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창녕]성혜림 본가 성씨고가, 구연정에 핀 배롱나무꽃

by 실비단안개 2016. 7. 29.
728x90


7월 18일

7월 17일~18일 창녕군 팸투어에 참가했습니다. 주최는 창녕군이며, 주관은 유한회사 해딴에(경남도민일보 자회사, 별도법인)였습니다.

18일 아침 식사후 간 곳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 창녕 석리 성씨고가 (昌寧 石里 成氏古家)입니다.


50여 년 동안 방치된 성씨고가는 개화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었으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갓집이라는 이유로 인해 누구하나 문화재로 지정하자고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다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난 뒤 남북해빙무드가 전개됐고  관리인을 두면서 깨끗이 정비되기 시작했으며,  2008년 람사르총회를 대비, 2006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뤄졌으며, 지금은 창녕의 보물같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창녕군 농민들의 '효자상품' 양파는 성씨고가의 성재경 선생 부친에 의해 도입됐고 이후 성재경 선생이 재배에서 채종에 이르기까지 체계화했다고 하며 한때 제 2의 교복이었던 아웃도어 노스페이스(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의 부친이 성재경 선생이며, 성씨고가는 성기학 회장의 본가입니다.




창녕 석리 성씨고가는 130여칸 이르는 한옥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데, 왕조가 정한 사대부 가택의 한계인 99칸을 훌쩍 넘어섰고, 궁궐이나 관청에나 쓰이는 두리기둥이 안채 사랑채 등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누마루를 자랑하는 아석헌(我石軒)이 가장 먼저 들어섰던 본가로 1855년경에 지었으며, 두 번째 집 석운당(石雲堂)은 1860년대, 연못을 중심으로 한 구연정(龜蓮庭)은 1890년대, 경근당(慶勤堂)은 1920년대에 지었졌다고 합니다.

최근 보수 후 현판이 바뀌었는지 전해오는 현판과 다른데요, 석운당은 석운재며, 慶勤堂은 敬勤堂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만 평 규모의 한옥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규모를 불려갔기에 전통과 격식에 꼭 맞추어 들어선 것이 아니며, 각 한옥채마다 당시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그 모양과 형식이 다르기에 시대별 한옥 변천사를 한집에서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성씨고가에는 그리 길지 않은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대규모 한옥은 한국전쟁때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최근 후손들에 의해 대부분 복원되어  보존가치가 인정돼 2004년 7월 14채 중 6채가 경남 문화재자료 355호로 지정되었으며,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성씨 고가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부인인 성혜림의 본가이기도 합니다.


성규호 선생의 증손인 유경은 일찍이 일본에서 국사관중학을 거쳐 일본 외국어전문학교를 다녔지만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신간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일제 말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했습니다. 고향에 첫째 부인과 세 딸이 있었지만, 뜻을 같이하던 김원주를 맞아 아예 딴살림을 차리고 1남2녀를 두었다. 그 두 딸이 바로 북한 현대사의 풍운과 비극의 주인공 성혜림과 그 언니 성혜랑으로 성씨 고가는 성혜랑의 본가이긴 하지만 생가는 아닌 듯 합니다. 성혜림은 유학중인 북한의 김한솔(김정일의 손자)의 친할머니며 김정남의 어머니로, 창녕 만석꾼의 딸로 가족이 월북하여 북에서 영화배우로 활동 중 김정일을 만났으며, 딸 하나가 있었지만 이혼을 하고 김정일과 동거하여 김정남을 낳았다고 합니다.


성씨 고가는 성규호 선생이 유원면 회룡에서 그곳(석문동)으로 옮긴 것은 1850년대로 그는 디귿자의 안채와 일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아석헌)' 뜻의 아호를 당호로 삼았습니다. 장남(찬영)에겐 오른쪽 담장에 잇대어 살림집(구연정)을 짓게 했고, 둘째는 왼쪽 담에 잇대어 살림집(석운재)을 내도록 했으며, 석운재 담 너머엔 찬영의 막내(낙안)가 1920년 초부터 경근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으니, 위로 옆으로 4대가 함께 사는 저택을 이뤘습니다.



