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토요일 진해 흐리고 사천과 남해 비.
오랜만에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과 함께 했습니다.
상반기 답사는 개인사정으로 참석치 못 했기에 잔뜩 기대를 하고 떠난 번개답사는 진해 회원이 많아 참 다행이었습니다.
18일날 창원지부 정모가 있었기에 4월처럼 며칠만에 다시 만났으며, 내이포(현 웅천)판옥선 님이 처음 동행하는 답사라 나름 더 의미를 두고 싶으며, 운전은 신호님과 격군님이 했는데 두 분 고생하셨습니다.
윤성타운에서 일행을 만나 다시 구민회관에서 나머지 회원을 만나 두 대의 차에 나누어 사천으로 떠났습니다.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지역구 회원들이 이미 선진리성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구면인 회원이 있으며 초면인 회원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기에 닉네임을 말하면 대충 알며 서먹함은 없습니다.
사천 선진리성
선진리성은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일원으로 1963.01.21 사적 50호로 지정되었습니다.선진리성은 임진왜란 시기에 쳐들어온 왜군들이 거점을 만련하기 위해 쌓은 일본식 성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진리왜성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선진리성의 성 안쪽과 외곽쪽으로 많은 시설과 건출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얕으마한 언덕에 성곽의 흔적만 확인 할 수 있으며 봄이 되면 성 주변에 벚꽃이 만발하다지만 선진리성은 처음입니다.
선진리성의 벚나무가 베어졌습니다.
수령이 다하여 베어진 게 아니라 가지부분이 베어졌는데 이유가 참 궁금합니다.
일본 히메지성의 성문형태를 참고하여 복원한 성문을 지나 부자상봉상을 지나면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가 있습니다.
사천해전은 15
조일전쟁(임진왜란) 처음으로 거북선이 실전에 사용된 전투가 사천해전이니 기념비적인 지역이며 승첩지인데 승첩비의 조각 어디에도 거북선은 없고 판옥선만 있는데 사천시가 고민을 해야 할 부분입니다.
삼천포 대교공원 실물거북선
창선 ·삼천포대교 입구의 삼천포 대교공원의 거북선입니다.
우리 이배사는 답사시 시간을 최대로 쪼개 답사하기에 옆에 눈을 돌릴 틈이 없는데 형식적인 조형물이 될 수 있겠지만 박재삼 시인의 시, '아득하면 되리라' 시비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사천해전에 출전한 실물 거북선을 복원한 겁니다.
6월 22일 역사저널 그날 http://www.kbs.co.kr/1tv/sisa/theday/ 에서 거북선이 최초로 출전한 해전이 어디냐는 말이 오가기도 했는데 한산도해전이 아닌 사천해전이며,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게 아니며 조선 태종때 만들어진 철갑선으로 일명 귀선(龜船)이라고 합니다.
복원거북선은 부두 계류 거북선과 육상 전시 거북선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두 계류 거북선으로는 남해 충렬사 앞 거북선, 여수 돌산대교 아래, 통영 강구안 병선마당(3), 진해 해사 박물관 앞, 거제 옥포항에 있으며, 육상 전시 거북선은 거제 지세포항, 당항포관광단지, 사천 삼천포대교공원, 여수 이순신광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에 웅천현감(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님이 출연하여 좀은 가벼워질 수 있는 프로그램 무게를 잘 잡아 주었으며, 이배사 번개답사 복습시간이 되었습니다.
거북선은 3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하는 수면겸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거북선내에는 영상으로 이순신 장군과 사천해전, 거북선을 설명하고 있는데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근처 여행을 하신다면 거북선에 꼭 승선해 보시기 바랍니다.
1층에 비치된 황자총통입니다.
총통은 대포로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유통식화포(有筒式火砲)는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로 분리하여 천자문에서 그 이름을 따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이라 붙였습니다. 이 것은 그 중 가장 크기가 작은 것으로, 편리한 이동을 위해 만든 것으로 총구경 4㎝, 전체길이 50.4㎝로, 임진왜란 5년전인 선조 20년(1587)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노를 젓는 조선수군의 옷에 쓰여진 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니 저처럼 사진 찍느라 돌아 다니지 말고 해설사의 설명을 잘 들어야 내 것이 됩니다.
