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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이야기 꽃이 피어나는 이순신 장군 합포해전 승전길

by 실비단안개 2017.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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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열기낚시를 떠날 시간이 두 시간 넘게 남았기에 해안도로를 달려 낚시점을 확인한 후 합계마을로 갔습니다. 합계마을은 임진왜란 진해 3대(안골포해전, 웅포해전, 합포해전 ) 해전지 중 한 곳입니다.

합계마을은 작은 포구로 주민들은 어장을 하며 장어구이가 유명합니다. 합계마을은 행암동에 속한 포구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행암동은 행정동인 풍호동에 속한 법정동입니다. 행암동은 1996년 7월 1일 실시된 행정동 구역 개편으로 장천동과 행암동이 통합된 행정동인 장암동에 편재되어 있었으나, 1998년 9월 16일 장암동이 풍호동과 통합되어 행정동인 풍호동에 속하게 되었으며, 행암동은 행정동입니다.

합계마을입니다. 마을위로 난 도로변에 합포해전비가 있으니 만나야지요.

네이버 지도가 잘 나왔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조선소길은 합계마을에서 수치와 STX로 가는 도로며, 합포승전길은 행암으로 가는 도로입니다.



소나무가 합포해전비와 합포만을 갈라놓았지만 근처에 가면 바다가 보입니다.



합포해전비입니다. 저는 지역에 대한 애향심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깊은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 평범한 국민입니다. 그런데 2012년 봄, 창동오동동 이야기 추억여행시 창원시립 마산박물관 관람시 임진왜란 합포해전지를 진해 합포(합계, 학개, 합포)가 아닌 마산 합포(만)를 이야기 하는 듯 했습니다. 마산박물관 관람 후 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합포 해전지를 확인한 결과 마산포가 아닌 웅천(진해) 합포였기에 정확한 학습이 필요했습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대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는데 고맙게 창원시에서 해전비를 세워 합포는 마산 합포가 아니고 웅천땅 합포임을 정의해주었습니다.

합포 해전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두 번째 해전으로 1592년 5월 7일(음) 저녁 무렵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마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1592년 5월 7일 오후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판옥선 24척)과 원균이 이끈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옥포해전에서 적선 26척을 분멸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오후 4시쯤 왜선 5척(대선4, 소선1)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를 받았다.

이에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군들은 출전하여 웅천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켰다.

세부 전공을 보면 사도첨사 김완과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이영담이 각각 대선 1척씩을, 전 첨사 이응화가 소선 1척을, 이순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 송희립, 김효성, 이설 등이 힘을 합해 대선 1척을 분멸시켰다.

합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에서 두번째로 벌어진 해전이며 현재의 창원(진해구)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이다. 당시 육전에서 연패를 당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을 맞은 시점에서 해전 승리를 통해 임진왜란 극복의 자신감을 수군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 자세히 보기 : 합포해전지를 정의해준 창원시 땡큐~/진해 3대 해전지 소개비



합포해전비에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합계마을 부분입니다. 아담한 마을입니다.



마을 아주머니께서 바닷물에 생선을 씻기에 구경을 하고 주차장으로 가니 얼라아부지가 '합포해전 승전길'이 생겼더라고 했습니다. 저보다 제가 가는 곳에 더 관심을 가지는 얼라아부지다보니 제가 본못걸 늘 알려 줍니다. 합포해전 승전길은 바닷가 화장실에서 작은 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예전에 한 번 걸었던 길입니다. 그다지 힘들지 않는 길이기에 혼자 걸었습니다.



진해는 바닷가 도시다보니 어디나 낚시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임진왜란 합포해전 승전길을 걷겠습니다.



진해에는 임진왜란 3대 해전지가 있지만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대해 내세울 게 없는 도시인데, 2015년 으뜸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인 '이야기 꽃이 피어나는 이순신 장군 해전길 조성'사업 대상으로 선정되어 원포동 합계마을에 '이순신 장군 해전길'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테크로드는 오래전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걸음을 조금씩 옮길 때 마다 7년 임진왜란 해전지를 소개해 두었습니다.

임진왜란 개요에, '임진장초'에 따르면 합포해전은 진해구 웅천땅에 있는 합포(합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동안 마산 합포로 잘못 알려져 왔다고 했습니다.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의 방진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이순신의「임진장초(趙成都)」를 중심으로 합포해전(合浦海戰), 그 날의 출전과 해전상황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합포해전은 이순신의 제1차 출전 즉 옥포해전(5월7일), 합포해전(5월7일), 적진포해전(5월8일) 중 두 번 째 해전이다.

 

1592년 5월10일, 啓本·玉浦破倭兵狀,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계본이다.

“그런데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 멀지않은 바다에 또 왜대선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쫓아서 웅천땅 합포(合浦)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왜대선 1척을,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왜대선 1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1척을 그 부 소속으로 방답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가 왜소선 1척을, 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 송희립(宋希立), 김효성(金孝誠), 이설(李渫) 등이 힘을 합하여 활을 쏘아 왜대선 1척을 모두 남김없이 깨트려서 불사르고,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藍浦, 창원시 구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사실 이순신은 첫 번째 전투인 옥포해전이 끝난 후 연합군을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밤을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탐망하던 우리 척후선으로부터 왜적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단 한 척이라도, 단 놈이라도 그대로 살려둘 수 없다. 휴식은커녕 즉시 추격전에 나서니 왜놈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웅천땅 합포만에 이르렀다. 더 이상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왜놈들은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서 나무 뒤에 숨어 조총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미 왜놈의 전선 5척은 불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쯤 마산박물관의 그 지도와 합포해전 설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만, 당시 전화를 드렸을 때 오만했던 학예사의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한 것 같아 마산박물관은 가보고 싶지 않습니다만, 언젠가는 가서 확인을 해 보고 싶습니다.



