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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고향 이야기/김달진 문학관

시인의 마을 소사리는 마음의 고향

by 실비단안개 201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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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 다녀오고 이런저런 일들로 올릴 기회가 없었기에 이 글은 꼭 1년전에 저장해 둔 글로 지난해 12월 '진해문화'에 실린 글입니다.

지금 소사는 아래의 풍경에서 조금 변했습니다.^^

 

웅동벚꽃장의 추억

 

지난 여름 폭염은 다시는 다른 계절 구경을 못 할 듯 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감을 붉게 익게 하고 볏단 태우는 냄새가 들녘에 가득합니다.

다른 마을엔 아파트와 공장이 지어지지만 소사는 여전히 어릴적 풍경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동네이기에 고향냄새가 맡고 싶을 땐 소사로 갑니다.

어릴적 소사 웅동벚꽃장은 봄소풍 장소였습니다.

 

웅동 벚꽃장으로 가려면 소사마을을 걷거나 웅동수원지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수원지둑 아래엔 아름드리 벚나무가 빼곡했으며, 어린 우리들은 노래를 부르고 보물찾기를 했으며, 학부모를 비롯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회치를 즐겼습니다.

 

회치란 농사 짓던 농부들이 농한기를 이용해서 들이나 산으로 먹을 거리를 싸 가지고 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야외에서 즐긴것을 말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동네 야유회입니다.

어린 우리도 간혹 엄마들이 즐기는 회치 구경을 하며 함께 떡이나 전 등을 먹곤했던 기억이 있는데 벚꽃아래의 봄소풍과 어른들의 회치는 고향의 봄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풍경입니다만, 지금은 군사지역이라 그 시절처럼 즐길 수 없습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엄마의 날들 중, 볕 좋은 날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풍경을 만나고 싶은데, (웅동벚꽃장을)해군이 언제나 시민의 품으로 돌려 줄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과도 꽃눈 날리는 웅동벚꽃장에 가서, "엄마가 그때 여기쯤에서 '퐁당퐁당'을 불렀거든, 그때 소풍 간다고 노할머니께서 5원을 주셨어, 아마 5원이 맞을 거야, 은색에 50이라고 씌여 있었는데….

 

웅동수원지는 1905년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을 하면서  저수지의 터에 있던 심동, 용잠, 뒤꼴, 댕뱅이, 더머이, 들마을 , 안몰의 일곱 마을이 없어졌다고 하며, 수원지는 일제 강점기 때 진해 주민들의 용수원이 됐고, 이후 우리 해군의 식수로 사용하는데, 저수지의 물은 구천동(아흔아홉내)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가둔 것입니다.

소사리는 모래와 자갈밭이었는데, 일곱마을 사람들은 당시 4가구가 살던 소사리로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었으며, 모래와 자갈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웅동벚꽃장은 웅동수원지 아래에 있으며, 소사리의 들판 끝에서 병풍이 되어 소사마을을 안아 벚꽃을 피웠습니다.

 

진해시 웅동1동 소사동을 지역민은 소사리라고 합니다. 소사리는 김달진 시인의 고향으로 생가와 문학관이 있으며, 신상철 수필가, 김형술 시인, 이혜화 시인, 나순용 시인(수필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수려한 산세와 아흔내의 맑은물 덕분인지 시골의 작은 마을에는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시인의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무리가 아닙니다.

소사리는 시내버스나 마을버스가 운행되지 않는 마을이기에 웅동 마천시장옆의 소사천을 따라 걸어야 하는데 소사천은 김달진 시인의 '열무꽃'에 나오는 앞개울입니다.

 

김달진 문학관과 생가 풍경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솜사탕같은 태산목이 피고 비파 노란열매가 익으며 열무꽃이 피는 6월이며, 장미꽃과 담장을 덮은 하얀 바람개비꽃이 피는 5월도 향기롭습니다.

 

김달진 문학관과 생가

홈페이지 : http://www.daljin.or.kr/ 

경남 진해시 소사동 43번지 (055-548-4066)

 

김달진 생가와 문학관은 김달진 시인의 문학정신을 길이 이어가고자 하는 뜻에서 2004년 9월 생가를 복원하고, 2005년 11월 문학관을 개관했습니다.

맑고 깨끗하게 사셨던 어른이 있었다는 상징성만으로도 마을주민에겐 지주나 마찬가집니다.

김달진 생가와 문학관은 문학관 건립과 때맞춰서 2005년 9월, 진해시와 사단법인 시사랑문화인협의회 간의 위․수탁협약을 체결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김달진문학제를 개최하여 김달진문학상 관련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김달진 문학제는 제33회 군항제가 열리는 날인 1995년 4월 1일 진해 구민문화회관 앞에 열무꽃 시비를 세우고 그 이듬해 시작되었습니다.


