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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 진해2차 웅천왜성 탐방후기

by 실비단안개 201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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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유장근교수님(경남대 인문학부 교수. http://blog.naver.com/yufei21)이 이끄는 도시탐방대(http://cafe.daum.net/masanstory)의 진해2차 탐방이 있었습니다.

지난해부터 마산탐방 이야기를 읽었지만, 직접 탐방대원이 되기는 처음이라 망설임은 없었지만 혹 낯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민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되었습니다만,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이기에 집합장소인 웅천초등학교로 갔습니다.

 

긴장이 되었는지 화장실을 찾아 예술촌으로 가니 산행 차림의 여자분이 뒤따라 왔기에 탐방대원이냐고 물으니 마산에 거주하며 처음으로 참가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동지를 만나 반가웠으며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오후 2시는 하루중 가장 더운 시간이지만, 시간이 되니 대원들이 웅천초등학교 보호수 아래에 모였습니다.

사회인 나는 모르지만 실비단안개를 아는 이가 있었으며, 탐방자료의 이미지 출처에 '팬저(http://panzercho.egloos.com/)'닉이 있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좀은 정준하 이미지가 풍기는 남자였습니다. 팬저 님은 안골왜성 도면을 메일로 보내드렸기에 처음이지만 익은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은발의 청춘 유장근 교수님의 소개가 있었습니다.

 

 

잠시 지난 탐방(2010년 5월) 복습이 있었는데, 웅천초등학교의 옛교문 기둥을 소개받았습니다.

3년쯤 되었나, 웅천초등학교 학생 민경이를 만나러 학교에 갔을 때 놀이터 한 켠에 버려진듯이 누워있던 그 기둥이었습니다.

당시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비밀이 벗겨져 반가웠습니다.

 

                          ▲ 교문의 기둥이 역사체험관을 받치고 있습니다.

 

오후 2시부터 웅천왜성, 세스페데스 신부공원, 웅천도요지, 김달진 문학관을 탐방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여 왜성 입구까지 차로 이동을 했습니다.

얼마전 세스페데스 신부공원을 포스팅 할 때 왜성에 가고 싶었지만, 혼자 가기에는 벅찬 길이었기에 못가 아쉬움으로 있었는데, 둘도 아니고 열명이 넘는 대원들과 함께 하는 길이니 걸음이 절로 가벼워졌습니다.

 

웅천왜성의 주차장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들머리 공터에 주차를 하고 우리는 참 걸을만 한 길을 걸었습니다.

바다바람과 숲의 바람이 좋았지만, 기온탓으로 흘리는 땀은 숲에 피어난 하얀개망초무리와 외로이 핀 나리가 쉬게 했으며, 앞서가던 대원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에 다가가니 도둑게를 잡았습니다.

 

 

도둑게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탐방자료에 올리다가 떨어뜨렸으며, 대원들은 게구멍에서 게가 나오는 모습부터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진지한 어린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궁금증을 가득안았습니다. 

 

 

도둑게는 진해만에 서식하며 바닷가에 살지만, 인가나 바다와 가까운 들에서 생활이 가능하며, 자라면 집게가 붉어집니다.

구멍에 넣은 게는 화가 잔뜩났습니다.

가시가 있는 망개가지로 어르는데 거품을 뽀글뽀글 내고 있습니다.

게가 거품을 내는 건 화가 났을 때라는군요.

사람도 괴롭거나 흥분하면 게거품을 물지요.^^ 

 

도둑게를 만나는 일은 흔하기에 생각없이 스쳤는데, 도시에서 생활하는 대원들은 참 별거 아닌 일을 신기해 하며 아이마냥 호기심을 가지고 즐거워했는데, 자연은 작은 것일지라도 어른들도 천진하게 합니다. 

 

 

숲을 살피느라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지만 혼자일때 마냥 하냥 느리게 걸을 수 없었습니다.

