씨박물관에서 머물지만, 시나브로  소사리(마을)를 벗어나 시내 전역으로 넘치리라 생각합니다. 

돈 되는 일을 한다고 했던 김씨였지만, 아직은 문화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는데, 언론에 몇 번 노출이 되었기에 언젠가는 기울기가 같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돈이 안되는 문화쪽을 선호하지만요.^^

 

 

LP판을 보고, "우리집 정리하니 한 박스 나오더라."하니, "그것 버렸는기요?"하기에,

(김씨아저씨 약 올리고 싶어)분명 돈 되는 일(물건)인데 버릴리가요 - 했지요.^^

 

 

아크릴이나 그외 어느 재료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더 잘 아는 김씨이기에 차림표도 김씨답게 후집니다.

어느집 봉창인지, 엿판인지.^^

 

 

꽁뜨 맞은편에 김씨박물관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머문 집으로 지금은 김씨가 숙식을 해결하는 집이며, 아래의 창고가 작은 박물관입니다.

 

철 대문과 벽에 덕지덕지 붙은 광고지-

어머니께서 김씨와 뜻이 달랐다면, "야이 미친늠아 머 하는 짓이고 -"하며, 하루에 몇 번씩 물을 퍼부어 박박 문질렀을 겁니다.

자식 팔자 반은 부모가 만들어 준다지요. 물질적인 후원도 좋지만, 정신(문화)적인 후원이 가장 큰 힘인 것 같습니다.

 

 

 

박물관 보다는 창고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창고안에는 별의별 물건이 다 있습니다.

1930년대의 일본 나무냉장고와 그 본을 딴 우리나라의 나무냉장고를 비롯, 전기곤로, 구닥다리카메라, 온갖 주전자, 벽시계 등을 비롯하여, 소소한 성냥갑, 과자종이까지 있습니다.

 

 

김씨의 공간은 곧 우리 어머니와 우리들의 공간이며, 우리 아이들이 기억해 두어야 하는 공간입니다.

그의 장모는 부산 남일국민학교 교사였으며, 당시의 가정방문, 수업시간 등의 모습이 벽에 있고, 역시 당시의 책가방, 문구, 장난감 등이 가지런히 있으며, 먹을거리 풍경도 있습니다.

 

 

 

낯선이를 절대 낯설게 두지않는 김씨입니다. 한가지를 물으면 서너가지 이상을 연결하여 들려주며, 낯선이일지라도 좀 더 함께 있고 싶어하는 김씨입니다.

 

 

다시 김달진 생가가 보이는 '꽁뜨'로 갔습니다.

식은 커피잔에 쬐끄만 계집아이 하나가 녹아 있습니다.

 

 

꽁뜨는 진해시 소사동 김달진 생가와 담장 하나를 두고 있으며,

연락처는,

 - 055-552-8608

 - 010-2047-5417

 

단비가 내립니다.

맑은날도 좋지만, 오늘같은 날은 '꽁뜨'에서 죽쳐야 맛인데, 김달진 문학관이 쉬는 날이기에 '꽁뜨'도 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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