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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빛나는 전선에 감긴다면?

by 실비단안개 2008.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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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아름답다.

화려하다.

낭만적이다.

때로는 이단적인 행위도 가능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 빛을 보고 '미친짓'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빛은 밤낮이 없다.

빛은 치명적이다.

빛은 반인륜이다.

빛은 형벌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고대 나무 정령 신앙에서 유래

크리스마스와 나무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일설에 따르면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가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현지인들의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 데서부터 비롯되어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래를 따져보면 크리스마스 트리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보다 이교적인 풍습에서 등장한다. 애니미즘(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을 믿던 원시인들은 나무를 숭배하였고, 신을 모시기 위해 나무를 가정에 들여놓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대추야자나무를 집안에 들여놓았고, 드루이드교를 믿던 켈트족들은 오딘 신을 숭배하기 위해 참나무에 금박의 사과를 매달거나 헌물들을 바쳤다. 나무에 치장하는 풍습은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서도 고목에 오색 천을 매달고 신성시했던 데에서 엿볼 수 있다.

로마인들도 나무를 숭배하였다. 크리스마스가 축제일로 제정되던 당시, 로마인들은 새터날리아 축제 기간 중에 완구와 장신구 따위로 나무를 장식하였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로마제국에서 큰 축제로 자리잡자 이들은 나무에 치장하는 풍습을 크리스마스 축제의 일환으로 즐기게 되었다. 고대 부족들에게 생명의 상징이었던 상록수는 길고 어두운 겨울밤이 지난 후 세상에 새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16세기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방안에 나무를 세우고 나무에다 하늘의 별을 상징하는 촛불을 켠 이래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보편화되었다.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주지역에 크리스마스 트리 풍습은 전반적으로 확대되었다.

 

가까운 곳에 내 또래의 여자분이 있다.

그분은 넋두리가 아닌 호소를 하였다.

얼마전에 개업을 한 닭집(음식점)의 밤 빛 때문이다.

시골의 밤, 달빛, 별빛이 그리워 시골에 집을 지어 이사를 하였는데, 닭집의 빛과 소음으로 밤이 괴롭다는 것이다. 그 닭집은 여자의 집 윗쪽에 있다.

 

빛도 공해인 시대다.

변두리 음식점, 카페등은 오늘도 나무에 빛을 넣는다. 대단한 서비스마냥.

 

성탄과 연말연시가 지난 지금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얼마전에 벚꽃나무에 감긴 전선 제거 작업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한달은 되지 않았지만, 늦은 포스팅은 사실이나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해야 하는 일이기에 포스팅을 한다.

 

밤의 빛을 보면 서울(맞나?)의 하늘공원 억새가 늘 생각난다. 참 불쌍한 억새 - 갖가지 색으로 포장되어 인간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 하늘공원의 밤 -

 

청계천의 밤 빛 또한 넘길 수 없다.

2메가바이트 - 아직도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되기를 기대하는데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

밤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저질러 놓고 그것을 대업이라 칭하는 이들이 참으로 웃긴다.

 

김택근 시인님의 말씀이다.

 

나무들이 겨울잠을 자며 쉬어야

연말연시의 도심에서는 날마다 빛의 축제가 열립니다. 해가 지면 불빛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각기 독특한 모양과 화려한 빛깔을 뽐냅니다. 그중에서도 나무가지에 작은 전구를 수도 없이 매달아 놓은 `살아있는 트리"는 단연 돋보입니다. 한겨울에 피어난 빛의 잎 잎….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나무가 한없이 불쌍합니다. 그것은 나무에 대한 가혹행위가 분명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살아있는 나무에 작은 전구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물처럼 전선으로 촘촘히 나무를 칭칭 감습니다. 그물이 촘촘할수록, 그리고 전구가 촘촘히 박혀 있을수록 트리는 멋집니다. 그러나 밤에는 나무도 잠을 자야 한답니다. 꿈을 꿀 시간인데도 전구는 나무의 살갗을 달구고, 전구가 깜박거릴 때마다 나무는 더운 숨을 뱉어낼 것 입니다. 이는 빛의 고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툭 하면 나무에 전구를 감습니다. 우리가 봐서 아름다울수록 나무는 그만큼 아프답니다. 나무들이 겨울잠을 자며 쉬어야 하는 것은 봄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잎 떨군 나무들이 다시 새 잎을 틔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밤잠을 설친 나무들은 전선에 감겨 낮잠을 잡니다. 그 모습이 흉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이 지나면 제발 나무에서 빛의 올가미를 벗겨내기 바랍니다. 빛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지금 도시의 나무는 울고 있답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hjh8669/7315936)

