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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창녕]만옥정, 기생집인줄 알았더니 문화재 공원이었다

by 실비단안개 2016.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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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7월 17일~18일 창녕군 팸투어에 참가했습니다. 주최는 창녕군이며, 주관은 유한회사 해딴에(경남도민일보 자회사, 별도법인)였습니다.

7월 17일 마지막 일정은 만옥정공원이었습니다.

처음 팸투어일정을 받곤 만옥정이라고 하기에 기생집인줄 알았는데 현장에 가니 창녕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모아 둔 문화재공원이었습니다. 만옥정 주변으로 고분군과 석빙고, 동3층석탑이 있기도 합니다.


만옥정공원은 창녕공원이라 불리며, 약 250년 전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봄 마다 명창대회와 그네뛰기가 열렸다고 합니다. 만옥정 공원은 면적 1만 ㎡의 작은 공원이지만 공원에는 국보도 있으며, 유형문화재도 있으니 결코 작지만은 않은 공원입니다.



만옥정에 들어서면 왼쪽에 창녕지구 전승비(UN전적비)가 있습니다. 1959년 3월에 건립되었으니 오래된 전승비인데요,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창녕군이 관리를 합니다.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2-2-26)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 중이던 195087일 함양과 거창을 점령한 북한군은 이곳 창녕과 현풍을 탈취한 뒤 대구를 포위 공격하려는 계획으로 낙동강 돌출부인 남지읍 박진나루, 오항나루, 유어면 부곡리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공격을 가하여 왔으나 미군 제24사단 및 제2사단의 치열한 역습으로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특히 8136회에 걸친 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저지하고 915일까지 일진일퇴의 혈투를 한달 이상 계속하여 북한군 3개 사단의 큰 병력을 섬멸하였다.조국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고 UN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총 반격으로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이 불후의 공훈을 길이 빛내는 동시에 그 영령을 위로하고자 1959331일에 건립



창녕지구 전승비를 찍을 때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에서 찍었는데, 그 소나무 다섯그루는 '성산면 대산리 파평 윤씨 종중 큰소나무 5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얼라들이 파평 윤씨이기에 그냥 봤습니다. 큰소나무가 있는 끄트머리에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가 있습니다.

창녕척화비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로 창녕읍 교하리에 있는 것을 광복 후 만옥정에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하며, 높이 1.23㎝, 폭 46㎝, 두께 20㎝ 화강암제로서 전면에「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풀어보면,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 왼쪽에 작은 글자로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척화비는 구한말 대원군이 서양열강들이 조선 내에 세력을 뻗치고자 하므로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들이 이를 경계하고자 하였는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일제히 세운 것으로, 한일합방이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는데,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데, 가까이 가덕도 천가초등학교에도 있습니다.




척화비 맞은편에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가 있습니다.



진흥왕 척경비는 국보 제33호로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蓋石)이나 대석(臺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시(신사년 2월),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로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字劃)이 불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한 해가 대가야가 멸망한 때로부터 불과 1년 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가야 지역에 대한 정치적 선무(宣撫)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555년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할 정도로 이 지역을 중요시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창녕을 가야 지역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진흥왕의 창녕 순수 역시 기존의 토착 세력을 선무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멸망하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 제국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 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비는 이렇듯 신라 중고기(中古期: 법흥왕∼진덕여왕)의 관제·신분제·사회 조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진흥왕 척경비 앞쪽에 척경비 안내문과 비의 판독문과 해석이 있습니다.




퇴천삼층석탑(兎川三層石塔)입니다. 주민들이 문화재 주변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창녕엔 문화재가 많다보니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며 어른들에겐 마실장소가 되었습니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의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일부가 약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삼층 네 귀퉁이마다 풍경 등을 달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창녕객사입니다. 객사는 고려·조선 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로 외국사신이 내왕할 때 이곳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던 장소입니다.               

창녕객사는 조선 후기의 객사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유형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녕읍 옥만동 장터에 있다가 1980년대 만옥정으로 옮겨져 왔다고 하는데 마루가 없으며, 웬지 어슬퍼 보였습니다.




창녕 객사옆에는 창녕 현감 선정비군이 있습니다.

현감들 선정비 무리는 옛날에는 만옥정 울타리 바깥에서 도로와 같은 높이로 있었는데 만옥정으로 모았다고 합니다. 현감·군수들 치적을 기린다는 빗돌은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또는 청덕비淸德碑 맑은 덕을 기린다가 대부분이며, 애민선정한 훌륭한 원님이 떠난다니 그저 눈물이 떨어질 따름이라는 타루비墮淚碑도 어쩌다 있고,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흥학비興學碑 두 기가 있었는데, 흥학비는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에 많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빗돌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하는데요, 몸통 비신碑身과 머릿돌 이수螭首 받침돌 귀부龜趺입니다. 이수는 달리 하엽荷葉이라고도 한다는데요, 이는 연꽃과 그 잎사귀를 뜻한답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대로 머리에는 용螭 또는 연꽃荷을 새기고 받침돌에는 거북龜을 새기는 모양입니다. 

이날 해설(설명)은 창녕출신 김훤주 해딴에 대표가 했는데, 김 대표는 창녕출신이며 이 부근이 어릴때 놀이터였다보니 정성을 다해 설명을 했지만 듣는 학생은 다 알아 듣지 못 했습니다.

창녕 만옥정 선정비군의 자세한 설명은 아래를 클릭하면 됩니다.

- 창녕 선정비 무리와 소꿉놀이의 기억



선정비를 보면 재임기간이 2~3년 정도가 많았는데 재임기간이 짧았음에도 창녕을 위해 많은 좋은 일을 한 듯 선정비가 세워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비도 눈에 띄었는데 이는 스스로 친일임을 나타내는 일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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