▲ 구연정, 아석헌, 석운재, 경근당


휴식중인 블로거들입니다.



뜰을 비롯 건축물 또한 잘 관리되고 있었는데 창녕엔 와송이 많았는데 성시고가에도 와송이 있었으며 바닥엔 이끼도 있었고, 계절꽃이 곳곳에 피었으며 기와에 소담스레 피기도 했습니다.



고가 뒤로는 대나무숲이 있는데 여름철이다보니 모기에게 많이 물렸습니다.



대나무숲을 빠져 나오면 구연정이 있습니다. 성규호 선생의 장남(찬영)에겐 오른쪽 담장에 잇대어 살림집(구연정)을 짓게 했고, 찬영의 장남인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드넓은 전답을 경영했다고 하며, 낙문은 구연정 앞마당에 연못을 파고 별당을 짓고, 솟을대문과 솟을중문을 올리고, 연못 옆에는 동산을 쌓아 기화묘초를 심어 한옥의 전통 구조에서 일탈했다고 전합니다.

구연정 입구나 누마루앞에 돌확이 있으며 대나무숲 입구에도 '확대'라는 이름의 세숫대야가 있습니다. 수도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었던 시대에 곳곳에 무릎 높이 이상의 돌에다 둥근 모양과 복숭아 모양의 홈을 파서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것인데, 눈과 귀와 입, 손을 씻음으로 추함과 악함을 사하기 위한 상징성으로 둥근 모양은 남성전용, 복숭아 모양은 여성전용이었는데 복숭아는 또 다산을 뜻한다고 합니다.



언젠가 늦가을에 성씨 고가를 방문하여 글을 올렸는데, 당시 해설사님이 배롱나무꽃이 필 때면 연못에 핀 개구리밥과 떨어진 붉은 백일홍꽃에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입니다.

실제 구연정에는 배롱나무 분홍꽃이 피어 있었으며 배롱나무꽃은 주변의 풍경과 수목과 아주 잘 어울려 각도마다 다른 그림을 안겨 주었습니다.

구연정의 못은 우리나라 지도모양이라고 하며, 배롱나무꽃이 연못에 붉게 피기를 기대했지만 이제 막 피어나다보니 겨우 몇 송이의 점으로 떠다녔습니다.



구연정에 핀 배롱나무꽃입니다.

배롱나무의 수피는 홍자색을 띠고 매끄러워우며, 목백일홍, 간지럼나무, 자미화라고도 하며, 꽃말은 '부귀'입니다.

붉은색의 꽃이 7~9월에 원추꽃차례를 이루어 피는데, 흰꽃이 피는 흰배롱나무도 있습니다. 꽃잎은 6장이며, 수술은 많으나 가장자리의 6개는 다른 것에 비해 길며, 암술은 1개입니다. 배롱나무는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며, 빨리 성장하고 가지를 많이 만들어 쉽게 키울 수 있지만 내한성이 약해 주로 충청남도 이남에서 자랍니다. 요즘이 배롱나무꽃이 절정인 시기입니다.




붉은 배롱나무꽃이 건축물을 고급스럽게 하지만 건축물에 쉬이 다가가는 걸 허락질 않을 듯 한 자태입니다.



배롱나무 붉은꽃은 현대건축물보다 고건축물과 더 잘 어울리며 누마루와 소나무와도 잘 어울립니다.






담장밖에서 안을 향해 찍었습니다. 소나무가 멋지며 소나무 사이에 배롱나무꽃이 수줍게 앉았습니다.

늦가을의 성씨고가도 아름다웠지만 여름 풍경은 더 아름다우니, 창녕여행이 계획되어 있다면 석리 성씨고가에서 계절을 한껏 느껴보십시오.



1박 2일 팸투어 떠납니다. 이 글은 저장된 글입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