대원들이 왜성가는 길 중간지점에서 휴식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화장실과 평상이 있으며, 숲은 차나무를 심어 소롯길을 만들어주며 이른봄에 각시붓꽃과 노랑제비꽃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또 왜성으로 가는 길에는 으름덩굴이 많으며, 옥녀꽃대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대원들을 버리고 숲으로 걷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꾹 참고 일행이 되어 왜성으로 걸었습니다.

 

 

안내표지가 나오고 조금 걸으면 양갈래 길이 나옵니다.

내가 왜성으로 갈 때는 얼라아부지와 동행을 하는데 우리는 처음갈 때 오른편으로 올랐는데, 팬저 님께서 왼편으로 가야 왜성의 정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래서 탐방내지 문화재를 찾을 때 전문가나 해설사가 필요한가 봅니다.

 

 

목적지가 웅천왜성이 아닐지라도 숲을 걷는 일은 좋습니다.

계절마다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내는 숲은 계절마다 바람 맛도 다릅니다.

조금은 가쁘게 때로는 느리게 대원들은 걸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으며, 식물에 대한 궁금증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만나는 화단의 식물이 아니니 이것도 이름이 있구나 하며, 많은 것들을 처음인듯 했습니다. 

아이들 소풍 모습이었습니다.

 

중간의 휴식공간까지 걸을 때 한무리의 산딸기나무를 만나 산딸기를 따 먹었으며, 따서 서로 건네주기도 했는데, 왜성 정문에 다다랐을 때는 더 많은 산딸기를 만났습니다.

산딸기와 함께 까치수영(염)도 만났는데, 높은 산속이라 들에서 만나는 까치수영보다 맑았습니다.

한동안 들에 가지않았기에 올해 처음 만난 까치수영입니다.

왜성정상을 밟지 않더라도 나리와 까치수영의 만남으로 이미 마음이 충만해졌습니다.

 

꽃집에 가면 무지개색보다 더 많은 갖가지 색의 꽃을 만날수 있고 과일점에는 바다를 건너온 과일도 있지만, 우리 들과 산에서 피고 열리는 맛은 만들수 없으며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연에서 느끼는 오감은 도시의 화려한 것들과의 비교를 사양합니다. 

 

 

 

안골왜성도 그렇지만 웅천왜성도 마치 미로같습니다.

성은 3개의 문이 있으며, 성벽이 조선의 성이 90도인 반면 왜성은 70도며, 웅천왜성 정상에서 건너 거제와 안골왜성이 보입니다.

 

 

지금은 성터에 소나무가 있지만 당시에는 빈터였을 것이고, 웅천도요지의 도공이 일본으로 납치될 때 웅천왜성에 집결을 했을 것이며, 최대의 대접을 받지않았을 까 하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곤 세스페데스 신부와 왜군의 이중성을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온갖 약탈을 일삼다 밤에 미사를 올렸다는 게 보통의 믿음을 가진 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놈의 뇌구조와 오장육부는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모양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사가 접전된 곳이라는 안내가 성터에 몇 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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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페데스 신부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은 1593년 일본인 고니시의 초청으로 이 땅을 밟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입니다.

세스페데스는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종 신부로  스페인 출신의 그는 일본에서 사역하던 중 임진왜란의 와중에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상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멜(1653년, 효종 4년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바다에 표착漂着)보다 60년 앞섰으며, 통영에서 주장하는 멘데스(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 1604년, 선조 37년 6월15일 34세의 멘데스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일본 무역선이 풍랑을 만나 통영 해안에 표류하면서 중국인 16명,일본인 32명,흑인 1명 등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돼 조사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음.) 보다도 앞섰으며, 하멜과 메덴스가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난파 ·포류한 것과는 달리 비록 일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청이지만, 우리나라를 밟은 최초의 서양인이 세스페데스입니다.

 

세스페데스는 1551년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가 되어 1577년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래로 1611년 12월 고쿠라에서 60세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34년간 일본의 천주교 전파를 위해 일했습니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공격했던 고니시 고니시가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천주교도였습니다.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당시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아내였는데, 그 역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소오는 조선의 지리를 꿰뚫고 조선말에도 능통해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으며,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군종 신부로 온 것입니다.