대방진굴항 大芳鎭掘港
중식후 창선 ·삼천포대교 옆의 대방진굴항 답사가 이어졌습니다.
대방진굴항은 경남 사천시 대방동 251에 위치하며, 1983.12.20 문화재자료 9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굴강은 보고 들어도 굴항은 처음입니다.
굴강은 조선시대 배의 수리, 군사 물자의 하역, 특수 목적 선박 등의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중요한 군사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습니다.
굴항은 상주하던 군인들의 훈련장과 휴식처로 이용되었던 곳입니다.
대방진 굴항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라량의 진영이 있던 곳으로 그 뒤 구라량이 폐쇄되어 쇠퇴했던 것을 조선 순조(재위1801∼1834)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의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둑을 쌓아 굴항을 만든 것입니다. 당시에는 300여 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을 상주시켜 병선의 정박지로 삼고 왜구를 방어하였는데 이 대방진 굴항을 쌓기 위하여 진주목 관하 73개면에서 수천명이 동원되어 1820년경에 완공하였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해설사의 설명이었는데 삼천포라는 지명은 경기도 개풍군 서면과 황해도 연백군 사이를 흐르는 예성강 하류에 있던 무역항 벽란도에서 삼천포까지의 거리가 삼천리라 삼천포라고 불린다는데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나오는데 어느게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대방진굴항 근처에 사는 이들은 마당에 연못을 들인듯 한 풍경인데 그림같은 작은 배도 떠 있었으며, 굴항에 투영된 돌담장이 정겨움을 더 했는데 감정에 젖을 장소가 아니었지만 굴항은 욕심이 났습니다.
굴항은 아름나무에 싸여 있는데 수종은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입니다.
빗방울이 내리는 굴항은 학습이 아닌 마치 산책을 나간 듯 즐겼는데 돌틈사이에는 미국 제비꽃인 종지나물이 그득했습니다.
나무가 가려진 곳에 돌확으로 만들어진 옹달샘이 있지만 따로 설명은 없었는데 조선수군의 식수였을까요?
굴항 윗쪽 쉼터 평상에서 우리는 학습을 했으며, 이순신 장군 동상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굴항을 나오면 항구에 배들이 있는데 거북선이 한 척 있습니다.
유람선으로 배 이름은 거북선이며 통영 경계까지 나아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노후하여 쉬고 있습니다.
남해 창선 이순신 나무 왕후박나무
창선 ·삼천포대교를 따라 창선으로 갔습니다.
창선 - 삼천포대교를 사천 사람들은 삼천포 - 창선대교라고 한다네요.^^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다시 돌려 왕후박나무를 만나러 갔습니다.
창선의 왕후박나무는 이순신나무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순신 장군이 남해를 지키기 위해서 창선도에 왔으며, 치열한 전투 끝에 왜병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과 수하들이 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나무에 이순신 나무라는 애칭을 붙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매년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 삼천포 대교공원 실물거북선에서 찍은 창선 ·삼천포대교
왕후박나무(Machilus thunbergii var. obovata NAK.)는 후박나무(Machilus thunbergii Siebold & Zucc.)의 변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두 종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후박나무는 녹나뭇과의 교목으로 사철 푸른 상록활엽교목이며, 우리나라가 원산지로 알려진 세계적으로 희귀한 수종입니다. 따뜻한 온대성 기후대를 선호하며 울릉도, 변산반도, 남해 도서 지역 등지에 자생하며, 바람에 강하고 공해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남해·거제 등지에서는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후박나무는 총 5건인데 전북 부안의 후박나무군락, 전남 진도 조도면, 통영 욕지면, 통영 산양읍 그리고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로 창선도의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인데, 수령이 5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9.5m, 밑동의 둘레 11m이며 밑동에서 갈라진 가지는 11개입니다.