월하 김달진은 1907년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나 1989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교 전문학교를 나와 한때 금강산 유점사 등지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광복이후 환속했으며, 1949년에는 진해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남면 중학교 교장도 역임하였습니다.

1929년 7월 문예공론에 '잡영수곡'이 양주동의 소개로 실림으로서 문단에 데뷔해 활동했습니다.

 

잡영수곡(雜泳數曲) / 김달진

 

벼개에 귀를 대이고

자리에 누워 잠이 들려하며

팔닥팔닥 심장 소리 들리네

니젓든 내 목숨을 늣기는때

 

깊은밤 사원의 끗(끝)없는 정적

이 끗없는 정적

하마하마 부처님 숨소리 들릴듯하이

 

좁은길 산모퉁이로

무슨 소린지 고함치며 오든 사람

나와 만나자

말없이 삽분 지나가네

 

탄식을 하며 그를 생각네

탄식을 하며 눈을 감았네

탄식을 하며 문을 열었네

저- 머 ㄴ 하늘에는 구름이 떴네 

(1929년『문예공론』에<잡영수곡>을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

 

월하는 '시원' '시인부락’'동인으로서 알려져 있을 뿐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우리문학사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시인이 일찍부터 지방에 내려와 교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을 뿐 아니라 남면중학교 교장을 물러난 뒤로는 시창작보다는 불교 경전 번역에 몰두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풀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시인의 사위인 고려대 최동호 교수에 의해 김달진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가 간행되면서 재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시인의 시는 자연주의입니다.

도리로서의 자연보다 풍경쪽의 자연 비중이 더 큰데 시인의 시를 읊노라면 고향 풍경이 아스라이 피어 오릅니다.

고향과 고향사람들의 생각이 듬뿍 담긴 '열무꽃'입니다. 봄이 되어도 보이지 않던 배추흰나비는 약속이나 한 듯 열무꽃이 피면 그 위를 날았습니다.

 

열무꽃 / 김달진

 

가끔 바람이 오면 

뒤울안 열무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

베적삼에 땀을 씻으며 

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 향기에 취해 

늙은 암소는

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매미소리 드물어 가고

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

우리들은 종이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별빛따라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이는 돌담을 돌아

아낙네들은

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

내 고향은 남방 천리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 유채꽃이 핀 4월, 열무꽃이 핀 6월, 봄눈이 내린 3월

 

김달진 시인은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자 교육자로 평생을 사셨는데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 그분이 사신 청빈한 삶을 한마디로 순수성과 결백, 고도의 정신주의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문학관 전시실에는 시인의 일생과 작품,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생가는 당시의 생활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텃밭에는 계절마다 다른 채소가 자라며, 마당은 시인의 정신세계처럼 비질이 선명합니다.

 

문학관이 개관한지 어느덧 7년이 되었으며, 그동안 숱하게 드나들었습니다.

문학관 개관날 풍경은 지금도 선 합니다.

생가 마당에 무대를 만들어 시를 읊고 노래를 하고 춤도 추었는데, 작은 시골마을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책으로만 만났던 신달자 선생님을 그날 처음 뵈었으며 문학제가 계속 될수록 만나는 시인도 늘어 났는데 부자가 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문학제가 끝나면 생가 마당엔 시가 가을바람에 고요히 펄럭이는데, 열무꽃 피고 바람개비꽃 피는 날과는 또 다른 문학관의 맛이니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존경하는 이들은 문학관과 생가를 방문하여 함께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피바나 감을 따는 날엔 비파와 감을 안고 와 식구들과 나눠 먹고, 장마철 상추가 귀한 날은 생가 텃밭에서 상추를 솎아 오기도 하는 김달진 문학관과 생가입니다. 무 보다는 열무꽃이 좋지만 지난해 김장철엔 달진표 무를 안고 오기도 했습니다.

해가 좋은 가을날 오후, 생가는 유독 볕이 좋기에 마루에 앉아 학예사님과 국화차를 머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풍경이 되기도 합니다.

마당을 둘러 선 나무에 새는 왜 그리도 많은지.

 

그날은 장터 근처에 동동주집에서 점심으로 수제비를 한다기에 수제비를 먹으러 가자며 문학관을 나서니, 가끔 그랬듯이 여사님께서 김치찌개를 끓이는 중이니 찬이 부실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자고 하여 문학관 작은방에 둘러 앉아 묵은지로 끓인 김치찌개와 갓 버무린 열무로 밥을 달게 먹었습니다.

