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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김해 분산성에서 가락국(駕洛國)을 더듬다

by 실비단안개 201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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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경남도민일보와 경남풀뿌리환경교육정보센터가 함께 하는 2012 생태·역사기행을 다녀왔습니다.

마산 경남도민일보앞까지 가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며 그랬습니다.

 

김해는 제4의 제국 가야의 뿌리인 지역으로 지금도 발굴이 활발한 곳이기도 합니다.

8월 17일 일정이 빡빡했는데요, 정말정말 두어곳은 줄여 주었으면 싶었습니다만 예정대로 잘 마쳤습니다.

 

김해는 가락국(駕洛國)의 고장으로 가락국은 400년대 고구려와 신라의 합동 공격으로 크게 세력을 잃을 때까지 경상·전라권 가야 나라들의 중심이었습니다.

가야는 금관가야(金官伽倻), 대가야(大伽倻), 소가야(小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등의 여섯 나라로 이루어졌으며, 562년 신라에게 멸망되었지만,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고 이후 신라 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12대 손인 김유신은 훗날 신라 진골에 편입되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첫 답사지는 김해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분산성이었는데 어느 누가 김해답사를 가더라도 분산성으로 먼저 가라고 권할 정도로 분산성은 가락국의 유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며, 분산성에서 더듬은 유적지 현장에서 분산성을 보는 감회는 남다릅니다.

가락국 포스트가 이어질 것 같아 이해를 돕기위해 사진에 주요유적지를 표시했습니다.

 

金海 盆山城은 경남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10-162 (어방동)에 위치하며, 1963.01.21 사적 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안내판의 설명입니다.

분산성(盆山城)

김해시내, 김해평야와 낙동강, 그리고 남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분산(盆山,330m)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이다. 현재는 시내쪽 경사면에 약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도 조사되었다. 성안에 있는 3개의 비문과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분산성은 고려 말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돌로 쌓았고, 조선말 1871년에 김해부사 장현석이 고쳐 쌓았다 한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가야·신라의 토기편들도 출토되고, 분산성이 고대 산성의 주류였던 테뫼식산성이란 점 등에서 신라나 가야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김해시민들에게는 만장대(萬丈臺)라는 이름으로 친숙하다. 만장대는 조선시대에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다.

산성 안에는 해은사(海恩寺)가 있다.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 곳에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 테뫼식산성 : 뫼의 꼭대기 부근에 머리테처럼 두른 산성

 

▲ 김수로왕릉에서 보는 분산성

 

가락국의 땅답게 분산성으로 가는 길에 가야랜드와 가야역사테마파크가 있었습니다.

가야역사 테마파크는 드라마 김수로의 촬영지였기도 한데 지금도 공사중이었으며, 마산의 해양드라마세트장과 비슷한 풍경이 있지만, 궁궐이나 양반가같은 기와집도 있습니다.

 

 

가야역사 테마파크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하기에 분산성을 오르는 일은 노약자가 아니라면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오를 수 있는데 가는 길에 있는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 곳에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야역사 테마파크에서 해은사 안내표지까지는 해를 이고 걸어야 했지만, 해은사 안내표시판이 나오자 산길로 이어지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에 땀을 식히며 걸을 수 있었습니다. 등골나물과 이질풀 등의 들꽃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늘진 길은 오래지 않았으며, 잘 쌓아진 성벽이 나왔기에 길을 버리고 성벽위를 걸었습니다.

김해시가지 일부가 보이며, 스친 가야역사 테마파크 현장도 보입니다.

성벽 역시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는지 헐어진 부분도 있으며 이어질 부분도 표시해 두었습니다.

 

 

성벽을 반쯤 걸었을 때 멀리 장유가 보이며, 김해경전철도 보였습니다.

 

 

일행은 성벽끝에 거의 다 도착하여 김해시내를 내려다보며 강충관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아직은 볼만한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오직 가락국을 위한 땅답게 봉황대와 가락궁궐터로 추정하는 부분이 패총전시관옆으로 누워 있습니다.

김해공항을 출발한 비행기 몇을 봤는데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네요.

 

 

오른쪽으로 조금 돌려보면 김수로왕릉과 김해읍성의 옹성, 향교가 보이며 경전철이 길게 있고 그 아래로 해반천이 흐릅니다.

 

 

다시 조금 더 고개를 돌리면 허왕후릉과 구지봉, 김해박물관이 보입니다.

가락국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김해시가지입니다.

 

 

산성에서뿐만 아니라 길을 걷다 잘 돌아 봅니다.

우리가 걸었던 길이 있으며 산성은 정비되어 산세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습니다.

 

 

카메라가 시원찮지만 당겨 찍었으며, 필요한 부분만 잘랐습니다.

김해박물관 옆을 흐르는  해반천은 바다와 동반하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습지 유적지인 봉황대가 지금은 내륙이지만 당시는 바닷가였다고 하며, 김해평야는 나중에 만들어 졌습니다.

진동 해양드라마세트장에서 본 '해반천'을 기억하시는 모르겠습니다.

해반천 구역은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으로 소박함이 특색이라고 했습니다.

 

 

가락궁궐터에서 부산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김해평야 사이로 서낙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 팥죽같은 땀을 흘리며 설면하는 강충관 선생

 

봉황대와 궁궐터, 패총이 빠진 옛가락국입니다.

대성동고분 88호와 91호 발굴현장이 멀리 보입니다.

 

 

위에서 김해향교를 이야기 했는데 아래 사진에서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수로왕릉과 향교 사이에 옹성이 있습니다.

김해읍성의 옹성이며, 대성동 고분군 발굴현장옆에는 대성동박물관이 있습니다.

김해는 시가지 전체가 가락국의 유적지입니다.

 

 

 

분산성위에는 봉수대가 있으며, 만장대(萬丈臺)입니다.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분산성이나 봉수대 모두 교과서처럼 잘 쌓아져 있기에 그다지 옛스럽지는 않습니다만, 가덕도 봉수대에서 봉화를 올려 김해 봉수대에서 받아 서울로 가는데는 17분 걸렸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최고의 통신수단이었습니다.

9월 1일 가덕도 연대봉과 봉수대 답사가 있으니 그때 나머지는 비교해 보겠습니다.

 

 

 

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낙동강에게 눈길 한 번 더 주었으며, 오를때와 달리 충의각쪽으로 내려 왔습니다.

충의각은 분산성의 수축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입니다.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는 고려말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김해부산 정현석이 고종 8년(1871)에 세운 것이며,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 2기는 김해부사 정형석이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후 이를 허가해준 흥성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고려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 관련 글도 새겨져 있습니다.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는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영원히 잊지않고 기리기 위해 고종 11년(1874) 건립했다고 합니다.

 

 

 

충의각을 뒤로하고 이제 가야속으로 걸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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