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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골든벨 예상문제, 여러분은 어디까지

by 실비단안개 201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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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리더의 덕목이 더욱 요구되는 요즘이기에 이순신의 리더십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데, 4월 27일 이순신 1593년 편지 "백성 걱정돼" 기사가 올랐습니다.

 

순찰사 김성일에 보내…노승석(誓海盟山) 여해고전연구소장 발굴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전년부터 경상도 연안에 투입돼 왜구를 여러 차례 패퇴시킨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2~3월 웅포(熊浦, 지금의 경남 진해)에서 7차례나 큰 승리를 거둔 이후였다.

- 모두 읽기 : 이순신 1593년 편지 "백성 걱정돼"

 

- 이순신 연구소 임원빈(일심) 소장의 인문학 강좌 이순신의 리더십 :

http://www.ktv.go.kr/program/contents.jsp?pcode=100969&cid=482098&item=&keyword=&gotoPage=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일이며, 2014년 4월 28일은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 다음 카페 창설 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배사는 단순 친목을 도모하는 카페가 아닌 이순신 학습을 과제로 삼는 모임으로 학습의욕을 증진시키는 데는 골든벨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좌학과 현장답사를 통해 획득한 지식을 점검해보고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지난해 카페 창설 3주년 기념행사로 이순신 골든벨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행사 풍경 몇 컷과 당시 예상 문제 100선이니 함께 이순신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행사는 임진왜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진주박물관 2층 강당에서 창설 기념식과 함께 골든벨대회를 실시하였으며, 40여명의 회원 및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행사는 기념식과 축하공연, 골든벨, 시상식, 만찬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2013년 5월 4일 오후 2시 진주박물관)

 

이순신[李舜臣]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薈)·열()·면(葂)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다음 백과)

 

 

 

골든벨 예상문제는 이배사 카페지기 격군(노 젓는 사람)님이 출제했으며, 행사 당일 문제는 예상문제외에 다른 문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수상자보다 상품수가 더 많았었는데요, 골든벨 행사에 참여한 이배사 회원 모두에게 상품이 안겨 졌으며, 금상인 최우수상 부상은 초슬림 LED TV였습니다.

 

제1회 이순신 골든벨 예상문제(100선)

 

 

1. 이순신 생애관련(20문항)

① 오늘날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순신의 조카 중 한 명이 「이순신 행록」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큰형인 희신의 둘째 아들로서 명 수군에 대한 접반 임무를 수행했던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분(李芬)

 

② 이순신이 전사할 당시 옆에서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모두 4명이 있었다. 큰아들 회와 조카 완, 종 금이, 그리고 통역관인 이 사람이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이 통역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손문욱)

 

③ 이순신이 무과로의 진로변경과 무과합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장인이다. 이순신 장인의 이름은 무엇인가? (방진)

 

④ 이순신의 본관은 지금의 북한 개성 땅에 있는데 무엇인가? (덕수)

 

⑤ 이순신의 중시조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시작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가문이 번창하였다. 이순신의 조상 중 관직도 가장 높았고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이변)

 

⑥ 이순신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13세를 전후한 시점에 어머니의 친정인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현충사가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아산)

 

⑦ 이순신이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12월이 지날 무렵 드디어 첫 관직에 보직된다. 당시 일등귀양지로 유명한 삼수고을에 위치한 이 관직명은 무엇인가?(동구비보 권관)

 

⑧ 이순신이 훈련원 장무관 시절 맡은 임무는 군사들의 인사와 진급 관련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은 자신의 지인을 순서를 뛰어 넘어 9품에서 7품으로 진급이 되도록 서류를 작성해 오라고 이순신에게 지시하였지만 이순신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직속상관은 누구인가?(서익)

 

⑨ 이순신이 무과 급제 후 불과 3년 6개월 만에 종4품의 발포만호로 부임하자 주변에서 이순신을 음해하는 투서를 전라도 감영에 올렸다. 이에 이순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내려온 전라도 감사는 누구인가?(손식)

 

⑩ 이순신이 발포만호 시절 발포객사 앞뜰에는 수십 년 된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당시 전라좌수사는 이것으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인부를 시켜 베어오라고 지시했다가 이순신이 응하지 않아 무산되었는데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지시한 전라좌수사는 누구인가?(성박)

 

⑪ 이순신이 발포만호 시절 과거 훈련원 장무관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서익이 이 직책을 띠고 검열을 나와서 이순신을 음해하는 바람에 이순신은 억울하게 파직되고 말았다. 이 직책은 군기분야에 관한 검열을 하는 직책인데 무엇인가?(군기경차관)

