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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김해 수로왕릉에서 금관가야를 되새기다

by 실비단안개 201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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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경남도민일보와 경남풀뿌리환경교육정보센터가 함께 하는 2012 생태·역사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김해 여러박물관과 습지유적편입니다.

 

분산성에서 내려온 우리는 수로왕릉앞에 있는 밥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수로왕릉으로 갔습니다.

수로왕릉(首露王陵)은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금관가야의 시조능으로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락국의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는 김수로왕으로 김해김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무심히 스친 한자어인데요, 금관가야는 갓冠이 아닌 벼슬官을 쓰는 金官伽倻입니다.

 

다음백과의 김수로왕 신화와 신화해석입니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다.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그리고 천신(天神)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다.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뒤를 이었다. 
 
이 신화는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이는 북방에서 이주한 유이민집단이 낙동강 하구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하여 초기 국가를 형성해나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수로가 6개의 알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표현은 가락국[金官伽倻]을 중심으로 여러 가야국들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3월에 목욕재계로 잡스러움을 떨쳐버리고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 뒤 하늘의 권위를 부여받은 수장(首長)을 선출하는 내용에서 국가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풍속과 정치운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수로왕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지역에 존재했던 수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 계속 받들어졌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관리를 위해 위전(位田)을 설치하고, 능묘의 제례를 후손이 계승하도록 했다. (출처 : 다음 백과)

 

김수로왕은 우리 역사에서는 드물게 신화와 역사, 그리고 문학이 어우러진 인물이며,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는 우리 나라 최대 성씨입니다.

구지봉(龜旨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입니다.


龜何龜何 (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이것은 "우리에게 임금을 달라"는 뜻의 위압적이고 명령적인 노래로, 주술적인 노래일수록 고대에는 강요와 협박의 성격을 띠며, '수로왕(首露王)'이란 "머리를 내놓았다"는 뜻이라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지봉은 김해박물관에서 허왕후릉으로 가는 작은 동산이며, 사적 제 429호로 지정된 구지봉에는 '천강육란석조상'이 있었는데 사적지내 일반조형물의 설치가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수로왕릉 연못 인근으로 옮겼다는 안내가 있으며, 신단수 자리에는 신단수는 오간데없이 (거북)바위만 있습니다.

 

▲ 구지봉 신단수 자리(신을 모신 사당의 종류중 하나) 2006년 7월과 2012년 8월

 

 

수로왕릉(首露王陵)입니다.

수로왕릉은 사적 제 73호로 왕궁(봉황대)의 동북쪽 평지에 있습니다.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립니다.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 숭안전, 안향각, 신도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수로왕릉으로 들어서는 숭화문앞쪽에 하마비가 있으며, 입장료가 없었는데 그날 둘러본 가야유적지 모두가 그랬습니다.

 

 

숭화문을 들어 홍살문을 지나 가락루(駕洛樓)로 들기전에 왼편 경모문 담장을 따라 걸으면 연꽃이 피어있는 연지가 있으며, 경모문 담장에는 능소화가 피어 있고 분산성이 보입니다.

 

 

 ▲ 납릉정문

 

납릉정문앞의 시생대는 가락국 시조대왕과 왕비의 춘추대제때 진설할 시생(돼지)의 의식을 진행하는 곳으로 이 의례를 성생례라 하는데, 제례 하루전인 음력 3월 14일과 9월 14일에 초헌관 주관하에 제집사들이 참여하여 진행된다고 합니다.

 

 

김수로왕릉은 경주나 함안 등의 고분처럼 웅장하지 않은데 이 시기 세력이 약화되어 그렇다고 합니다.

금관가야가 발전 배경과 멸망 원인을 보면, 풍부한 철 자원과 김해지역이 가지고 잇는 지리적 특성이 있습니다.

당시 철은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는데, 금관가야의 벼슬官에서 관은 가진만큼의 세력을 말하며, 남해안의 물길이 김해 북쪽까지 이어졌기에 낙동강 하구에 자리잡는 김해지역은 교역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김해지역 자체가 물자가 오고가는 중심지가 되고 아울러 주변 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금관가야는 가야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속한 금관가야는 고구려와 백제사이의 세력다툼이 치열해지면서 고구려군대가 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자, 가야연맹에 포함되었던 소국들이 이탈하면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던 초기의 가야연맹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5세기 이후에는 전쟁의 피해가 없던 고령지방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이 재편성되었습니다.
후기의 가야연맹은 중국남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한편 신라와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도 하였으나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라가야는 주로 5세기 이후에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대형고분들의 축조 시기도 바로 그때로 보고 있기에 도항·말산리 고분군은 김해의 고분보다 웅장하다고 합니다.

 

 ▲ 왕릉

 

왕릉옆의 숭선전(崇善殿)은 가락국 시조대왕과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으로 가락국 2대 도왕(거등) 원년(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792년 4칸으로 중건, 1878년에 숭선전으로 선액되면서 3칸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1926년과 1954년 두번에 걸쳐 중수되고 1973년에 보수되었으며, 1987년 능 전면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습니다.

숭선전옆에는 향과 축을 봉안하는 안향각(安香閣)이 있습니다.

 

▲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

 

 ▲ 숭안전(崇安殿)

 

수로왕과 허황옥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 역대 가락국 왕들의 위채를 모신 숭안전 등은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내부를 개방하지 않는다는 안내가 있으며, 아래는 전사청입니다.

전사청은 춘추대제시 음식을 만들거나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전사청앞을 지나 사주문을 빠져 나가면 수목이 좋은 능림이 있습니다.

왕릉과 마찬가지로 요란하지 않기에 큰나무그늘에서 못 다 한 이야기와 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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