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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이 친일이라는 오해와 영랑 생가, 세계 모란공원

by 실비단안개 2019.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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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남미륵사를 나와 강진 터미널로 가니 아이들이 올 시간이 멀었습니다. 하여 근처에 있는 김영랑 생가와 모란공원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강진 여행지중 영랑 생가가 있다고 하니 작은 아이가 친일파 시인 생가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기에, 친일파 생가가 어떤지 구경이나 해 보자고 꼬드겼지만 아무래도 우리끼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기에 우리 부부만 영랑 생가로 갔습니다.

영랑 생가로 가는 길은 '감성 강진의 하룻길'의 부분으로 정약용의 남도유배길 안내도가 있기도 했으며, 김영랑에 비해 덜 알려진 김현구 시인은 김영랑 시인의 친척 조카라고 하며, 대표시와 현구길도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강진은 작은 군지역임에도 지역 특성상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지역임을 강진을 둘러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영랑 생가앞을 약간 비켜 시문학파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시문학파는 1930년 3월에 창간된<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시인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처음에는 김영랑·정지용·박용철·이하윤·정인보·변영로 등이 참여했고, 뒤에 신석정·김현구 등이 가담했습니다.

시문학파 기념관 마당에는 시문학파 김영랑, 정지용, 용아 박용철의 상이 있으며,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김영랑)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정지용)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박용철)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끝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 바퀴에/ 한 잎씩 한 잎씩 이 내 추억을 걸면…"(이하윤)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이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정인보)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변영로)

 

 

 

시문학파 기념관앞에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에서 시문학파 시인 중 김영랑 시인이 건국포장, 정지용 시인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는 경축 현수막이 있었습니다.

뭐지?

친일파 시인에게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추서라니.

이 골목 입구에는 변영로의 '논개'가 나부끼고 있기도 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다독이지.

 

 

시문학파 기념관 전시실 앞 우체통에는 제목(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보다 유명한 구절 '오 - 메 단풍 들것네'가 있었습니다.

 

 

영랑 생가앞에 섰습니다. 보기에 부유해 보였습니다.

 

 

 

너른 바깥마당을 따라 오른편으로 들면 사랑채며, 바로 들면 안채입니다. 안채입구에는 김영랑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있었습니다.

 

 

영랑 생가 안내문입니다.

항일 민족지사랍니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 옥고도 치렀답니다.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도 거부했답니다.

그런데 김영랑 시인이 친일파라는 말이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요? 우리 가족은 여지껏 김영랑 시인을 친일파로 믿고 있었습니다.

 

김영랑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영랑은 아호인데『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시인은 이십 대 무렵 금강산의 영랑봉과 영랑호를 구경했는데, 그 풍광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호를 '영랑'으로 삼았다 합니다.

친일파 시인으로 오해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가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기원하며 씌여진 시라 시인을 친일파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 나름 해석이 그럴듯 합니다.

시에서 모란이란 일제의 승전보를 알리는 매개체라 볼 수 있으며, 일제의 패전을 슬픔으로 여기고 승전을 기뻐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향해 승리를 갈망하고 있다는 해석을 누군가가 내놓았습니다. 그외 '영랑 친일파'는 검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영랑을 친일파 시인으로 믿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랑 생가 방문으로 엄청난 오해가 풀려 다행입니다.

 

 

 

사랑채로 듭니다.

 

 

사랑채 마당에는 배롱나무꽃이 뙤약볕에 붉게 타올랐으며, 옆의 빈터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동백나무가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원래 1906년 초가지붕으로 지었던 것을 1992년에 기와를 바꾸어 올렸는데, 1997년에 기와를 초가로 고쳐 올렸다고 합니다.

이 사랑채에서 유명한 '모란이 피기까지'가 탄생했습니다.

강진신문에 따르면, 영랑은 모란이 필 무렵에 맞춰 해마다 생가 사랑채에서 전국의 유명한 문인 및 문인 지망생들을 초청, 시 창작 대회를 벌였었다고 전해지는데,1930년대 초 어느 봄날에 열렸던 대회에서 영랑도 사랑채를 빙 둘러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 한편을 썼으나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든지 공개하기 전에 시를 쓴 종이를 손바닥에 비벼 쓰레기통에 던지려 했습니다.

이를 본 11년 연상의 선배 춘원 이광수(1892~1950, 상해임시정부 독립신문 발행인 겸 주필까지 지냈으나 1937년 후부터 적극 친일파로 변절)는 "왜 그걸 버려? 이리 줘"하고서는 그 종이를 빼앗아 내용을 읽어 보니 깜짝 놀랄 대작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춘원은 그 시를 크게 낭송,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었다고 전해집니다.
친일파이긴 하지만 이광수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만나지 못 할 뻔 했습니다.

 

 

 

근처에 김달진 문학관과 생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비는 하나도 없는데, 영랑 생가에는 시비가 여럿 있었습니다. 너무 많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안채입니다. 마당에 오래된 모란이 있으며 옆에는 잘 관리한 마삭이 있었고 담장아래로 장독대가 있었으며, 옆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우물이 있었는데, 위치만 조금 다를뿐 김달진 시인의 생가와 비슷했습니다. 우물은 꼭 같았습니다. 다른점은 장독대에도 시비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의 부유층의 가옥 구조가 비슷했을 수도 있지만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영랑 생가 안채의 장독대를 뒤로 하고 대나무숲 사이의 계단을 올라 세계 모란공원으로 갑니다. 모란공원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기도 하지만 생가에서 가는 길입니다.

 

 

계단을 올라 처음 만난 풍경입니다. 하늘이 정말 맑다는 생각에 카메라가 절로 들어졌습니다.

 

 

 

사계절 모란공원입니다. 4계절 모란공원이니 지금도 모란이 피어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들었는데 모란은 피어 있지 않았고 모란 그림이 입구부터 안까지 있었습니다. 모란을 보면 양은 쟁반이 먼저 생각납니다. 요즘 추억팔이라고 하여 따로 판매를 하기도 하는데, 어릴때 큼직한 모란이 그려진 양은 쟁반과 밥상을 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벼우며 실용적인 주방용품이었습니다.

 

 

이파리만 남았지만 세계의 모란이 있었고, 100년생 모란과 모란보다 대중적인 수국이 신선했습니다.

 

 

 

 

실외입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니 시원함이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강진 바다가 보였습니다.

 

 

 

김영랑이 책을 펼쳐 자신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수령이 350년쯤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으로 추정되는 '모란왕'입니다.

대구의 경주 김씨 고택에서 모란공원으로 옮겨 왔는데, 한국의 모든 모란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모란왕'으로 불린답니다.

 

 

영랑 생가와 모란공원에 모란이 많았지만 (조성하긴 했지만)수수한 수목이 조화로운 이런 풍경이 더 정겹습니다.

 

 

세계 모란공원 정문으로 나와 영랑 생가를 다시 한 번 봤습니다.

오해하여 죄송해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짖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영랑의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시가 박힌 '감성 강진의 하룻길'을 걸어 강진 터미널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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