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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합포해전지를 정의해준 창원시 땡큐~/진해 3대 해전지 소개비

by 실비단안개 201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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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흐리다 비, 억수비, 다시 흐리다 비 반복

 

장마며 태풍 너구리가 온다고 하니 텃밭일을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텃밭일을 쉰다고 하루를 쉬는 게 아니며 뭔가를 끊임없이 꼼지락 거리는 성격이기에 임진왜란 진해 3대 해전지 소개비 확인을 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비옷에 우산, 장화를 신고 약간의 간식도 챙겼습니다.^^

 

◀ 붉은색 테두리 파란별이 해전비가 있는 장소입니다.

 

임진왜란 진해 3대 해전은 안골포해전, 웅포해전, 합포해전이며, 해전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승첩비보다는 격이 낮지만 해전지 소개비가 세워졌다기에 확인을 해야 합니다.

 

처음 간 곳은 안골입니다.

안골엔 무궁화 공원이 있기에 무궁화 공원부터 갔으며 무궁화 공원에서 얼라아부지가 안골포 해전비 저기 있네 하는 쪽으로 보니 무궁화 공원 입구에 안골포해전 소개비가 있었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안골포는 경상남도 진해시 웅동동에 있었던 포구라고 하는데 지금도 있는 포구죠.

 

안골포 해전과 해전비

남해연안에 위치하여 있으며, 석성(石城)으로 둘러싸여 있는 수군(水軍)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안골포 석성의 둘레는 1,714척(尺)이며, 성 안에 시내가 있고 우물이 하나 있었다. 수군만호가 한 사람 있었으며, 제포진(薺浦鎭)에 있었던 우도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의 관할 하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웅천현(熊川縣)에 속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1592년(선조 25) 7월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한산도에서 왜선을 격파한 뒤 그들을 구원하러 오는 원군을 이곳에서 격퇴하였다.
1908년경상남도 창원군 웅동면에 속하였다가, 1910년에는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창원군에 속하였다가, 1980년창원이 시로 승격되면서 의창군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83년의창군 웅동면진해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웅동만을 중심으로 동쪽에 안골동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웅동만의 서쪽은 남산에 웅천왜성이 남아 있고 그 남쪽으로 신항만 건설을 위한 매립공사가 진행 중이며, 남쪽으로는 부산신항만이 건설되고 있어 안골대교웅천대교가 가로놓인 좁은 수로가 되어 있다.(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517)

 

▲ 2010년 11월 안골포 풍경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의 승리를 총칭하여 한산대첩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에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왜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왜란이 발발한 그해 7월 8일 이순신원균이억기 등과 합세해 한산 섬 앞 바다에서 왜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수군장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제2의 수군 주력대였다.
그러나 포구의 지세가 얕아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왜병들은 험고한 곳에 의지한 채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이 계획을 변경, 여러 장수들에게 번갈아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왜선을 공격토록 하자 마침내 왜병들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춰 이억기의 함대가 달려와 합세하면서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왜병들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 가면서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대다수의 배를 잃고 25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달아난 왜병들이 밤중에 바다로 나올 것을 예측, 왜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날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해전과 함께 왜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빛나는 해전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이어 패한 왜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로써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 주저앉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구키 요시타카는 자신의 어립선에 날아온 대장군전이 인상적이었는지 소중히 보관해서 종전 후 귀국했고, 이는 지금도 일본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출처 : http://mirror.enha.kr/wiki/%EC%95%88%EA%B3%A8%ED%8F%AC%ED%95%B4%EC%A0%84)

최종 확인 버전:

 

안골포 해전비입니다.

창원시의 생색 보이시죠?

여수와 통영 등 기타 이순신 장군이 활약한 도시의 시민들은 자긍심이 대단한데 진해의 경우 안골포, 웅포, 합포해전이 있었으며 해군의 본고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 기념비 이런 게 없었는데 2014년 2월 10일 해전 소개비를 건립하면서 해전보다 창원시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차지않지만 그래도 고마운 마음을 조금은 가지는데, 안골포 해전비는 무궁화 공원 입구에 있습니다.

 

3대해전지 소개비는 둥근 1층 기단위에 있으며, 글쓴이, 건립날짜 등은 없고 단지 해전 소개만 있으며, 창원시 홈페이지 등에도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창원시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하여 한 사람 걸쳐 안내를 받을 수 있었는데 소개비를 세운 날짜는 (일괄)2014년 2월 10일이라고 합니다.

 

 

 

안골포 해전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7월 10일 (음) 조선 수군함대가 창원(진해구)안골포에 있던 일본의 정애 수군 함대 42척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안골포 선창에는 도요토미 직속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끈 정예수군 총42척(대선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정박해 있었다. 거제 칠천도에 머물던 총 58척의 조선 수군은 7월 10일 새벽에 출전하여 전라좌수군이 선두에서 전진하고 경상우수군이 그 뒤를 따르며 전라우수군은 외곽 경계를 하다가 공격할 때 합류하도록 하였다.

