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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효행박물관이 있는 화성 용주사 가을풍경

by 실비단안개 2014.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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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숲을 나온 우리는 효행로를 달려 효행박물관이 있는 용주사로 갔습니다.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으며, 2005년 1월 28일 효행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참고 : 용주사 http://www.yongjoosa.or.kr/)

- 용주사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노랗고 붉은 단풍이 당연히 먼저 눈에 들어 오는데 효행박물관이 있는 용주사 단풍은 은은했습니다.

시간이 이미 오후 4시 반을 넘고 있기에 용주사 전체를 관람하기에는 무리였기에 우리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용주사 마당을 걸었습니다.

홍살문입니다.

1920년대로 추정되는 용주사 옛사진과 홍살문 설명이 있었습니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원·묘·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문입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며,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황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황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는데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었다 2008년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홍살문 왼쪽에는 정조의 효행 사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행박물관이 있습니다.

 

 

 

용주사에는 국보 120호인 범종이 있습니다.

 

범종은 사원건물에서 쓰는 종을 가르키며,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하여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범종의 소리는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국보 120호인 범종은 범종각에 있으며,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또 다른 커다란 범종이 있는데 범종의 네면에는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습니다.

1985년 조성된 이 범종은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불음각에 단풍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이 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킵니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 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으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입니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입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됩니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부모은중경탑입니다.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님의 넓고 높은 은혜를 설명한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용주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정조는 단원 김홍도를 이곳에 보내어 용주사를 중창하는 일을 담담하게 하였는데, 용주사에 남아 있는 김홍도의 손길 중 하나가 부모님 은혜의 높고 깊음을 설법하고 있는 부모은중경이라는 불교경전을 그림으로 그린 부모은중경판입니다. 이 부모은중경판을 그리기 전에 정조는 김홍도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하게 한 후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하니 가히 정조의 효심은 지극한 정성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은중경은 부모님의 은혜의 높고 넓음을 가르치고, 이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은중경은 유교가 성행하던 조선 시대에 널리 읽혔으며,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10가지 큰 은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모은중경탑 부모은혜 열 가지
첫째, 아이를 배어서 지키고 보호해주신 은혜
둘째, 해산함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쓴 건 삼키고 단것은 밷어 먹여준 은혜
다섯째,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신 은혜
여섯째, 젖 먹이고 사랑으로 길러 주신 은혜
일곱째, 목욕세탁 더러움을 씻어 주신 은혜
여덟째, 멀리 떠나가면 근심 걱정하신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는 모진 일 하신 은혜
열번째, 임종 때도 자식을 위해 근신하신 은혜

부모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은혜를 잊고 지내는 날이 더 많습니다.

저도 요즘은 전과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매일 부모님을 뵙지 않는 데 이 글을 계기로 마음을 다잡아 볼까 합니다.

 

 

천보루 마당의 단풍아래를 사람들은 거닐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습니다.

요란한 단풍놀이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이런 여유를 가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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