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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누구·어디에 헌납獻納?

by 실비단안개 201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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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큰아이와 아이의 친구와 일찍 광화문쪽으로 나갔습니다.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조선시대 궁궐을 처음 접하는 기회이기에 설레임이 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 처음 가거나 광화문 광장에 가지 않은 이라도 그곳에는 매일 집회가 이어지다시피 하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는 걸 압니다.

여러 곳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봤음니다만 서울 광화문 광장의 동상을 대하는 마음은 다른 날과 같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동상이라 그랬을 겁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분수의 물줄기가 솟을때를 기다려 같은 장면을 또 찍고, 동상과 함께  인증샷도 찍었습니다.

그리곤 언론에서 다루어졌으며 끊임없는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조금씩 다가갔습니다. 여러 논란중 가장 중심은 오른손에 든 칼입니다.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은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기 때문입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배경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 있어 남쪽 일본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들어오게 되는데, 이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던 당시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을 배경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국가의 심장부로 통하는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지킴이의 의미를 지닐 선열조상의 인물로서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동상은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였던 고 김세중선생에 의해 설계, 제작되어 정부의 산하 단체였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으로 1968년 4월27일 건립되었으며, 몇 십년 이어져오는 논란에 대한 답이랄까, 여러 의문은 기념사업회의 제작 배경(충무공 이순신장군상)과 거론되는 질문들에 대하여나와 있습니다.

 

 

▲ 논란중 하나인 누워 있는 북

 

 

이순신 장군 동상 뒷부분입니다.

(알고 있는)모든 동상은 옆부분이나 뒷편에 간략한 안내, 약력 등이 있으며, 관계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이어 아래에 동상에 관계한 이와 단체가 새겨져 있는데 맨 위에 '박정희 헌납'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헌납, 많이 들어 본 단어입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후보의 재산 헌납'이 있으며, '아베 총리 야스쿠니 공물헌납' 소식이 뜨겁습니다.

다음 사전에서 헌납 [獻納]을 검색했습니다.

헌납 [獻納]

[명사]돈이나 물품 따위를 바침.

[자동사](돈이나 물품 따위가 사람이나 단체에)공손히 바쳐지다.

[타동사](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 돈이나 물품 따위를)공손히 주거나 내다.

박정희는 누구에게 이순신 장군 동상을 헌납한 것일까요? 대통령 박정희가 아닌 개인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 동상'을 헌납했다면 대상은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나 국가 정도일 텐데, 그렇다면 이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비를 털어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요?

아래에'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 건립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헌납이라고 썼을까요.
한번은 꼭 우러러보고 싶었던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은 의문만 더했습니다.

 

 

▲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뒷부분

 

참고로 이순신 장군 동상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해 북원로터리 이순신 장군 동상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윤효중尹孝重 작)은 조국 6.25 동란의 참화속에서 모든 고난의 투쟁을 거듭하고 있던 때 세워졌으며, 한국 최초(1952년 4월 13일)로 세워진 동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군은 칼을 바로 세워 두손으로 잡고 있으며, 동상 뒷편의 글은 이은상 선생이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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