 

⑫ 이순신과 같은 덕수이씨 문중인 율곡 이이가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기를 청했다. 이때 이순신은 같은 문중 사람으로 당연히 만나는 것이 옳지만 율곡이 이 직책에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다. 당시 율곡이 어떤 직책에 있었기 때문인가?(이조판서)

 

⑬ 이순신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용의 군관으로 근무하다 이곳에 부임했는데 여기서 오랑캐 소두목인 울지내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김우서의 시기로 인해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때 이순신은 직책은 무엇인가?(건원보권관)

 

⑭ 이순신이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을 치른 후 보직받은 곳은 함경북도에 있던 유일한 수군진이었다. 이순신이 이 직책을 수행하던 중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아 군사 10여 명이 피살되고 백성 160명이 붙잡혀 가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순신은 모든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였다. 종4품인 이 직책은 무엇인가?(조산보만호)

 

⑮ 이순신이 함경북도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이곳에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자급자족하였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된 이 섬의 이름은 무엇인가?(녹둔도)

 

⑯ 이순신이 제1차 백의종군 중 북병사 이일의 휘하에서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이순신이 맡은 전투편제의 명칭은 무엇인가?(우화열장)

 

⑰ 이순신이 45세이던 1589년 12월에 처음으로 지방 행정관료로 부임하게 된다. 이곳에서 현감직을 맡아 백성들을 잘 다스렸고 인근 태인현감직도 수행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는 충렬사가 있는데 전라북도에 위치한 이 도시는 어디인가?(정읍)

 

⑱ 이순신이 47세에 부임한 전라좌수영은 현재의 여수이다. 원래 이 수영은 성종임금 때 순천 내례포에 설치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지명으로 통용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라좌수영의 지명은 무엇이었는가? (순천 오동포)

 

⑲ 이순신은 53세에 또 한 번의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당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이 진을 치고 있었던 이곳에서 백의종군을 하였는데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인 이곳은 어디인가?(초계)

 

⑳ 이순신이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전사한지 43년이 지난 1643년이다. 이때 왕은 누구인가?(인조)

 

 

2. 임진왜란 관련(20문항)

 

①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오후에 일본군이 부산포 앞에 진입함으로써 발발되었다. 이때 일본군의 선봉장은 누구인가?(고니시 유키나가, 또는 소서행장)

 

② 조선시대 변방에서 일어난 안보위기 상황을 조선조정에 전달하는 통신조직은 봉수대이다. 이것은 남방 2개로, 북방 3개로에서 남산으로 전달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의 조선 침입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은 어느 봉수대인가?(가덕도 연대봉 봉수대)

 

③ 바다에서의 서진이 좌절된 일본군은 육지를 통해 서진을 하고자 1592년 10월 5일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 3만명을 맞아 6일간의 혈전 끝에 물리친 당시 진주목사는 누구인가?(김시민)

 

④ 임진왜란 때 전황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끄는 데 가장 기여가 큰 전투를 흔히 임진왜란 3대첩이라고 부른다. 이 중 1593년 2월 12일 권율이 이끈 조선관민 1만명이 일본군 3만명을 물리친 전투를 무엇이라고 하는가?(행주대첩)

 

⑤ 행주전투에서 승리한 요인 중 하나로 이 사람이 만든 화차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한다. 이전에 통용되던 화차는 신기전 100발을 장착하여 오늘날 다연장 로켓포와 유사하게 발사하여 적 목표를 집중 타격하는 용도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만든 화차는 피사체가 신기전이 아니라 승자총통을 전, 좌, 우에 장착하여 집중 발사하는 것으로 기존 화차에 비해 위력이 더 뛰어났다. 이 화차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변이중)

 

⑥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제대로 방비태세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조선 8도 중 평안북도 일원과 이 도만이 온젼하게 보전되었다. 이 도가 보전된 것은 수군의 일본군 서진 차단과 육지에서의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이 도 진입을 막은 덕분이었다. 당시 곡창지대였던 이 도는 무엇인가?(전라도)

 

⑦ 일본군이 4월 13일 저녁 무렵 부산포 앞에 도착한 후 다음날 부산진성을 공격함으로써 실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부산진성에는 1000여 명의 병력이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최선의 방어를 다했지만 역부족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부산진첨사였던 이 사람은 흑색 갑옷을 입고 최선을 다해 항거하였지만, 수십 배 전력우위를 가진 적의 파상공세에 밀려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이 지휘관이 워낙 용감하게 분전하였기에 성을 점령한 고니시가 ‘흑의장군’이라고 높게 평가했던 이 사람은 누구인가?(정발)

