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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맑은 사진 - 꽃과 …

보릿고개와 청보리밭의 추억

by 실비단안개 2007.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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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를 구경하고 싶다는 친구가 있어 청보리를 담으러 가다보니 어머니께서 전설인양 들려주신 보릿고개 생각이 났다. 나의 유년시절은 대부분 어려운 생활이었다보니 모두가 그렇게 먹고 사는줄 알았고, 그것이 가난인줄도 몰랐으며, 우리 아이들은 '보릿고개'란 단어조차 모르는 세대이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들로 다니며 삐비(삘기)와, 찔레순, 진달래꽃등을 먹었으며, 밀을 오래오래 씹어 찰기없는 껌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어린아이들이 들으면 비위생적이며 엽기적인 생활이고,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참살이'였던 시절이었다.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의 식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음력 4~5월경을 이르던 말이며, 춘궁기(春窮期)·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빚·이자·세금 등 여러 종류의 비용을 뗀 다음, 남은 식량을 가지고 초여름 보리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때는 대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였다. (다음 사전에서) 

 

 

                         어머니의 보릿고개

 

시인 황금찬 님의 시에 보면, 에레베스트산, 몽블랑(60년대의 詩며, 지금처럼 전문 산악인이 없었는듯)등에는 우리의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지만, 보릿고개에는 소년(동생, 친구, 이웃)이 묻혔으며, 속담에 '보릿고개는 태산보다 높다.'고 하였다. 개인과 나라전체가 가난했던 시절이며, 우리가 끼니 걱정없이(물론 아직도 끼니 걱정을 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생활하게 된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들은 보릿고개를 생각하며 지금도 자식들 끼니 걱정을 하신다.

김은희 님의 두줄 짧은 시에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그대로 있다.

 

보릿고래 - 김은희

 

마른가슴 젖물리던 막내가 장성해도

넘기힘든 고개에 아직도 서 계시는 어머니!

 

가끔 혼잣말처럼, 동무와 이야기하듯이 들려 주시는 어머니의 보릿고개를 자목련이 잎을 떨구는 마당에 앉아 다시 들었다.

"무슨 비가 그리도 내리든지 말도마라, 묵을게 있어야지, 배는 고푸고. 콩누룩찌꺼래기와 보리와 쌀로 밥을했다. 머리는 와 그래 안돌아갔는지 콩을 내서 쌀을 팔모되낀데. 니는 배고푸다꼬 종일 우는데 젖이 나와야 맥이지. 판선 엄마 젖을 제일 마이 얻어 묵고, 죽을 안묵을라캐서 창호집에 가서 밥을 말아 매깃다. 그래도 콩누룩 찌꺼래기가 구수해서 좋더라. 너그 외할배는 미역죽을 끓이데, 큰솥에 미역국을 끓이서…… ."

집집마다 아이들은 풍년인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 배 굶게할 수는 없다면서 시골에서 드물게 삼남매만 두었지만, 지금도 내 어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자식들 끼니다.

 

청보리를 담으러 가면서 버스 정류소에서 새터의 할머니와 보릿고개 이야기를 하였다.

"청보리를 비다가 국을 끓였제, 쑥도 넣고. 그라고 밀 찌꺼래기로 밀개떡을 부쳐 묵었다. 우야노, 묵으야 살지. 비도 징글맞게 오더라."

밀개떡에 대하여 궁금하였지만 지나치는 버스를 따라 뛰느라 더 이상은 여쭙지 못한게 아쉽지만, 50대 초반의 친구가 청보리 된장국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할머니께서 쑥과 청보리로 국을 끓였다는 말씀과 일치한다. 청보리와 쑥이나 냉이를 함께 끓인 된장국 내지 국이다. 지금이야 별미로 청보리된장국을 먹겠지만, 그 시절엔 청보리 반 눈물이 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유채꽃이 까르르 웃으며 청보리가 사운대는 풍경 앞에서 버스를 정차시켰다. 언젠가 한번은 방문하고 싶었던 낯선 댁 담장 밖에서 자목련이 청아하기에 정신없이 담고 있으니, 하얗고 고운 할머니께서 다가오셨다. "집 안에도 목련이 있네."