조선 수군은 여러 번 유인작전을 펼쳤지만 일본 수군은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수군은 일종의 장사진을 구성하여 공격하였다. 그결과 조선 수군은 1척의 피해도 없이 적의 대선 20여 척을 분멸시켰다. 이때 적선을 모두 없애지 않은 것은 육지로 올라간 일본군이 우리 백성들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들의 퇴로를 보장한 것이었다.

한산도해전에 이어 일본의 정예수군을 안골포에서 연파함으로써 한산대첩의 한 축을 이룬 해전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안골에는 안골왜성과 굴강이 남아 있으며, 안골포 해전비 확인시 비가 많이 내렸지만 안골포에선 아낙들이 조개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웅포 해전과 해전비

 

1593년 2월 10일부터 무려 1개월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왜 수군 간의 1주일간 의 해전이자, 사상 최초로 이순신 상륙전을 전개했던 전투입니다.

웅포해전은 8대 해전중 최장기전으로 무려 1개월간 계속 되었는데 2월 10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6일의 7회에 걸친 맹공이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웅포 해전지는 진해 웅천동 남산(웅천왜성)과 흰돌메 공원 사이의 바다(현재의 와성만)로 지금은 부분 매립이 되었으며, 부산신항 제2배후도로와 다리(남문교)공사중이기에 당시와 지형이 다를 수 있습니다.

 

* 해전비를 세운 날이 웅포 해전날입니다.

 

 

▲ 웅포 해전지와 웅천왜성이 있는 남산

 

웅포 해전 소개비는 흰돌메공원에서 와성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데 정확한 위치는 전화로 웅포해전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흰돌메공원에서 웅천쪽으로 4~50m 가다보면 도로 왼편에 해전비가 있으며 자동차 몇 대 주차가 가능하며 와성만을 사이에 두고 남산이 있습니다.

 

 

웅포 해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쯤 지난 1593년 2월부터 3월초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지금의 창원(진해구) 웅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조선 수군이 공격하여 승리한 해전이다. 

1593년 1월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라는 조정의 지시를 받은 조선 수군은 80여 쳑의 전서으로 부산 쪽으로 가던 도중 웅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발견하였다.

조선 수군은 2월 10일(음), 12일, 18일, 20일 4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지만 적은 표구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수군은 유인작전을 포기하고 2월 22일 단독으로 상륙작전을 겸한 총 공세를 펼쳤다. 

의승병들과 사부들을 태운 10여척의 전선을 동으로는 안골포에, 서로는 제포에 상륙시켜 공격하였다. 적세가 분산될 때 전선 15척을 웅포를 향해 돌격시켜 총통을 쏘아 적선을 반이나 쳐부수고 수많은 적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후 2월 28일과 3월 6일에도 산기슭의 적 진지에 포탄과 비격진천뢰를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 해전은 일본군의 서진 의지를 좌절시킨 의미가 컸으며, 7차례 해전에서 각기 다른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 특징이다.

 

 

합포 해전과 해전비

 

합포 해전은 합포 해전의 중요성보다 지리적 위치에 관심이 더 가는 해전지입니다.

제가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 카페 가입 동기가 합포 해전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파 가입했습니다.

합포해전지는 저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이들 헷갈리게 하는데 창원시가 세운 소개비가 정의를 해주었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2012년 봄, 창동오동동 이야기 추억여행시 창원시립 마산박물관 관람시 임진왜란 합포해전지를 진해 합포(합계, 학개, 합포)가 아닌 마산 합포(만)를 이야기 하는 듯했습니다.

 

▲ 마산시립박물관에서

 

마산박물관 관람 이전에 진해탐방 공부시간에 합포 해전에 대해 배웠으며, 마산박물관 관람 후 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합포 해전지를 확인한 결과 마산포가 아닌 웅천(진해) 합포였기에 정확한 학습이 필요했습니다.

 

진해 충무공 리더십센터 지도

 

이배사 가입후 합포 해전지 질문에 격군(현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 당시 충무공리더십센터 교수)님의 답입니다.

이순신의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계본'에 보면 합포해전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하오 4시쯤 '멀지 않은 바다에 또 왜대선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따라 쫓아서 웅천땅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는지라 사도첨사 김완이 왜대선 1척을...(중략)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밤을 지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웅천땅 합포'라고 하였다. 웅천땅은 오늘날 어디인가? 바로 진해이다.