 

⑧임진왜란 발발 시 조선의 국가방위체제는 제승방략제였다. 이 제도는 대규모의 적이 쳐들어오면 적이 통과할 요지를 그 도의 모든 병력을 집결하여 선점한 가운데 적을 막는 제도이다. 다만 이 병력을 지휘할 장수는 반드시 한성에서 차출되어 와야 한다. 개전초기 경상도 병력은 모두 이 제승방략제에 따라 이 지역에 집결한 가운데 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성에서 파견한 장수가 도착하기 전에 적이 먼저 온다는 소식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경상도 장졸들이 모여 적을 기다리고 있던 곳은 어디인가?(대구)

 

⑨ 임진왜란 개전 초기 조선 조정에서는 순변사 이일에 이어 도순변사로 이 사람을 임명하여 조령을 막도록 하였다. 이 사람은 당시 한성판윤이었는데 선조의 지시에 따라 8천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내려가 조령을 막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서 적을 방어하다가 전멸하고 말았다. 당대의 명장으로 평가되었지만 일본군의 전술을 가볍게 보아 패배의 책임을 안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신립)

 

⑩ 임진왜란 극복의 동력 중 하나는 명군의 참전이다. 명 지원군은 애초 요동부총병이던 조승훈이 1592년 7월 17일 3천 5백 명의 병력으로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평양성을 탈환한 것은 다음해인 1593년 1월초였는데 이 사람이 4만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 제독인 이 사람은 누구인가?(이여송)

 

⑪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많은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 사람은 5월 22일에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5월 29일에 전라도 담양에서 유팽노, 안영, 양대박 등과 함께 기병하였다. 이후 7월 10일 금산에서 적을 맞아 분전함으로써 당시 고바야가와군의 전주 침공을 방해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는데, 호가 제봉인 이 사람은 누구인가?(고경명)

 

⑫ 이 사람은 의병장으로 5월초에 충청도 옥천에서 봉기하였는데, 이전에 보은현감을 역임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1600명의 군사로 8월 2일 영규가 이끈 승병 1천여 명과 충청도 방어사 이옥의 관군 5백여 명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8월 18일 일본군 고바야가와군과 금산전투에서 7백여 명의 군사와 함께 분전하였으나 결국 순국하였다. 이순신이 발포만호시절 전라도 감영의 행정관으로 근무하기도 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조헌)

 

⑬ 이 사람은 1592년 4월 22일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다. 당시 유생이었던 이 사람은 일본군이 침입하자 감사 김수를 비롯한 수령들이 도망가자 이에 분개하여 가산을 털어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비단으로 전포를 만들어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고 하면서 신출귀몰하면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곽재우)

 

⑭ 이 사람은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사람이다. 당시 함경북도 병마평사였던 이 사람은 경성 지역에서 의병을 모아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등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이후 북도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1592년 9월 중순에 경성을 수복하고 회령과 명천 지역의 반란세력을 토벌한 뒤 길주성의 일본군을 고립시켜 가토오의 일본군이 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사람의 공적을 기록한 비가 바로 북관대첩비인데 몇 년 전 일본에서 발견하여 돌려받은 뒤 북한지역으로 반환시킨 바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정문부)

 

⑮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복수를 위해 1593년 6월 20일 9만 3천여 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진주성에는 3천여 명의 관군과 6만여 명의 백성들이 들어와 막고 있었는데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이 지휘하며 분전했지만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 진주성에는 당시 전투를 지휘한 지휘소로 이 누각이 유명한데 남강변에 위치한 것으로 당시에 남장대라고도 불렸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인 이것은 무엇인가?(촉석루)

 

⑯ 임진왜란은 7년간 지속적으로 전투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 중간에 강화교섭기간이 있었다. 이때 일본과 명나라간에 이루어진 강화교섭 외에 조선에서도 독자적으로 일본과 강화 교섭이 이루어졌는데 1594년 4월부터 시작하여 7월과 12월 3차례에 걸쳐 있었던 서생포회담이 그것이다. 일본군 제2주장인 가토군과 가진 이 회담의 조선 측 대표는 승병 총사령관으로 도총섭의 직책이었던 이 사람이다. 가토가 불교신자임이 밝혀져 상대적으로 스님을 대표로 발탁한 것인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사명당 유정)

