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가본 곳

청도 유등연지, 연꽃이 아닌 복숭아에 홀리다

by 실비단안개 2012. 8. 4.
728x90

 

부산역에서 청도까지는 무궁화호로 1시간 조금 넘게 걸렸으며, 청도역에 내리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마음이 바빠 비옷과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기에 역과 가까운 마트에서 우산을 구입하고 청도읍에서 화양읍까지 택시를 이용하였으며, 거리는 7~8km였다. 택시기사님에게 유호연지라고 하니 몰랐고 옆의 기사님께서 '유등연못'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지역이 경북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이기에 청도 사람들은 '유등연못'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작업 후에 청도역까지 다시 나와야 하기에 기사님에게 명함을 받았는데, 감사하게 콜 비용없이 왕복요금으로 기다려주마하여 마음이 편안하였으며, 유호연지에 도착하였을 때 역시 비가 살풋살풋 내렸지만 우산은 그리 필요하지 않을것 같아 택시에 두었다.  

 

맙소사!

블로거 기사에 오른 그 연꽃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2만 600 여평의 연못은 어쩌다 분홍점이 있을 뿐 푸르디푸르기만 하였다. 군자정(君子亭)에 들려 건너편으로 가면 어떻게 가야 하냐고 여쭈니 길따라 돌아올 수 있다는 답변에 군자정 오른편으로 걸었다.

 

나, 부산도 아니고 새벽에 일어나서 꽃단장하고 진해에서 왔다구 - 연꽃을 많이 피우지 못한 유호연지의 무심함을 탓할 수 없기에 줌으로라도 연꽃을 담아야했다. 이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라, 배터리 12개를 충전하여 갔는데.

 

걷다보니 연꽃이 보였다. 그런데 너무 멀다. 다른 지역의 연꽃단지처럼 연못 안으로 길이 있는것도 아니며, 내리는 비에 길이 미끄러웠지만 풀을 잡으며 연못가로 최대한 내려갔는데, 수풀에서 뱀이 나올까 무섭기도 하였다.

연못가에 작은 물고기들이 죽어 둥둥 뜬게 보였다. 일단 한컷 담았다. 왜 죽었지?

푸른 연못과 간간히 핀 멀리 있는 연꽃 구경으로 물고기의 죽음은 잊고 그나마 꽃이 핀 연꽃이 보이기에 수풀 아래로 다시 내려가는데 이게 왠 일인가.

 

악 -

몇됫박은 될만한 죽은 작은물고기가 길 위에 버려진걸 모르고 그걸 밟아 미끄러졌다. 비릿함, 난감함!

왼팔목과 발목이 아팠다. 카메라는 흙을 뒤집어 썼고. 열심히 닦았다. 그런데 닦다보니 오른손엔 피가 흐른다. 흑 -

엉덩이가 축축하며 비린내가 진동을 하기에 만져보니 냇물에 주저앉은 꼴이었다.

카메라의 흙을 닦고 작동을 실험하니 이상이 없어 다행이었으며, 아무리 비릿하고 난감한 일이지만 연꽃 한컷 못담고 돌아서야 한다는건 너무 가혹한 일이라 손을 길에 고인 빗물에 씻고 신발의 흙도 대충 씻고 엉덩이도 빗물을 묻혀 쓸었다. 축축함 - 흑 -

 

위 글은 2007년 7월 연꽃 첫만남 중 부분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청도가 어디라고 진해에서 부산역으로가 청도행 기차를 타고 유호연지로 갔으며, 그날은 영원히 잊지못할 그런 날이 되었습니다.

참물샘이님께 연꽃 만나러 청도에 한번 가고 싶다고 했기에 약속을 지킬겸 식구들과 휴가지로 청도를 택했으며, 첫번째 방문지가 유호연지였습니다.

지난 가을 팸투어때 차량으로 유호연지 주변을 몇 번 오갔을 때 바랜 연대를 봐도 반가웠습니다.

유호연지는 꿈처럼 늘 아련한 연지입니다.

청도로 가는 길에 차안을 뒤지다보니 안치환의 라이브앨범이 나왔기에 안치환의 음악을 들으며 5년전 그때일을 식구들에세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유호연지는 청도 8경중 하나로, 유호연화라고 하며 화양읍 유등리에 있는 연못으로 일명 신라지라 부르며 둘레는 약 700M, 깊이 2M 정도입니다.

군자정은 그대로였지만 연지주변으로 시비(詩碑)가 세워졌으며, 근처에 옥수수도 팔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봉숭아나무를 보긴 했지만 팔거나 하지 않았었는데 봉숭아밭 가운데의 작은하우스에서 선별작업을 하는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대전이 고향인 할머니는 잘난 남편만나 청도에서 산다며, 봉숭아를 내밀며 먹어보라고 했습니다.