할머니를 따라 마당의 자목련과 옥매등을 담고 할머니와 커피를 마시며, 보릿고개 때의 기억을 듣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다.

"일본에 살다가 아홉살 때 한국에 와서 마산에서 살았는데, 큰 아가 오십넷(쉰넷)인데, 학교 댕길 땐갑다. 옥수수죽을 묵고  오줌시끼(오줌잦기)가 걸린기라 그래서 고생을 마이했지."

그래, 국민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빈도시락을 들고 등교를 하면 바가지만큼 큰 국자로 옥수수죽을 도시락에 퍼 주었었다. 노르스름한 옥수수죽을 얻어 먹고 싶었지만, 우리는 도시락을 들고 다닐 형편은 되었는지 한번도 옥수수죽을 먹어보진 않았다.

 

자운영꽃밭에서 만난 할머니는 자운영을 뜯어 먹고 자운영 나물을 드셨으며, 역시 비가 많이 내려 보리를 베어두면 비에 싹이 나고 썩기도 하였다고 말씀하였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내 어머니와 할머니!

 

 

                          청보리밭의 추억

 

 

 

이야기가 무거웠다. 청보리밭 이야기를 하자.

전화 통화로 나눈 친구들 이야기다. 50대 초반인 친구는 청보리 된장국을 먹고 자랐는데 비하여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는 몇년 아래라고 이야기가 달랐다.

"친구하고 공 차고 싶은데 소 풀 비(베어)오라카데, 꽁보리밥 한그릇 비우고는 에라 모르겠다, 일단 놀고 보자. 놀다보니 해가 깔딱깔딱하는기라, 우짜노, 남의 보리밭에 가서 복새(독새풀:독새기)하고 보리를 막 빘지. 깜부기 뽑아서 친구에게 몰래 장난치고, 복수 당하고 또 보리 밟으러 댕기고, 하하…… ."

 

그래, 보리문둥병이라는 깜부기와 보리 밟기가 있었다. 그 시절엔 각설이와 나병 환자도 많았으며, 해질녘에 보리밭을 지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 보리밭에 문둥아 해 다 졌다 나오너라~♬~

* 보리밟기 : 보리의 웃자람과 표토가 부풀어 올라 뿌리가 들뜨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보리 싹의 그루터기를 밟는 일.

 

▲ 복새(독새풀, 독새기)

 

▲ 깜부기

 

40대 초반의 친구에게 청보리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들려 달라니까 아주 낭만적인 추억을 들려주었다.

"아~ 물레방앗간은 없고 워째~ 청보리밭으로 연애하러 갔지요. 하하 - "

나의 청보리밭 추억은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며 삐비를 뽑아 먹었으니 남자 친구들보다는 서정적인것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어 이곳으로 이사한지가 13년째다. 이사를 후에 아이들은 한동안 바닷가와 얼음이 언 개울에서 고드름을 따며 썰매를 탄다고 옷을 적셔왔었고, 자전거를 타면서 논두렁에 박혀 흙투성이가 되어 온적도 있었다. 마을버스도 없던 시절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는데, 학교가 파하면 공중전화로 마중 나오라고 하기 일쑤였는데, 벌써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다. 내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청보리밭의 추억은 가지지 못하였더라도, 아~ 우리 엄마와 개울물 소리와 개구리 소리 들으러 갔었지, 우리 엄마와 진달래 꺾으러 갔었지, 우리 엄마가 토끼풀로 반지며 꽃시계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정도만이라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하루 살기에 바빠 가난한줄도 모르고 하루해를 바쁘게 채워야했던 어머니, 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보리밭 사잇길을  걷자고하면 사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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