 

⑰ 임진왜란 강화기간 중 조선은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처들을 취하였다. 그 중 명나라 남병의 독특한 대왜구전술을 도입하여 습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남병전술은 일본군처럼 단병 접전에 능하면서도 조총과 같은 위력있는 장병무기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명나라 척계광이 지은 이 병서에서 체계화한 것인데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이 병서를 교범으로 하여 3수병을 양성하였다. 조선후기 수군의 제도도 이 병서의 제도를 적용했는데 이 병서는 무엇일까?(기효신서)

 

⑱ 정유재란기를 맞아 칠천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당시 전라도를 지키던 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편성하여 그 중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이 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 이 성에는 명나라 장수 양원이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고 조선도 전라병사 이복남 등의 총병력 1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결국 5만 명의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8월 17일에 이 성은 함락되었고 이로 인해 전라도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당시 전라도 방어의 최후보루였던 이 성은 무엇인가?(남원성)

 

⑲ 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전라도를 침공하였다. 이 중 6만 4천여 명의 우군은 양산-창녕-합천-거창을 거쳐 전라도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의 청야작전으로 인해 이동 중 군량을 구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 우군은 당시 함양에 있던 이 산성을 공격하였는데 바로 군량미를 획득할 목적이었다. 당시 이 성에는 안음 현감 곽준이 군민들과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8월 16일 밤에 공격을 받아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 산성의 이름은 무엇인가?(황석산성)

 

⑳ 정유재란기에 전라도에 진입한 일본군이 북상을 계속하다가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경기도 진입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는 당시 1597년 9월 7일 벌어진 전투로 명나라 부총병 해생 지휘의 기병 4천명은 일본군 보병 5천여 명이 접전을 벌여 결국 일본군이 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남하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조성하였는데 지금의 천안부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무엇인가?(직산전투)

 

 

3. 조선수군의 해전 관련(20문항)

 

① 이순신이 첫 해전인 옥포해전을 앞두고 전라좌수영 관하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그리고 이 배를 46척이나 동원하였다. 이 배는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유랑어민들이 타는 배로 이순신이 이들을 동원한 것은 열세한 세력을 불리고 경상도 지역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다. 이 배는 무엇인가?(포작선)

 

② 이순신과 원균이 연합하여 최초로 출전하여 벌인 해전 중 옥포해전에 이어 두 번째 벌어진 해전으로 적선 5척을 분멸시킨 해전이다. 당시 웅천땅이었고 지금의 진해 풍호동 행암 앞바다에서 벌어진 것으로 우리말로 ‘학개’라고도 부르는 이 지명을 따서 명명한 해전은 무엇인가?(합포해전)

 

③ 임진년의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은 일본의 수군 최고지휘관들이 참전한 해전이다. 이 중 한산도해전에 참가한 일본수군장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잘 알려졌는데, 누구인가?(와키사카 야스하루, 또는 협판안치)

 

④ 한산도해전에서 조선수군은 견내량에 있던 일본수군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일망타진하였다. 이때 조선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하에 이 진형을 형성하였다. 이 진형은 적선을 가운데 가둔 다음 화포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기본오행진에서 이 형태로 변환한 것이다. 학이 날개를 펼친 것과 같은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 진은 무엇인가?(학익진)

 

⑤ 한산도해전의 승리는 해전 하루 전에 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미륵도에서 목동으로 근무하던 이 사람이 산 정상에서 견내량에 일본군선들이 온 것을 보고 당포에 입항하던 조선수군 함대에 달려와 적정을 알려주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김천손)

 

⑥ 부산포해전은 임진년 마지막 해전으로 적의 본거지를 쳐서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다. 이때 조선수군 함대는 부산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섬에서 3일간 입출항을 하면서 작전 계획을 세워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경상우수영의 최동단 관할 구역이자 이배사가 2012년도에 틈새답사를 했던 이곳은 어디인가?(가덕도)

 

⑦ 이 해전은 지금으로부터 7주갑 전인 1593년 2월부터 3월초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벌어진 해전이다. 이 중 2월 22일에 벌어진 해전은 이순신 최초의 상륙작전을 단행한 해전이기도 하다. 오늘날 경남 진해에 위치한 이 지명을 딴 해전은 무엇인가?(웅포해전)

 

⑧ 1593년 8월부터는 각도 수사를 통합 지휘하는 직책이 생겼다. 이전에는 각 도 수사들 간의 협조체제였지만 이 직책이 신설됨으로써 전라, 경상, 충청도의 수군을 통합 지휘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겸직한 이 직책은 무엇인가?(삼도수군통제사)