왕후박나무의 잎과 열매이며, 아래는 왕후박나무 묘목입니다.
선소왜성 및 장량상동정마애비
선조30年(1597) 협판안치(脇板安治)등이 남해왜성(南海倭城)을 축조(築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7년 도요토미는 가토고니시를 앞세운 14,500명의 군사를 선봉대로 1월15일 조선을 다시 침략하며, 일본은 3월 중순까지 총병력 141,500명을 파견합니다. 10월에 북상한 일본군은 겨울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수만의 군졸을 동원,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800리에 왜성(倭城)을 축성(築城)하고 주둔했습니다. 이해 11월 남해에서는 왜장 협판안치(脇坂安治)와 종의지(宗義智)가 선소마을 윤산 천남대(輪山 天南台)에 왜성(倭城)을 축성하고 1,000여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주둔했습니다.
현재 남해왜성(南海倭城)은 전(田)과 답(沓)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천수각(天守台)은 현재에도 육안으로 알수 있으며, 내성도 잔존한 석축으로 형태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外城(제방)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은 도로와 주택으로 인하여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며, 내성의 규모로 보았을 때, 진해 웅천왜성(熊川倭城)에 버금가는 규모로 보인다고 합니다.(출처 : http://marugotobusan.com/all-namhae.htm)
비는 내리지 시간에 쫒기지 하여 우리는 선소왜성은 아래에서 확인만 해야 했으며, 선소마을 바닷가에 있는 장량상동정마애비로 갔습니다.
장량상동정마애비는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9-9 에 위치하며, 1972.02.12 시도유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는 선소왜성쪽에 있었는데 2003년 매미태풍때 마애비의 바위가 지금의 자리로 이동하였다고 하니 하마터면 경상남도유형문화제 제27호가 유실 될뻔 하였습니다.
중국 명나라 장수인 장량상이 동쪽을 정벌하고 바위에 글을 새겼다 하여 '장량상동정마애비'라 이름붙인 것인데 비의 형태는 커다란 자연석의 윗면을 직사각형으로 평평하게 갈아 글을 새겼습니다. 직사각형의 테 주변에는 덩굴무늬를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비문은 이여송과 진린이 원군으로 조선의 남해에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으로, 명나라 군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전승기념비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역사적 자료에는 선소마을에서 명의 수군과 왜군이 싸웠다는 기록이 없어 비문의 내용이 의심스럽지만, 노량해전 직후나 그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에 이 글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되며 남해지방과 관계있는 비는 아니지만, 역사에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명나라 장수의 마애비라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명나라 이여송과 진린이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승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일제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파괴대상 왜구격파 기념비'목록에 이 비가 포함되었었다고 하는데 조선총독부의 파괴를 피하고 태풍 매미도 피하였으니 길이길이 이 자리를 지킬 마애비인가 봅니다.
▲ 옹벽위에서 떨어진 장량상동정마애비(옹벽위는 선소왜성)
남해 이락사 및 관음포 노량해전지 조망(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이미 오후 5시가 가까웠기에 걸음이 바빠졌습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중 하나인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읍을 향해 4Km 달리다보면 오른편에 남해 제 5경인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사적 제232호)'가 있습니다.
2008년 12월에 개관한 이순신 영상관은 국내 유일의 이순신 관련 복합미디어 전문전시관으로 666.86㎡의 전시공간을 갖추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순국한 관음포만 일대는 우리 나라 최고의 호국성지입니다.
이곳은 몽고의 침략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한 고려대장경의 목재를 들여왔던 곳이며, 관음포대첩과 노량해전이라는 두 번의 해전이 치뤄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락사 앞 뜰에는 유언비(戰方急 愼勿言我死. 1988년 해군참모총장 류삼남 씀)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 있고, 이락사가 순국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으며, 이곳에는 육송이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 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락사'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大星隕海'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는데, '大星隕海'란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는 뜻이며, 비각에서 첨망대까지 연결된 솔밭길은 500m에 이릅니다.