그럼 오늘날 진해구 중 합포라는 지명은 어디에 있는가? 행암 학개마을이 바로 합포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합포해전지를 현재의 마산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웅천땅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무조건 합포하면 마산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전을 보지 않고 막연히 합포라는 생각만 가지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은상선생이 합포를 오늘날 마산으로 비정해 놓았던 이유도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마산 합포라고 주장하는 곳은 임진왜란 당시 창원땅 마산포라고 불렀다.

이배사 방진님의 이순신전적지답사기-13. 합포해전, 해전지를 찾아라, 진해 편 부분입니다.

진해 합포인가? 마산 합포인가?

마산 합포라는 주장은 조성도(趙成都 譯)의 임진장초(壬辰狀草) p. 44에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라 한 것과, 이은상(李殷相)의「완역 이충무공전서」에, 그리고 이봉수의「이순신이 싸운 바다」p33의 내용이다. 이유는 동여도(東輿圖)에 나타난 현재의 마산 일대에는 합포, 월영대, 마산포 등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창원땅 합포(또는 마산포)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백과사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합포해전지를 소개하고 있다. “해전이 일어난 합포는 지금의 마산이 아니라 진해(鎭海)라는 설도 있지만 합포는 지금의 마산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민웅(李敏雄)의「임진왜란해전사」p81에서는 임진장초의 웅천땅 합포는 현재 진해시에 있는 합포라고 주장한다. 격군 제장명교수님도 저를 진해 합포로 안내하신 것으로 보아 역시 같은 주장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이 나서서 분명히 정리해야 할 부분이다. 그래야 이순신도 고개를 끄떡이시며 긍정의 눈빛을 보내시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순신의「임진장초(趙成都)」를 중심으로 합포해전(合浦海戰), 그 날의 출전과 해전상황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합포해전은 이순신의 제1차 출전 즉 옥포해전(5월7일), 합포해전(5월7일), 적진포해전(5월8일) 중 두 번 째 해전이다.

 

1592년 5월10일, 啓本·玉浦破倭兵狀,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계본이다.

“그런데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 멀지않은 바다에 또 왜대선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쫓아서 웅천땅 합포(合浦)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왜대선 1척을,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왜대선 1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1척을 그 부 소속으로 방답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가 왜소선 1척을, 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 송희립(宋希立), 김효성(金孝誠), 이설(李渫) 등이 힘을 합하여 활을 쏘아 왜대선 1척을 모두 남김없이 깨트려서 불사르고,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藍浦, 창원시 구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사실 이순신은 첫 번째 전투인 옥포해전이 끝난 후 연합군을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밤을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탐망하던 우리 척후선으로부터 왜적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단 한 척이라도, 단 놈이라도 그대로 살려둘 수 없다. 휴식은커녕 즉시 추격전에 나서니 왜놈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웅천땅 합포만에 이르렀다. 더 이상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왜놈들은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서 나무 뒤에 숨어 조총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미 왜놈의 전선 5척은 불타버리고 말았다.

* 잡안개 덮을개 젖개처럼 갯벌이 있는 갯가는 사투리로 '개'를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한문으로 옮길때는 浦(포)로 표기하게 됩니다.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1차 해전을 승리하고 이어서 그날 오후에 다시 2차 해전을 벌인 곳이 합포며, 합포해전후 하룻밤을 보낸 곳이 남포고 이튿날 적진포 해전이 있었습니다.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 이 이틀간의 해전을 '조선수군의 제 1차 출전'이라고 합니다.

 

"이튿날(5월8일) 아침에 피난민들로부터 '진해땅 고리량에 일본군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는 즉시 출전했으며, 조선함대가 저도(돼지섬)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 척후선으로부터 '일본선 대·중·소선 13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선봉함대가 적진포에 도착했을 때 일본 전선들은 아무런 경계 없이 모두 포구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군사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함대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모두 산 위로 도망쳐 버렸는데, 그리하여 조선 수군들은 일본의 빈 전선들을 모두 격침시켰는데 이로써 세 번째 전투인 적진포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참고 : 이배사 임진년 조선수군의 제1, 2차출전)

 

사전들은 합포해전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사전 검색을 했습니다.

 

제가 신뢰하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합포해전입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5월에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조선수군이 합포에서 왜선을 무찌른 해전.

 

[내용]

1592년(선조 25) 5월 4일 처녀출전한 이순신원균(元均)과 합세하여 7일 옥포(玉浦)에서 왜선을 무찌른 뒤에 영등포(永登浦) 앞바다로 이동, 적을 경계하면서 휴식준비를 하던 중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왜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斥候將)의 급보를 받고 곧 추격작전을 벌여 합포해전이 전개되었다.