 

⑨ 이 해전은 임진왜란 7년 중 두 번이나 있었다. 임진년에는 조선수군의 제2차 출전 시 세 번째 해전이었고, 갑오년(1594년) 3월에도 있었다. 현재의 고성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기생 월이 설화로 유명한 이 해전은 무엇인가?(당항포해전)

 

⑩ 1597년 3월 원균이 지휘한 해전으로 이겼지만 상처뿐인 승리라는 혹평을 받고 있는 해전이다. 현재 정확한 위치 비정이 어렵지만 현재의 거제도 옥포와 조라포 사이에 위치했다고 하는 지명을 따 명명한 이 해전은 무엇인가?(기문포해전)

 

⑪ 칠천량해전은 원균이 지휘한 해전으로 임진왜란 시 유일하게 큰 참패를 당한 해전이다. 이 해전의 패배요인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조정에서 조선수군으로 하여금 부산으로 출정을 강요한 것이다. 당시 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쳐서 출정을 하도록 독려한 사람은 누구인가?(도원수 권율)

 

⑫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요인 중 하나로 당시 조선수군 장졸들의 도망을 들기도 한다. 이 사람은 해전 초기에 휘하 1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도주하였는데, 한산도를 거쳐 이후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하여 수군재건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때 1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도주한 인물은 누구인가?(경상우수사 배설)

 

⑬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함대는 1597년 8월 28일 어란포에서 불과 13척의 전선으로 8척의 적선을 물리친 후 이곳으로 진을 옮겼다. 어란포에 머무를 경우 적에 대한 동향 파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진도에 위치한 이곳에서 명량해전이 있기 전날까지 머물렀는데 당시 해상교통의 요지이기도 한 이 나루터는 어디인가?(벽파진)

 

⑭ 이 사람은 어란포해전이 벌어지기 이틀 전인 1597년 8월 26일에 이순신에게 와서 합류한 전라우수사이다. 당시 조선수군은 12척의 전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1척을 가지고 옴으로써 총 13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김억추)

 

⑮ 명량해전은 10배가 넘는 적을 물리친 해전으로 신비스러운 면이 많아서인지 몇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수중철쇄를 설치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것인데 당시 기록에는 없고 조선후기의 문헌에서 산견할 수 있다. 명량해전에서 수중철쇄를 사용했다고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이중환이 쓴 이 책인데 무엇인가?(택리지)

 

⑯ 명량해전이 끝난 후 조선수군은 월동과 수군재건을 위해 이 섬에다 진을 치게 된다. 목포 앞에 있는 섬으로 이순신은 ‘북서풍을 막을 수 있고 배를 감추기에 적합하다’고 하면서 10월 29일에 이 섬에 유진하였다. 당시 보화도로도 불렀던 이 섬의 이름은 무엇인가?(고하도)

 

⑰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에 조선수군을 이끌고 이 섬으로 진을 옮겼다. 이 섬은 강진땅에 있었는데 땅이 넓고 농사짓기도 편해서 군량미 획득에도 유리하여 조선수군의 주진으로 적당했다.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을 준비할 때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기능한 곳으로 지금의 완도군에 속한 이 섬은 무엇인가?(고금도)

 

⑱ 명 수군은 1598년 7월 16일에 조선수군과 연합하여 조명연합함대를 형성하였다. 명 수군이 합류한 지 3일 지난 7월 19일에 있었던 해전으로 일본군선 100척을 맞아 50척을 분멸시킨 큰 전과를 거두었다. 명 수군은 관망만 하고 조선수군이 주체가 되어 승리한 이 해전은 무엇인가?(절이도해전)

 

⑲ 임진왜란 마지막해인 1598년 9월의 전황을 보면 당시 일본군은 남하하여 울산, 사천, 순천 등에 왜성을 쌓고 둔거하고 있었다. 이 일본군에 대해 조명연합군은 동로, 중로, 서로, 수로로 나누어 공격작전을 실행에 옮겼는데 이 작전을 흔히 무엇이라 부르는가?(사로병진작전)

 

⑳ 노량해전은 조선수군이 주체가 된 가운데 명 수군도 참전하여 치열한 격전과 혼전이 벌어진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급 10여 명이 전사한 반면 명 수군도 2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전사한 명 수군의 장수 중 진린 휘하에서 부총병이라는 위치로 70세의 고령에도 분투하다 전사한 장수의 이름은 무엇인가?(등자룡)