 

1577년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 신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처음에 외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1587년 7월 국력을 모으고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를 탄압하고 모든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년 1592년(선조 25) 4월에 15만여 명의 군대로 하여금 조선으로 쳐들어와 7년 동안 왜란을 일으키며, 이때 천주교 신자 18,000명을 군대로 편성하여 조선 침략에 출정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세스페데스를 침략 선봉장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군종 신부로 배속시켜 조선에 보냅니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갑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에 따라 쓰시마를 거쳐 1593년 12월 27일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고시니 유끼나가의 부대가 주둔해 있던 경남 진해 웅천성(熊川城)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8일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을 비롯하여 울산성까지에 이르는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일본군 신자들에게 고해성사 등을 주는 한편 길가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구제하며 일본으로 잡혀가던 조선인들을 돌봐주었으나, 그 밖의 조선인들은 모두 그를 피하거나 피란하여 접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세스페데스는 일년 가까이 웅천에 체류하면서 천주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 사람들에게 영세를 주어서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을 막았고, 끌려간 조선 사람들이 외국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1598년 6월 1일에 나가사키(長崎)에서 선교회의(宣敎會議)를 열어 포르투갈 상인으로 조선인을 매매하는 사람은 파문하고 벌금을 받을 것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조선 사람의 구호 활동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신부가 되어 수없이 많은 우리 동포를 구출하며 조선 사람을 위해 헌신적이었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의 나가사키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1602년에는 고쿠라(小倉)에 수도원을 지어 원장으로서 활동을 하다가 1611년 12월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2문 성벽에 흐릿한 글씨가 있었지만, 누구도 모두 읽지는 못했습니다.

 

 

웅천왜성 정상입니다.

진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군항도시로 임진왜란 때의 명장인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많습니다. 반면 왜군이 만든 유적도 있으니 그것이 웅천왜성입니다.
웅천왜성은 남문동의 남산(해발184m)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소서행장이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정유재란에 재침하여 다시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성내의 넓이는 약 5,000여평 정도이고 성벽의 둘레는 1,250m, 높이는 3~8m에 이릅니다. 
          

웅천왜성은 1985년 1월 14일 경상남도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해안에 왜군들이 축조한 18개 왜성 가운데 하나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하던 곳으로 남산왜성(南山倭城)이라고도 하며 그동안 증, 개축은 없었습니다.

구조는 일본식으로 복잡하게 축조되었고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점차 산록을 따라 이지성(二地城)·삼지성(三地城)이 질서있게 배치되었습니다. 육지로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남쪽으로 긴 나성(羅城)을 두었고, 성내 면적은 1만 7,930㎡이고 성벽 높이는 3∼8m에 이릅니다. 현무암과 청석을 써서 쌓았는데 큰 것은 1.5m×1.5m×2m에 이르는 것도 있고, 현재 남은 성벽 길이는 700∼800m입니다. 해안의 선박과 연락하기 위한 통로가 있으며 양 측면에 외호(外壕)가 남아 있습니다.  

 

                          ▲ 로하스 님과 팬저 님, 유장근교수님

 

왜성을 오를 때 대원들은 아이마냥 천진했지만 왜성에서 표정이 진지해졌습니다.

진해에는 임진왜란과 근대에 남겨진 일본의 흔적이 유독 많지만, 일본의 흔적이라고 무조건 없앨 수만은 없는 것들이기에 도지정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관리합니다.

 

왜성 정상에 유독 많이 피어난 바위채송화와 무덤가에 많이 피어나는 엉컹퀴입니다.

물레나물은 성터에서 만났는데, 처음 만난 풀꽃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이슬이 이미 걷힌 오후 4시경이었는데 잎에 물방울이 맺혀있었습니다. 설마 물레나물이 흘린 눈물은 아니겠지요.

 

 

                          ▲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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