 

아름답고 황홀한 빛이다.

 

 

 

        ▲ 위의 풍경은 진해 안민터널 앞의 풍경이다. 어느날 밤에 길을 달리다가 "진해시가 미쳤구나 - "하였다. 빈틈없이 빛나는 나무였다. 며칠 후 낮에 그 풍경이 있는 장소를 찾았다. 참 다행이었다.(위의 사진은 사실 확인 후 뒤에 어느날 밤에 담았음 - 이니셜이 3월.)

 

 

        ▲ 아름다운 빛은 벚꽃모양의 꼬마전구이며, 나무 역시 모형이다. 안심이 되었다.

위의 조명은 진해 육대앞(여좌동)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낮에 담은 풍경은 아래와 같다.

 

 

        ▲ 육대앞의 모형나무

 

       

        ▲ 지난해 12월에 담은 진해중원로타리의 야경이다. 군항제 기간중 많은 행사를 중원로타리에서 하며, 다른 도시처럼   루미나리에도 설치가 된다.(루미나리에도 환영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언급하고 싶지가 않다. 워낙 인조 냄새가 짙기에.)

 

위의 풍경에서 나무마다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빛이라고 칭하기에는 아주 저급한.

개인 소유의 건물이나 음식점 등의 나무에 감긴 전선도 접고 싶다. 나무가 불쌍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사안이기에.

 

아래의 사진을 보자.

 

 

지난 2월 19일이었다. 창원에서 일을 마치고 그 연장선으로 흑백의 경아씨를 인터뷰하기 위하여 전화로 예약을 하고 흑백으로 가니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탓으로 경아씨를 기다려야 했는데, 일행이 있었기에 중원로타리의 작은 카페에서 차를 한잔 하자고 가는데, 벚꽃나무 전선 게거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열심히 그 모습을 담으니 작업을 하시던 분들이 그러셨다.

(처음에 우리는 서로가 볼멘 소리를 냈는데, 나중에는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대화를 하였다.)

 

작업 바구니를 이용한 설치와 제거작업 모두가 불법이지만 먹고 살려다보니 이 일을 한다 - 그러니 상호는 찍지 마라 -

알았다 - 인물도 담지 않는다. 상호와 인물 모두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이 일은 진해시만의 일이 아니며 전국적인 일이다. -

 

 

카페 창으로 작업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전선덩어리가 떨어지기에 다시 나갔다.

 

 

        ▲ 벚꽃나무 한그루에서 제거 된 전선이다.

 

식물은 말이없다. 그들은 수없이 외쳤지만 우리가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프고 뜨겁다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연말부터 오랜 기간을 전선을 감고 살아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의하여 이제 그 전선을 게거하였다. 다가오는 연말연시를 기약하며.

 

이 일은 진해시만의 일이 아니다. 많은 도시에서 연례 행사처럼 벌어지는 굿판이다.

나는 나와 내 이웃이 내는 세금이 저급하게 사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진해시만이라도 이런 일에 앞장서지 않기를 희망한다.

 

롯데마트와 육대앞처럼 조형물로 대신하고 우리 도시에서 자랑하는 벚꽃나무에게 더는 잔인한 짓을 하지말자. 

그리고 우리, 인조빛 앞에서 환호성 지르지 말자.

나무를 빛나게 한다고 선진국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외국의 싸구려 문화는 제발 수입을 좀 하지 말자.


나무는 흑백이고 싶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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