 

 

4. 전선 관련(5문항)

 

① 조선수군의 주력군선으로 155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정걸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전선의 이름은 무엇인가?(판옥선)

 

② 임진왜란 시기 조선수군의 특수군선인 거북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이다(X, 철갑선이 아니라 장갑선임. 두꺼운 판자에 철침을 꽂은 것으로 철갑선으로 볼 수 없음)

 

③ 거북선선장은 주로 이순신이 역임하였다.(X, 거북선 선장은 주로 이순신 부하 중에서 돌격장의 편제를 가진 인물들이 맡았음)

 

④ 거북선은 일종의 포함(砲艦)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포구멍은 용아가리와 거북 꼬리 밑, 그리고 좌우현에 있었는데 모두 몇 개였는가?(14개)

 

⑤ 조선후기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포구멍은 모두 ( )개였고, 통제영 거북선의 포구멍은 모두 ( )개였다.(36, 72)

 

 

 

5. 인물 관련(15문항)

 

① 이 사람의 본관은 하동이며, 시호는 충장이다. 1543년 전라도 영암군(현 해남군) 옥천면에서 태어났다. 7살 때 ‘정충보국’의 4글자를 패도에 새겨 지니고 다녔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효성도 지극하였다. 특히 가무나 여색을 경계하면서 무술과 도의에 힘썼다고 한다. 1570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강직하고 정의로운 성품 때문에 파직을 자주 당했다. 임진왜란을 맞아 녹도만호로서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해전 때부터 큰 공을 세웠고 부산포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정운)

 

②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과거 급제 전에 여도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남 지역의 수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영남 지역으로 출동할 때 이 사람이 향도가 되어 수로안내를 잘 했기 때문에 전투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1594년 3월의 제2차 당항포해전 때 조방장으로 활약하면서 승리를 이끌었지만 그해 4월에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어영담)

 

③ 이 사람은 자는 입부이며 종실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다양한 보직을 거치다가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휘하에서 방답첨사로 활약하였다. 특히 이 사람은 한산도해전 시 견내량에 있던 적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누구인가?(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④ 이 사람은 이순신보다 1살 어리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역할을 했으며 장사수완도 훌륭했다. 이 사람은 칠천량해전 때 조방장으로 참전하여 분전했으나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598년 4월에 탈출하여 부산에 도착했는데, 당시 임금은 ‘이 사람이야말로 중국의 소무와 같다’고 하면서 함안군수로 봉직시켰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김완)

 

⑤ 이 사람은 나주 출생으로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 휘하 감조군관으로 활동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순찰사 한효순의 휘하 장교가 되어 새 전선인 창선(槍船)을 창안, 제조하였으며, 남해현령으로 있을 때는 해추선을 발명하는 등 조선수군의 특수군선을 만드는 데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누구인가?(나대용)

 

⑥ 이순신의 해전승리요인 중에는 화포의 위력도 간과할 수 없다. 화포를 쏘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요한데 당시 화약을 구하기 어려워 자체적으로 화약을 제조해야 했다. 그러나 화약 제조법이 보편화되지 못한 가운데 이순신 휘하에는 화약 제조의 전문가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1580년 무과 별시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수영에 근무하면서 이순신의 전쟁준비에 큰 활약을 하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이봉수)

 

⑦ 이 사람은 주로 거북선 돌격장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해전 승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 사람은 개령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였고, 지략도 출중하였으며 1588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옥포해전 때부터 돌격장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후 거북선 돌격장으로 종횡무진 활약하였으며 마지막 노량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이언량)

 

⑧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무기 중 개인휴대 무기인 승자총통은 일본의 조총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것을 파악한 이순신은 이 사람에게 지시하여 조총보다 우수한 정철총통을 만들었다. 이 사람의 자는 근초이고 호는 성은이며1584년 별시무과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순신 타루비를 세운 인물로도 유명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정사준)

 

⑨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공의 부하로서 가히 공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이 사람은 정유재란기 해남현감으로 부임하여 이순신 휘하에서 작전을 수립하면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노량해전에서는 총알을 6발이나 맞으면서 분전하였다. 종전 후에는 전라좌수영대첩비를 건립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기도 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유형)

 

⑩ 이 사람은 본관이 여산으로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의 군관으로 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라좌수군이 경상도로 구원을 할 때 그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기도 할 만큼 의기가 큰 사람이었다. 전술적 식견이 뛰어났으며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후 사후처리를 잘 하여 노량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송희립)