첨망대앞의 노량해전지와 설명입니다.
위의 오른쪽 설명입니다.
우리는 답사를 가기 며칠전 창원지부 모임을 했었는데 해설사인 합포해전님이 제독과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에 제독과 장군의 차이에 대해 격군님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안내 설명에는 제독이라고 했기에 검색을 하여 해군 블로그 http://blue-paper.tistory.com/185dp 에 접속하여 확인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영화 '제독의 연인'에 보면 콘스탄틴 카벤스키가 코르챠크 제독역을 했는데 참 멋있었으며, 제독은 보통 서양에서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격군님과 관음포, 해군 블로그를 확인하니 내비게이션이 길을 잃어 헤매듯 제 머리속이 빙빙도는 듯 한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와 훈련을 바탕으로 1592년 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1599년 노량해전까지 일본 수군과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 나갑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당시 수군 최고지휘관으로서 수군의 전략과 전술, 무기체계 등을 철저히 이해하고 활용함으로써 일본 수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해군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을 장군으로 호칭하지 않고 제독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또한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했던 영국의 영웅 넬슨도 제독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장군보다는 현대적 의미의 해군의 최고지휘관인 제독으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요? (출처 : http://blue-paper.tistory.com/185)장군(將軍)
군의 우두머리로 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무관. / 네이버 국어사전일반적으로 육군과 공군 및 해병대의 장성급 장교를 '장군'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해군에서는 '제독(提督)'이라는 단어가 장성급 장교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점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기원은 동ㆍ서양의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양에서 제독이라는 호칭은 'Admiral'로 불리고 있습니다. 'Admiral'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페니키아의 해상 고위지휘관 직함을 아미랄(Amiral)이라고 호칭한데서 유래한다는 설과 '바다의 귀족', '바다에서 뛰어난 일을 행하는 높은 지위의 힘 있는 신분'이라는 뜻을 가진 아랍의 고어 'Amir-al-ma', 'Am ir-al', 'Amiral'에서 연유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후 근대 유럽 국가들이 군사 조직의 기반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해군 지휘관을 'Admiral'로 호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육군과 수군 지휘관의 호칭이 특별한 구별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제독'이라는 호칭은 주요한 성(成)의 수륙양군을 통솔하는 최고위 군사지휘관을 뜻하는 직함으로 사용되었고 해군 지휘관만을 특정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1875년 청나라가 서구 열강들을 따라 4개의 함대를 창설하면서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의미가 강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청ㆍ일전쟁 당시 청나라 북양함대의 사령관이었던 정여창의 공식 직함은 '통령북양수사기명제독천진진총병(統領北洋水師記名提督天津鎭總兵)'이었고, 통칭 '수사제독(水師提督)'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후 영어에서 해군 지휘관을 의미하는 'Admiral'이라는 단어를 번역하면서 청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이라는 말을 참조해, '제독'이라는 어휘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장군'과 '제독'이라는 말의 차이에 대해 이해가 되셨나요? 그럼 충무공 이순신은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까요?
충무공 이순신은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에 들어섭니다. 당시의 무과에는 수군과 육군의 구분이 없었고,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기 전까지 조산보만호, 정읍현감 등 육상에서 대부분의 직위를 역임합니다.
따라서 이떄까지는 충무공 이순신은 육군 지휘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관으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능력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는 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근무할 때부터입니다. 왜군의 침략 가능성을 예견한 충무공은 전라좌수사 부임 후 예하 부대의 전비태세를 가다듬고 해안기지와 병장기를 재정비합니다. * 임진왜란 중 큰 활약을 하게 되는 거북선도 이 때 건조되었습니다.
(* : 거북선은 이미 조선초기부터 기록에 등장합니다.
태조실록에는 귀선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고, 태종때의 기록에는 거북선의 모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이후 중간중간에도 거북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후로 서서히 그 숫자가 줄어들다가 정조대왕 무렵에는 거의 사라지고 맙니다.)