딱딱한 봉숭아는 즐기지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거스릴 수 없었기에 깍아 노부부에게 드리니 많이 먹고 있으니 얼른 먹어~ 했습니다.

큰늠 옆에서 야금야금 먹으며 맛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땐 잘생겼는데 할머니는 조그만 상처가 있어도 골라냈습니다.

봉숭아는 다른 과일과 달리 가위를 이용않고 손으로 톡 딴다고 하네요.

 

 

 

친정에 드릴 백도 한상자와 우리가 먹을 봉숭아 한상자를 샀습니다.

덤으로 준 복숭아와 우리가 그 자리에서 먹은 복숭아가 (갯수로)한상자가 넘었습니다.

감나무에 봉숭아가 열린듯한 청도는 복숭아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복숭아가 청도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청도의 기후와 토질이 복숭아와 감이 생산되는데 적합하다고 합니다.

 

 

 

복숭아나무사이에 대추나무도 있으며, 반시도 달렸고, 참깨가 하얀꽃을 피웠으며 옥수수도 익고 있었습니다.

연꽃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청도 유호연지이긴 하지만 연꽃이 제대로 피지 않았어도 유호연지는 첫번째 연지입니다.

휴가라고 꼭 피서를 즐겨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바쁠것 없어 연지를 한바퀴 걸었습니다.

하늘이 차츰 개이고 있었습니다.

 

 ◀ 근처 밥집의 백련

 

   유등연못/민병도

 

   연꽃도 우는구나 남몰래 우는구나

   무시로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고

   바람에 등을 기댄 채 빈 하늘만 닦는구나

   생각느니,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음에

   저를 속인 거짓말이 물밑에서 드러나고

   세상을 저울질하던 그 오만도 씻는구나

   절반을 물에 묻고도 목이 마른 사랑이여

   별을 따라 가거나 무지개를 따라가서

   퍼렇게 멍이 든 채로 절룩이며 오는가

   사람들도 우는구나 연 못에 와 우는구나

   젊어 한때 풍진세상 구름으로 떠돌다가

   돌아와 저를 붙잡고 소리 죽여 우는구나

 

더보기

군자정(君子亭)

연꽃은 예로부터 군자에 비유된 꽃이다. 군자정은 연꽃 같은 청정한 군자를 추구한 창건주의 정신과 연꽃사랑 마음이 서려 있는 정자다. 군자정은 조선시대 중종 때 모헌(慕軒) 이육(생몰 시기 미상)이 지어 강학하던 곳으로, 연꽃 같은 군자를 염원하며 정자를 짓고 연밭을 조성한 500년의 역사가 간직돼 있다.

모헌은 함창, 보은, 평택 등지의 현감을 지낸 이평의 다섯 아들 중 넷째다. 맏형 쌍매당(雙梅堂) 이윤은 문과급제 후 청도군수와 부제학 등을 역임했고, 둘째형 망헌(忘軒) 이주 역시 문과급제 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시문학에 뛰어났다. 셋째형 이전은 현감을 지냈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헌 자신은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역임했다. 아우인 이려는 문과급제 후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5형제 모두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제자로 명성을 떨친 영재들이었으나, 모두 시절과 맞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쌍매당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고, 망헌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사화로 인해 형제 모두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죽거나 유배되고 은둔하게 된다.

모헌은 사화로 가문의 수난이 시작되자 망헌이 유배되어 있던 진도를 오가면서 마음이 끌렸던,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山不高而秀麗) 땅은 넓지 않으나 비옥한(地不廣而肥沃) 청도 유호(유등의 옛이름)에 은둔하게 된다.

안동에서 내려와 이곳 청도에 정착한 모헌은 후학을 가르치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모헌은 이전부터 있던 조그마한 못을 더 파고 넓혀 지금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유호(柳湖)'라 이름 붙였다. 정자 옆에는 지금도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다.

모헌은 직접 유호에 연을 심어 연밭을 조성한 뒤 1531년 연못 속에 정자를 지었다. 이름을 군자정이라 붙이고 제자들과 함께 강학에 힘썼다. 모헌이 연을 특별히 사랑하고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 한 데는 그 연원이 있다.

중국 북송시대염계(濂溪) 주돈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돈이는 모란을 부귀한 자에 비유하고, 국화는 은사(隱士)에 비유했다. 그리고 연꽃은 군자에 비유했다. 모헌은 주돈이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꽃처럼 청정한 군자를 추구했기에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 하고, 연밭도 지성으로 가꾸었던 것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