 

⑪ 이 사람은 문관으로 이순신이 통제사 시절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순신이 출동 나가면 제반 행정업무를 처리하였고, 명나라 군에게는 이순신의 대변인 역할까지도 하였으며 둔전경영도 잘 하여 조선수군의 안정된 운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 사람은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선조임금을 독대하여 “전하께서 만약 이 사람을 죽인다면 사직이 망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이순신의 석방을 적극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정경달)

 

⑫ 이 사람은 본관이 칠원이며 원래 경상우수군 소속의 군관이다가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탈출해 왔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나고야성에서 서기 역할을 함으로써 고급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 이순신은 이 사람을 통해 일본군에 대한 고급 정보를 많이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제만춘)

 

⑬ 이 사람의 본관은 여주로 문원공 이언적 선생의 손자이다. 1597년 20세의 나이에 이순신 막하가 되었다. 이 사람은 명량해전이 끝난 후 군량미 획득을 위해 해로통행첩제도를 창안하여 수만 석의 군량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였다. 조명연합작전 시 진린이 말하기를, “이순신 휘하에는 훌륭한 장수가 많구나. 이 사람은 용략이 유여하고 충의가 대단하니 실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이의온)

 

⑭ 이 사람은 본관이 연안이고 호는 청련으로 1520년에 태어났다. 이순신 첫 근무지에서 근무 중일 때 이사람은 함경감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당시 육진을 순시하면서 근무태도가 나쁜 공직자들을 곤장으로 때렸다 하여 곤장감사로도 불렸는데, 이순신의 근무태도가 훌륭한 점을 확인하고는 크게 칭찬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이후백)

 

⑮ 이순신이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치면서 수군을 잘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조정에서 도와준 이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친구사이로 이순신보다 3살 연상이며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전쟁 기간 영의정으로 다년간 근무하면서 이순신의 각종 제도 건의를 잘 수용하여 이순신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유성룡)

 

 

6. 무기체계 관련(5문항)

 

① 이 무기는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로서는 신형무기였다. 이것은 구형(球形)의 철제 주물 속에 화약과 철편을 넣어 만든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이것은 중완구 등의 발사기에 장착하여 발사하면 목표에 낙하한 후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폭발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경주성전투에서 위력을 입증하였고 이순신이 웅포해전에서도 사용한 이 무기는 무엇인가?(비격진천뢰)

 

② 조선수군이 사용한 이 무기는 무엇인가? 이 무기의 무게는 약 300kg, 길이는 130cm, 구경은 130mm이다. 이 무기에 사용되는 피사체 중 하나는 대장군전으로 길이가 230cm정도 되며 사정거리는 900보 정도(양 1136미터) 된다. 조선수군이 사용한 무기 중 가장 크고 무거웠던 이 무기는 무엇인가?

(천자총통)

 

③ 이 화포는 대형 총통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병기이다. 이 무기에는 장군전을 넣어 쏘거나 조란환 200개, 또는 중연자 60개를 넣어 쏠 수 있다. 장군전을 넣어 쏠 경우 사정거리는 800보(1010미터) 정도 였고 이 장군전을 일본 문헌에서는 봉화시라고 불렀다. 이 총통은 무엇인가?(지자총통)

 

④ 이 무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끝 부분이 낫과 같다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이것으로 배 밑바닥을 긁어 헤엄쳐 오는 적을 막는 데 사용하였다. 낫 모양의 날의 길이는 1척 6촌, 너비는 3촌, 자루는 가새목을 썼는데 길이는 14척 2촌, 못 두개를 가로 꿰어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 무엇인가?

(장병겸)

 

 

 

 

⑤ 이 무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한 대궁에 네 갈고리가 달렸고, 갈고리의 길이는 각 9촌이다. 대궁 길이는 1척 5촌이며, 둘레는 5촌이고, 대궁 끝에 쇠로 만든 사슬을 꿰었는데 사슬 길이는 28척이다. 이것을 던져서 적선을 잡아끄는데 거리가 멀면 삼바를 이어 쓴다. 이 무기는 무엇인가?(사조구)

 

 

 

7. 이순신 인식과 평가 관련(5문항)

 

① 이순신 집안에는 ‘5세 7충 2효’라고 하여 5세대에 걸쳐 7명의 충신과 2명의 효자가 나왔다고 평가한다. 이중 효자 2명은 은빈, 제빈이고, 7명의 충신은 이순신 자신을 비롯하여 셋째 아들 면, 조카 완, 서자 훈과 신, 4세손 홍무, 그리고 5세손 이 사람이다. 제95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이 사람은 충청병사 시절 이인좌의 난 때 충주에서 전사하였는데, 누구일까?(이봉상)