이 때 세력이 약한 왜선들은 황급히 합포(지금의 마산시 산호 2동 앞바다)로 도주하여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 조총으로 대응하였고, 이순신의 지시에 따른 우척후장 김완(金浣), 중위장 이순신(李純信), 중부장 어영담(魚泳譚)을 비롯한 장령들이 총통과 화살로써 5척을 모두 불태워버렸으나 왜병들은 다 잡지 못하고 밤중에 남포(藍浦) 앞바다로 이동하였다. 이 해전은 불과 5척의 왜선을 상대한 것이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376)

마산 산호2동 앞바다라고 하는데 집필자는 임진장초(壬辰狀草) 저자  조성도趙成都 입니다.

브리태니커에선 옥포대첩에 숟가락을 올린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합포가 어디라고는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옥포해전

(부분)

옥포에서 승리한 뒤 거제도의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결집하여 밤을 새우려고 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일본군 대형선 5척이 지나간다는 급보를 듣고 출동했다. 조선 수군의 추격을 받고 달아나던 일본군은 합포바다에 이르자 육지로 올라가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는 사정거리 밖에서 정세를 살피다가, 배를 몰아 포구 안으로 들어가 일제히 급습했다. 우척후장 김완(金浣), 중위장 이순신(李純信), 중부장 어영담(魚泳潭) 등이 일본군의 대형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분파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합포해전). 그뒤 남포(藍浦)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다가 고리량(古里梁)에 일본함선이 있다는 정보에 접하고 적진포 앞바다로 향했다.→ 적진포해전(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6a1758a)

한국어 위키백과는 합포해전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해전목록(http://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_%ED%95%B4%EC%A0%84_%EB%AA%A9%EB%A1%9D)'을 보면,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일(토요일) 마산도서관의 '길위의 인문학', 7월 한산도대첩지 답사를 가는데 강의를 이봉수 님이 했으며, 답사 안내도 이봉수님이 하리라 생각하는데 2014년 4월 17일 경남신문 기사를 보면 여전히 "옥포에서 이긴 이순신 함대는 지금의 마산인 합포로 쳐들어가 왜군 함선 5척을 불사르고 그날 밤 구산면 반도 끝에 있는 남포로 내려가서 하룻밤 정박한 뒤, 다음날 경남 고성에 있는 적진포로 내달려 왜군 함선 11척을 격파했다. 이 모두는 임란 개전 초기에 기선을 제압한 쾌거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리운 이름 이순신 -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교수님들과 백과사전이 정의를 내리지 못 한 합포 해전지를 창원시가 정의해 주었으니 비의 크기와 정성에 상관없이 감사합니다만 아쉬움은 그대로입니다.

 

▲ 합포만

 

합포님과 통화시 합포 해전비는 마을에 주차를 한 후 산쪽으로 100~200m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닷가에 주차를 한 후 주변을 살피니 예전에 보지못한 나무계단이 있었으며 전망대가 있다는 안내가 있었기에 나무계단을 올랐습니다.

높고 멀었지만 합포님이 1~200m 거리라고 했으니 나무데크끝에 합포 해전비가 있겠지하며 끝까지 갔지만 없었기에 되돌아 나왔습니다.

주변에 천남성이 많았으며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합포만은 고요했습니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도로와 차량집입이 불가능한 두 길이 있었는데 입은 뒀다 뭐하나 싶어  마을 장어구이집에 들려 해전비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알려주더군요.

마을뒤로 걸어갈 수 있으며, 차량으로 갈 수 있다는 답이었습니다.

 

합포 해전비는 웅천(웅포 해전비) → 삼포 → 명동 → stx → 수치마을 → 학개(합계, 합포)마을에서 행암쪽으로, 차량통행이 가능한 도로변에 있었으며 역시 몇 대의 차량 주차가 가능했습니다.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행암에서 합포마을로 가는 방향을 잡아 해전비를 찍었는데 누구나 쉽게 접근할수록 창원시에서 도로 이정표에 해전지 내지 해전비를 표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해전비 건립이 생색내기용이 아니라면.

 

 

합포 해전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두 번째 해전으로 1592년 5월 7일(음) 저녁 무렵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마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1592년 5월 7일 오후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판옥선 24척)과 원균이 이끈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옥포해전에서 적선 26척을 분멸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오후 4시쯤 왜선 5척(대선4, 소선1)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를 받았다.

이에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군들은 출전하여 웅천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켰다.

세부 전공을 보면 사도첨사 김완과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이영담이 각각 대선 1척씩을, 전 첨사 이응화가 소선 1척을, 이순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 송희립, 김효성, 이설 등이 힘을 합해 대선 1척을 분멸시켰다.

합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에서 두번째로 벌어진 해전이며 현재의 창원(진해구)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이다. 당시 육전에서 연패를 당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을 맞은 시점에서 해전 승리를 통해 임진왜란 극복의 자신감을 수군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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