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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김달진 문학관

김달진 생가, 새옷 입었지만 찜찜

by 실비단안개 201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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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2일, 지인과 진해군항탐방후 동행한 분이 소사의 빈집이 보고 싶다고 하여 함께 김달진 문학관으로 갔습니다.

문학관에 가면 소사 마을 소식을 들을 수 있거든요.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김달진 생가로 갔더니 그때까지 문학제 시는 마당에서 펄럭였는데, 생가 보수공사중이었기에 방해가 될까봐 조심히 잠시 둘러보고 왔습니다.

김달진 시인은 우리고장에서 태어났으며, 시인이며 한학자, 교육자입니다.

 

 

 

은행잎이 단풍들고 감나무의 감이 막 다 익어 제법 그림이 될 때 공사람.

 

 

공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안내를 보니 작은공사는 아닌듯 했습니다.

김달진 시인 생가가 복원된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일반 가정집도 2~3년이면 페인트칠 등 부분 보수공사를 하는데, 시인의 생가는 그동안 이엉잇기와 대문 보수공사만 했는데 '공사안내'를 보니 큰탈이 난 모양입니다.

 

 

토요일 의원에 다녀오는 길에 김달진 문학관에 가야지 생각하며 카메라까지 챙겼지만 의원을 나와 처방약을 지은후 마음이 바뀌어 택시로 집에 왔기에 다음날인 일요일, 가장 추운날 얼라아부지와 함께 김달진 문학관으로 갔습니다.

박배덕 갤러리의 솟대는 더 높아진 듯 하며, 어느 집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시골에 살지만 저녁무렵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오랜만에 봤기에 반가웠습니다.

 

 

보수공사가 끝났습니다.

지붕이 새옷을 입었으며 대문도 새단장을 했고, 시인의 생가 안내표지판도 바뀌었습니다.

 

 

안내표지판에 안내글은 흰색이라 잘 보였지만 생가와 문학관은 흐릿하게 그려졌으며, 아래의 영어 안내문도 흐릿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예전의 찌그러진 안내표지판보다는 나았습니다.

김달진 생가 안내 글인데 창원시가 아닌 '진해시'로 되어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진해시 웅동

이 집은 월하 김달진 시인의 1907년 2월 4일 태어나 자란 생가이다.시인은 1920년 이곳 계광학교를 마친 뒤, 서울과 향리에서 수학하다 출가하여, 1934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득도(得道)하였고, 1939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시인은 1929년 「문예공론」에 <잡영수곡(雜泳數曲)>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서정주, 오창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부터 광복 조국을 기다리며 북간도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뒤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 <죽순> 동인으로 서울과 대구에서 활동한 시인은 1948년 향리로 돌아와 진해중학교, 해군사관학교, 남면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2년부터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역경사업(譯經事業)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고승들의 문집번역 뿐만 아니라 불교저술에 힘써 불교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0년 첫 시집 「청시(靑枾)」와 1984년 시선집 「올빼미의 노래」를 포함하여 시인이 남긴 방대한 저술은 1997년부터 「김달진전집 」열 아홉권에 담겨 나오고 있다.

무욕(無慾)과 탈속(脫俗)의 경지에 다다른 시인이며,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고승이었을 뿐 아니라, 향리의 존경받는 교육자였던 시인은 1989년 6월 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1990년부터 <김달진문학상>이 서울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1991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부터는 <김달진문학제>가 진해에서 개최되어 시인의 문학과 삶을 기리고 있다.

1997. 9. 28

 

김달진 생가에는 대문이 두 개 있는데, 두 군데 다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대문은 싸릿대와 잡목으로 세워져 대나무로 고정을 시켰는데, 이 대문은 보통 지붕의 이엉을 교체할 때 함께 보수공사를 합니다. 

 

 

생가에는 정침, 아래채, 도장, 작은집, 뒷간이 있는데 정침, 도장, 뒷간만 이엉잇기를 했는데 나머지는 지난해 봄에 이엉잇기를 하여 지금 이엉잇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학예사님이 말씀했습니다.

이엉은 볏짚이 아닌 갈대를 쪄서 이엉처럼 엮어 이엉잇기를 하는데, 갈대가 볏짚보다 강하기에 쪄 잘 휘어지게 했는데 이렇게 한 번 이엉잇기를 하면 4~5년은 버틴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봄에 이엉잇기를 한 지붕과 새로운 지붕의 색깔이 달라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정침이라고 칭한 안채입니다.

 

 

아래채와 작은집은 이엉잇기를 하지 않았지만 벽은 황토로 다시 발라졌습니다.

요즘 주말과 휴일에 관람객이 많다고 했는데 이날은 워낙 추운 날씨였다보니 관람객들이 드문드문 방문했습니다.

 

 

태산목을 사이에 두고 있는 도장과 뒷간은 이엉잇기를 하여 새집같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벽을 보수했다보니 깨끗해졌습니다.

 

 

다시 안채입니다.

정지문이 교체되었으며, 서까래도 몇 교체되었는데 지붕과 마찬가지로 옛날 서까래색과 달라 마치 불량주택처럼 보였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옛날 서까래와 지붕과 같은 색깔로 변할거라고 했지만 찜찜한 건 어쩔수 없습니다.

보통 주택을 보수할 때, 벽을 다시 바르며 담장 등을 손보는 건 봤지만 집과 평생 함께하는 서까래 부분 교체는 처음 봤는데, 복원 당시 공사가 잘못된건 아닌지 의심이 갔으며 영 찜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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