 

② 이 사람이 쓴 이순신의 ‘시장(諡狀)’에는 이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순신은 비록 역사상에 명장으로 백년에 한두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위인이라 할지라도 이순신보다 훌륭한 분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순신과 같은 덕수이씨인 이 사람은 누구인가?(이식)

 

③ 조선후기 이 왕이 지은 ‘현충사 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즉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라고 언급하였는데 조선 19대 왕인 이 사람은 누구인가?(숙종)

 

④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선조임금에게 말한 명나라 장수는 누구인가?(진린)

 

⑤ 일본 해군 장교 중에는 이순신전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중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친 바 있으며, ‘조선의 이순신은 나의 스승’이라고 까지 하면서 존경한 일본의 함대 사령관은 누구인가?(도고 헤이하치로)

 

 

8. 이순신 유적지 관련(10문항)

 

① 노량해전 직전 순천의 예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공격하기 위해 명 수군은 이 섬에다 진을 쳤다. 현재 이 섬에는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진을 친 도독산성이 남아 있으며 이순신대교가 통과하는 섬이다. 고양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 섬의 이름은 무엇인가?(묘도)

 

②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에 가면 이순신의 유해가 잠시 묻혔던 곳이 표시되어 있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 풀이 자라지 않은 곳에 봉분 없이 흔적을 표시한 이곳은 어디인가?(월송대)

 

③ 이순신의 전사 후 3개월이 지난 1599년 2월 11일에 이순신의 시신이 이 산 중턱에 안장되었다. 이순신의 시신은 그 후 15년이 지난 1614년에 현재의 어라산 묘소로 이장하였다. 처음 안장된 곳은 현재 이순신의 손자 이지석의 묘가 있는데 이곳의 산 이름은 무엇인가?(금성산)

 

④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이 모여 있던 곳이다. 현재 복원된 여러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은 제승당이다. 그런데 제승당은 영조 때 통제사 조경에 의해 새로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는 다른 이름의 건물이 있었다. 이것은 장막 안에서 꾀를 낸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종의 작전회의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건물의 이름은 무엇인가?(운주당)

 

⑤ 이 건물은 국보 제 305호로 1603년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착공을 시작하여 1605년 7월 14일 창건한 것이다. 이 건물의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자미의 글 ‘마행세병’의 말미에 있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 건물은 이후 통제영 객사로 활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의 명칭은 무엇인가?(세병관)

 

⑥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606년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왕명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이후 1663년(현종4)에 사액을 받아 국가에서 정식으로 관리하였으며, 대원군의 선원철폐령에도 폐지되지 않았던 이 사당은 무엇인가?(통영 충렬사)

 

⑦ 이 건물은 국보 제304호로 전라좌수영의 본영 객사 건물로 사용된 것이다. 1599년 통제사 이시언이 옛 진해루 터에다가 건립한 것으로 1716년에 소실된 것을 수사 이제면이 재건하였고 여러번 중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쪽을 진무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이 건물은 무엇인가?(진남관)

 

⑧ 이 사당은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여수시 덕충동 마래산 기슭에 소재하고 있다. 1601년 체찰사 이항복의 요청으로 왕명에 의해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것으로 이순신을 주벽으로 하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이 좌우에 배향되어 있는데 사우 건립 후 우부승지 김상용의 계청으로 선조의 사액을 받았다. 이순신 사액사당 1호인 이 사당의 이름은 무엇인가?(여수 충민사)

 

⑨ 이 비는 이순신의 높은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1615년(광해군7)에 당시 영의정 이항복이 글을 짓고 이순신 부하였던 황해병사 유형이 황해도 강음땅에서 돌을 실어와 1623년에 건립한 비다. 현재 여수 고소대 비각 안에 세워져 있으며 보물 571호로 지정된 이 비는 무엇인가?(전라좌수영대첩비, 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

 

⑩ 이 비는 1603년(선조36) 이순신 부하들이 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비의 이름을 이것으로 명명한 것은 중국 양양 땅 사람들이 태수 양호를 사모하여 현산 위에 비를 세운 고사를 이용한 것이다. 양호는 적을 잘 막았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잘 다스려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양양 사람들이 현산 위의 비석을 바라보고 그리운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두예가 그 비석을 이것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인데 이 비의 이름은 무엇인가?(타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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