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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숨은 문화재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와 동아일보 사옥

by 실비단안개 201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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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몸이라면 사방을 돌며 야무지게 둘러봤을 텐데 얼라들과 함께 다니다보니 아이들 배 고플까 걱정, 목 마를까 걱정, 지칠까 걱정...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며, 저 또한 마음껏 누리지를 못 했기에 다음에 다시 서울을 방문하마 하고 왔는데 그것 또한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광화문 주변을 하루에 다 둘러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여 보이는 것만 봐야 했으며 그것도 한 번의 관람이나 구경으로 글로 기록한다는 일은 무리지만, 서울 사람이라고 하여 광화문 광장에 대하여 숨은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는 그야말로 로또같은 존재였었는데,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단청이 아름다운 정자같은 건물이 보였기에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세종대왕 동상이 있으며, 이 도로명은 세종대로며 높은 빌딩이 많았는데 kt,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있었으며, 비각은 사찰의 종각 크기 정도였습니다.

 

 

 

광무 6년인 1902년 건립되었으며, 서울시 사적 제171호로 지정·등록(1969.07.18)되어 있는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입니다.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습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로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사람의 평균수명과 비교하면 많이 짧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환갑도 남사스럽다고 하여 잔치를 않는다고 할 정도로 평균수명이 길며, 시골의 경노당에서는 70대도 청년 취급을 받아 청소 등 잡다한 일을 해야 하기에 70대 노인들은 경노당 가기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 시골을 봐도 그렇습니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은 20세기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합니다.(碑감상과 참고 :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3,01710000,11)

 

 

 

 

돌거북 위에 세워진 비석의 앞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소'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글씨를 썼고 비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비각에 기념비전이라는 현판을 달아 비각보다 격을 높였다고 합니다.

광복 후 1954년에 비각을 보수하면서, 일본인에게 팔렸던 돌로 된 만세문과 담장을 찾아다가 일부를 복원하였고, 1979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옛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비각은 기품이 당당하며 겹처마로 39개의 성서스러운 석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이 문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떼어 가서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했다고 합니다.
 

 

만세문 앞쪽에는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무는 심어야 하지만 조망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벨 수 있는데, 지금 만세문앞의 소나무는 베어졌습니다.

 

 

칭경기념비와 가까운 곳에 동아일보 사옥(東亞日報 社屋)이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큰신뢰를 하지 않지만 동아일보 옛사옥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보니 관심이 갔는데, 이 건물은 1926년에 지어졌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1호(2001.04.06)입니다.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은 1926년에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3층 건물이었으나 후에 고쳐 지어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로 내부는 기념관으로 사용하면서 상당 부분 본래의 모습이 없어졌으나 외부의 모습은 잘 남아 있는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언론사 건물로서 1992년까지 이곳에서 신문을 발행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동아일보가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해야 한다.”는 동아일보 창간자인 김성수 선생의 뜻에 따라 이곳에 자리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약력을 보면, 1929년 2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으며, 1932년 3월에는 교육구국의 이념으로 1905년 설립 이래 계속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맞섰습니다.

1935년부터 8·15해방이 되기까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학교 도서관에 비장할 고서(古書)와 박물관에 진열할 골동품 수집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은 우리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고 합니다.(참고 :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310000,11)

 

그런데 김성수는 뉴라이트 교과서에서는 김성수를 항일 인사로 미화했지만, 친일로 분류되는데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1943년 4월2일 '경성일보' 4면 기사와 같은날 '매일신보' 3면의 기사를 통해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의 친일 행동을 (2013년 9월)5일 공개했습니다.

경성일보1943년 4월 2일(조간),『매일신보』1943년 4월 2일(조간)자에 '보성전문학교장 김성수씨는 16년 전부터 자택의 철문 3개를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 달라고 해군무관부에 헌납하고, 마차 1대의 놋쇠와 동제 식기류도 개인 자격으로 동시에 헌납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추가조사 과정에서 발굴한 기사"라며 "김성수의 친일이 결코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고 말했습니다.

법원 역시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친일 인사가 맞다고 대부분 인정했습니다.

 

법원, 인촌 김성수 친일행위 대부분 인정 2011.10.20 | 경향신문 |

 

 

김성수의 친일· 항일을 떠나 이 건물이 있는 광화문 네거리는 서울의 도심부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이며, 이 건물은 192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의 변화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일민미술관 간판을 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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