남해 충렬사와 이순신 장군의 가묘
첨망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남해 충렬사로 갔습니다.새로울 것이 없지만 남해 충렬사는 시댁가는 길목에 있기에 늘 그자리에서 우리를 반겨주는 듯 하기에 좋습니다.
남해충렬사는 규모가 통영 충렬사 등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1973년 6월 11일,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이충무공묘비와 사우 그리고 충무공비와 충민공비, 내삼문, 외삼문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청해루와 장군의 가묘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참배 시간을 가졌으며, 격군님의 설명이 시작되었는데 일반 참배객도 격군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격군님의 설명은 일품입니다.
마음속으로 저 많은 년도와 사람 이름을 작은 머리에 어떻게 저장하나 싶데요.
내삼문을 들어서면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새겨진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안에는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 廟碑(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가 있는데 큰 비석에 깨알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으로 가장 먼저 충무공을 기려 세운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는데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습니다.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고 했는데, 충렬사 사당 양쪽으로 충무공비와 땅에 묻었다는 충민공비가 있습니다.
충민공비는1633년(인조 11년)에 남해현령 이정건이 세운 것으로 1793년(정조 17년) 충무공의 5대손으로 호남절도사로 있던 이명상(李命祥)에 의해 이충무공비(李忠武公碑)로 고쳐 세우고 충민공비는 매몰되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7월 매몰되었던 충민공비를 후일 참고하기 위하여 다시 복원하여 본당 좌우에 충무공비와 나란히 세우게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한국 금석문 참고 :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
남해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3일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고금도를 거쳐 12월 중순경 아산에 도착, 1599년 2월에 정식 발상하여 11일 안장, 금성산에 안장되었다가 1614년 현재의 어라산 묘소에 안장되었습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묘 뒤의 나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 히말리야시다입니다.
남해대교가 보이며, 충렬사 앞 바다에는 거북선이 있는데 승선이 불가하더군요.
해군사관학교에서 기증한 거북선을 관람료를 받았기에 남해에 수 없이 갔지만 거북선 내부는 모르는데, 아마 다른 일반 거북선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원거북선은 부두 계류 거북선과 육상 전시 거북선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두 계류 거북선으로는 남해 충렬사 앞 거북선, 여수 돌산대교 아래, 통영 강구안 병선마당(3), 진해 해사 박물관 앞, 거제 옥포항에 있으며, 육상 전시 거북선은 거제 지세포항, 당항포관광단지, 사천 삼천포대교공원, 여수 이순신광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승선불가 안내문에는 노후함으로 관람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승선이 불가하다고 했는데 세월호 참사후 안전 점검 결과 관람 제한을 판정받았다고 합니다.
점심식사는 사천의 오복식당에서 해산물 정식으로 했으며, 팥빙수 타임은 경상우수사님이 계산하였고 남해의 석식은 남해회원에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남해대교가 보이는 2층 횟집이었으며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배불리 잘 먹었습니다.
돌아 오는 길, 사천회원이 준비해준 간식을 챙겼으며, 가는 길엔 진해의 동자갑선님이 회원들의 간식을 챙겨주었습니다.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든든했으며, 저는 신호님의 차를 탔기에 산인에서 격군님 차로 이동했습니다.
멀지는 않지만 워낙 빠듯한 일정이었기에 운전하신 분들 수고 많았으며, 비까지 내려 더 고생했을 텐데 덕분에 행복한 답사가 되었습니다.^^
'마음 나누기 > 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지 가다 - 통영 충렬사 / 길 위의 인문학(마산도서관) (0) | 2014.07.14 |
---|---|
합포해전지를 정의해준 창원시 땡큐~/진해 3대 해전지 소개비 (1) | 2014.07.10 |
이순신 골든벨 예상문제, 여러분은 어디까지 (0) | 2014.04.28 |
최고 단감 푸르뫼와 금촌농원 우인호 (0) | 2013.11.11 |
창원 동판저수지, 가을을 공유하고픈 그곳에는 (0) | 2013.1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