시를 모르고 시인을 뵌적 없지만 김달진 시인은 이렇게 우리곁에서 행복을 주고 있습니다.

 

고물쟁이 김씨의 김씨 박물관

 

5년전 김달진 시인의 생가 뒤에 집수리를 하는 듯한  그저그랬던 집이 영원한 미완성일듯 한 '김씨 박물관'으로 태어났습니다.

김씨 박물관을 운영하는 김현철 씨는 이름보다 '고물쟁이 김씨'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김씨박물관은 우리나라 첫 냉장고를 비롯 우리나라 근대공산품은 다 모여 있는 듯 한데, 작은 박물관에 들어서면 추억이 막 피어 오릅니다.

아~ 맞다 저런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이 깨져 개울에 빠진적 있지, 저런 가방 메고 저런 공책에 필기하고….

60~70년대 학용품외 가정용품, 포스터 등은 우리나라의 역사입니다.

창고를 채우고 넘치는 수집품이지만 김씨 역시 시간과 정력, 청춘이 묻어 있어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수집품은 누구에게도 선물로 줄 수 없다고 합니다.

 

 

 

1987년, 김씨는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군단위의 민속관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후 일본을 몇 번 더 방문을 하면서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우리의 것을 모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당시 대구의 칠성시장, 서울 청계천의 황학시장, 부산 자유시장과 망미동 등을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쓰레기로 분류되어 버려지고 잊혀져가는 생활용품부터 무차별적으로 구입하여 창고를 마련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은 고미술품과 포스터, 물품 등으로 1997년부터 전시회를 열었으며, 2000년 복지부 주관의 '건강 2000'행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김현철 씨를 내외부로 알리는 기회가 되어 전시회는 2000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김현철 씨가 말하는 김현철 씨는, "어머니는 외갓집 기질을 많이 가진 나를 '너는 큰자식'이다 하면서 항상 나에게 꿈을 키워 주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항상 어머니의 칭찬 속에 살아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 꾸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여 내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왔다.

 

그러나 연이은 성공은 나에게 자만과 교만을 주었고, 그 결과 1984년 5월에 시작한 '나의 제국'은 1998년 5월에 막을 내렸다.

 

Tom & Judy(이대점, 돈암점, 신창점), 8½ Coffee shop, Tom's House(이대점, 신창점) 그리고 5 년간의 방황의 객지 생활을….

 

2003년 내 외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왔다.

내 아내, 내 딸 주희, 주연이 그리고 어머니….

나는 내 집 고물창고 한 켠에 있는 내 책상에 다시 앉았다."고 할 때 목소리 낭낭한 김현철 씨의 목소리는 낮아 있습니다.

 

김현철 씨가 어머니곁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제 김현철 씨를 떠났으며, 김현철 김씨는 딸 주연 씨와 김씨 박물관과 박물관앞의 '꽁뜨'를 함께 운영하며,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러는 역사 마을 소사리를 문화마을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2박물관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김현철 씨는 수집가보다 여전히 고물쟁이로 불리기를 고집하는데 가장 아끼는 수집품은 근대공산품 1호 한사슴표 성냥 광고라고 하며, 전시장이 아닌 안방에서 꺼내 옵니다.

일본인에 의한 성냥은 이미 제조판매중이었지만, 한사슴표는 1897년 우리나라 고흥사 제품으로 1899년 제국신문에 광고가 실렸다고 합니다.

광고내용 풀이입니다.

 

한사슴표 성냥고백

이 한사슴표 성냥 국산품이요

다른 성냥보다 불이 잘 나고 또 장마 등이라도 불이 잘 나오니 귀공들은 아무 의심마시고 팔아 주시요

이번 처음 귀국에 나왔고 이와부터 사 주시고 조선팔도에 다른 성냥 많으나 이 한사슴표 성냥만 받아 주시옵소서

 

독립신문 광고료(1989.6.1)를 보면 14행 1년 광고료가 20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난해였을 겁니다.

창원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분들이 김씨 박물관을 방문하여 소사마을에 프리마켓을 운영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당시엔 생각이 반반이었는데, 창동 예술촌 100일 잔치 하나로 창동 프리마켓을 운영할 때 가 보니 괜찮은 생각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리마켓보다는 '소사리 주말장터'라는 이름으로 봄·가을 주말에 운영하면 마을 주민은 텃밭에서 기른 채소와 곡식을 판매하며 공방에서 만든 공예품을 함께 판매하여 소득의 일부를 마을 기금으로 조성한다면 소사마을 주민들도 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박배덕 갤러리 마당

 

박배덕 화백님은 화백님보다 작품을 먼저 만났습니다.