산책을 나오신 분들인 듯 합니다.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해전종합 상황 안내 표지판입니다. 15전 15승 중 9전이 진해만 일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상이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상과 비슷합니다. 김세중 선생에 의해 설계 제작된 동상은 여러 논란중 가장 중심은 오른손에 든 칼입니다.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은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기 때문인데 승전길에 만난 이순신 장군상은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 최초의 동상(윤효중)은 진해 북원로타리의 동상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동상으로 장군은 칼을 바로 세워 두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2015년 11월 27일 해군사관학교 통해관앞 충무광장에 제막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칼 대신 활을 잡았는데 진해에 본보기 동상이 있는데 굳이 서울 광화문의 동상을 본떴는지 합포해전 승전길의 아쉬움입니다.



▲ 차례대로 : 광화문 광장, 진해 북원로타리, 진해 해군사관학교


합포해전은 옥포, 적진포해전과 함께 임진왜란 1차 해전에 속합니다.




웅포 상륙작전도입니다. 한국전쟁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유명하지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상륙작전이 웅포해전에서 있었습니다. 웅포해전지는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는 웅천왜성의 동쪽 바닷가며, 1월 13일 개통한 신항 제2배후도로가 개통된 곳에 속하기도 합니다.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8일가지 1개월에 걸쳐 웅천(웅포)에 주둔한 일본군을 조선 수군이 총 7차례 공격한 전투이다. 특히 이 해전에서는 처음 4차례 유인작전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5번째 공격때(2월 22일) 의능이 이끄는 승병과 수군자체의 상륙군이 적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1593년 2월 10일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89척, 병력 1만 4천여 명이었고, 일본은 부산에 500척, 웅포 115척 등 615척 이었으며, 웅포에 있는 왜군은 배를 정박시키고 육지에 진지를 파고 조선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함대가 포구로 공격해 들어갔지만 왜군의 야산 진지 포격에 막혀 적선에 제대로 총통을 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왜군은 바다 한가운데 목책을 설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후퇴를 하고 2월 12일, 2월 18일 연이어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순신 휘하의 의승군(義僧軍)의 승장 삼혜와 의능이 이끄는 600명의 승병은 웅천의 서쪽인 제포로, 1,100명의 수군은 남쪽인 남양으로 은밀히 상륙시키 이순신 함대가 다시 웅천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물이 썰물로 바뀌고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때 까지 싸웠지만 적선의 반정도 밖에 침몰시키지 못하고 아군의 피해도 컸던 해전이었습니다. 평소의 장군답지 않게 이순신은 웅포해전의 결과조차 정확하게 기록해놓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어려운 전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어려웠던 전투지 해상으로 다리가 놓이고 신항 제 2배후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부산 신항이 근처 안골포해전지와 안굴 굴강까지 삼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남양리가 제가 사는 고장입니다.



다시 임진왜란 1차 해전부터  안내표지판으로 정리를 합니다.

2차 사천해전에 거북선이 처음 출전했으며,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의 승리를 총칭하여 한산대첩이라고 합니다. 합포해전 승전길에는 임진왜란 7년사가 해상지도와 함께 잘 나타나 있으니 혹 장어 드시러 합계마을에 가면 잠시 짬을 내어 합포해전 승전길을 한 번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 3대 해전지가 있는 진해에 이순신 장군 해전길이 생긴 건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통영과 여수는 풍광이 아름다우며 여행 아이템이 많기도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이 상품화되어 있으며, 이순신 제독의 해전사는 우리보다 세계가 더 알아줍니다. 지역의 역사와 (활동)인물은 큰 경쟁력입니다.



승전길에서 만난 겨울 식물입니다. 인동초덩굴과 젖꼭지나무의 열매입니다. 얼마전에 올렸던 젖꼭지나무는 천선과나무는 무화과의 한 종류로 주로 남해안 해안가에서 만날 수 있는데, 열매의 생김이 아기무화과같고, 상처를 주면 역시 무화과나무처럼 흰 유액이 나오며, 열매가 마치 젖꼭지 같다고 해서 속칭 '젖꼭지나무'로도 부른답니다.
화낭이 자라서 열매로 되며, 지름 15∼17mm로 되고 8~9월에 흑자색으로 익으면 먹을 수 있는데, 천상의 선녀들이 따 먹는 과일이라는 의미로 천선과라고 지어졌답니다. 쐐기풀목 뽕나무과의 낙엽활엽관목으로 높이 2∼4m이며, 한국 ·일본 ·중국에 분포합니다.



합포해전 승전길 종착지에는 예전에 군인들이 근무하고 생활하던 막사와 초소가 있으며, 옆의 기슭에는 화장실인 듯 한 낡은 건물이 있기도 했습니다.



막사아래로 내려가면 초소가 있는데 해양공원의 솔라타워가 보입니다.



조금더 내려가니 바닷가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소와 솔라타워가 잘 보입니다.




갯바의에서 올라와 초소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전망대가 있고 그 아래에도 낚시꾼이 있었습니다.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승전길 시작지점으로 갑니다. 합계마을이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심을 가진 이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야말로 이야기꽃이 피어난 승전길 걷기가 되었을 텐데 이 부분이 아쉽습니다.





수치마을에서 낚싯배를 타고 가면서 확인한 합포해전 승전길입니다. 위 사진의 파란색집과 하얀 초소와 막사가 보입니다. 앞부분의 작은 동산에 합포해전 승전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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