지금도 작업실이 진해예술촌에 있는데 예술촌 전시회였을 때입니다.

그때 화백님을 뵐 수 없었기에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간다는 글을 남기고 왔는데, 얼마후 소사마을에 박배덕 화백님이 갤러리 마당 문을 열었습니다.

벌써 2년이 넘었으니 화백님도 소사 주민이 다 되었습니다.

화백님 부부가 머무는 시골집 담장은 꽃들이 사철 울긋불긋 피었으며, 마당 담장에도 이런저런 그림들이 걸려 있기에 그 앞을 지나면 여기가 어디지 하며 마당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화백님이 가끔 자리를 비울 때도 살며시 마당에 들어 작품을 감상하도록 배려하며, 화백님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작품활동 중인데 가을 이 날은 볕이 좋아 고양이와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갤러리 마당이 문을 열때 마당은 빈곳이 많았었지만, 이제 마당은 동네를 벗어나 진해의 사랑방 구실을 합니다.

마당은 시골집을 개조하여 아래채는 화실, 안채는 전시실로 꾸몄으며, 창고를 개조하여 역시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시골집이다보니 텃밭을 겸한 꽃밭이 있으며, 마당과 텃밭·꽃밭은 구분을 두지않고 하나의 갤러리가 됩니다.

박배덕 화백님은 이상주의이며, 자연주의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사에 가면 제가 꿈을 꾸는지, 꾸어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데 말씀과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해짐은 분명합니다.

 

 

 

박배덕 화백님의 작품은 대부분 '평면으로 부터의 탈출'입니다.

전시회때 만난 작품도 그랬지만 갤러리에 전시중인 작품들도 대부분 그러한데, 물에 떠 있는 한 알의 사과는 집어 올리고 싶을 정도며, 작은 점이 모인 바위는 물방울을 떨어 뜨리면 또르르 구를 것 같습니다.

 

 

진정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김달진 문학관과 생가를 잇는 골목 가운데 '정가 도자기'라는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정가 도자기 대표 정기영 선생님은 전직 교육자로 일반 도예가에 비해 늦은 나이에 도자기와 인연을 맺어 웅천도자기 복원사업에 몰두했으며, 정가도자기에서는 우리차와 생활도자기 등을 판매하기도 했는데 홀연히 떠났습니다.

 

정기영 선생님은 창원시 초대의원으로 봉사하던 때, 일본인들이 현지인 세 명을 고용해 웅천 옛 도요지를 훑으며 파편들을 깡그리 긁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가서 그 처참한 지경을 목격하게 됐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웅천막사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복원에 나선 것은 2002년부터인데 근처의 웅동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일주일에 몇 번씩 웅동 두동에 있는 도요지에 가면서 부터였다고 했습니다.

 

정기영 선생님은 도예가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고,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기에 물레 정도는 너끈히 다룰 줄 알았으며, 어릴 때부터 도예가로 성장한 사람만 복원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집중과 열정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며 웅천막사발 복원에 매달렸습니다.

 

임진왜란때 일본이 웅동 두동의 웅천도요지 도공들을  잡아 갔으며 웅천도요지는 폐쇄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국보26호 이도다완이 웅천도요지에서 만든 것과 비슷하다 하여 일본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구경을 오고, 웅천도요지의 파편 또한 몽땅 쓸어 가다시피 했습니다. 이에 분개하여 웅천도요지에서 지인들과 같이 계곡을 누비며 복원 할 수 있는 막사발 파편을 주워 복원작업을 했는데 무슨 연유로 떠난지 알 수 없지만, 지난해 웅천도요지 전시관이 개관했으니 좀 더 버텨보았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근·현대가 공존하는 소사마을 고샅길에 찬바람이 불면 정가도자기의 진한 대추차가 생각납니다.

 

 

 

 

김달진 문학관 주차장 맞은편에 알록달록한 대문과 솟대가 근사했던 팥빙수집이 잠시 있었습니다.

직접 팥을 삶아 떡·과일·미숫가루를 듬뿍 올려 주었으며, 팥빙수를 시키면 강냉이 튀긴것도 꼭 내 주곤 한 정다운 분이었습니다.

남편이 사진작가라며 마당과 산방엔 작품 사진이 전시되어 있기도 한 곳인데 작품만 남겨두고 두 분 역시 홀연히 떠났습니다.

떠날 때는 사정이 있겠지만 남겨진 사람은 떠난 그들과의 추억이 어릴적 고향만큼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사는 집이니 누군가 또 들어 올텐데 소사마을에 새로 오는 사람들은 나무처럼 붙박이장처럼 오래오래 함께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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