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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함안 고려동유적지, 꽃대궐이 되었다

by 실비단안개 201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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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5일과 10일은 함안(가야)장날입니다. 함안장은 크며 물량이 많으니 고추 시세도 궁금했으며 여름이 가기전 고려동 배롱나무꽃을 만나기 위해 함안으로 갔습니다. 고려동은 함안으로 들어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고려동을 먼저 방문했습니다.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번지 내 위치한 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입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으며,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는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神主)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습니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는 장내마을입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등 이 있습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년 8월 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다른때와 달리 다른 길로 고려동으로 들었습니다. 배롱나무 붉은꽃이 한창이었습니다.

 

 

고려동(高麗洞)으로 드는 고려교입니다. 폭이 넓어진 듯 했으며 자미단 옆으로 해설사의 집이 있었습니다. 고려동이 새단장을 했습니다.

고려왕조 유민들의 영토로 들어가는 길목의 고려교(高麗橋)에는 두꺼비 한 마리 있으며, 고려교와 함께 있는 자미교는 글씨는 지웠지만, 역시 두꺼비가 있는데, 새끼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고려교와 자미교를 건너면 고려동입니다.

고려동 뒤로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오른편에 600년 이상된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모은(矛隱)은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였으며, 이윽고 함안 땅 모곡(矛谷)에 이르러 자미화(紫薇花)가 만발한 곳을 보고는 길지(吉地)로 생각하여 평생 살 곳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일명 배롱나무라 부르는 자미화는 여름철이면 백일동안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그 모습이 한결같은 선비의 일편단심을 상징하기에 선비들이 집안에 즐겨 심었던 나무입니다.

모은은 배롱나무에 말을 매어두고 자자손손 살아갈 고려동 터를 닦았다고 합니다.

 

자미단(紫薇壇)과 고려동 안내 표지판입니다.

 

 

 

자미단 주변으로 식물이 정리되어 한결 새로웠으며 단정했습니다.

 

 

고려동 자미화는 수령 600년 이상으로 나무만큼 꽃이 풍성하게 피는데 배롱나무꽃을 만나기에는 늦었습니다. 그렇지만 알뜰히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솟을 대문 안 자미정에서 거기 누구요 할 것 같았지만 여러 각도로 배롱나무와 꽃을 찍었습니다.

 

 

자미고원의 배롱나무(목백일홍,나무백일홍,자미목)입니다.

 

 

늦게 찾아 아쉬웠습니다.

 

 

계모당(跬模堂)옆의 자미정(紫薇亭)으로 드는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자미정마당에서 울밖의 배롱나무꽃이 보였으며 마당 담장아래에 계절꽃이 식재되어 있었습니다. 고려동이 꽃대궐이 되었습니다.

 

 

자미정 마루에는 냉·온음료가 준비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차에 마실거리가 있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마시는 것보다 계모당구경과 꽃구경이 먼저니까요. 마루도 잘 닦여져 있었습니다. 함안군에서 신경을 많이 썼나 봅니다. 그동안 안타까웠었는데 고마운 일입니다.

 

 

계모당(跬模堂)이며 뒤는 안채입니다.

 

 

자미당 마당과 계모당 마당, 담장 아래에 핀 꽃들입니다. 할머니댁을 방문한듯 정답습니다.

 

 

 

세이지, 설악초, 봉숭아 등 다양한 여름꽃이 만발했습니다.

 

 

 

작은 텃밭에는 열무와 정구지가 대단한 정성으로 새초롬했습니다. 늘 이런 집을 꿈꿉니다.

 

 

율간정(栗澗亭) 마당에서 까치발을 하면 담장너머의 배롱나무꽃과 겹겹의 기와담장이 한 풍경이 됩니다.

 

 

율간정(栗澗亭)입니다.

 

 

모계정사(茅溪精舍)에 핀 여름꽃입니다. 몇 해전에 여기에는 아마란스가 가득 피어 있었는데 아마란스 대신 설악초가 그 자리에 피어 있었습니다. 설악초는 얼음만큼 시원한 꽃입니다.

 

 

 

모계정사에서 율간정으로 다시 갑니다. 상사화가 늦게까지 피어 있었습니다.

 

 

계모당(跬模堂)마당을 걸어 안채로 갑니다. 마치 오래전에 살아본적이 있는 집 같았습니다.

 

 

계모당의 툇마루입니다. 600년 세월의 흔적입니다.

 

 

안채입니다. 안채는 편액이 없습니다. 오래전 고려동을 처음 방문했을 때 재령 李 씨 종부를 만났던 곳입니다. 종부 임종순 할머니는 가야의 아파트에 거주하시며 종택에서 종친회를 할 때 청소를 하러 고려동을 방문한다고 하셨는데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집은 한국전쟁때 모두 불탔는데 주춧돌은 600년전 그대로며, 담장은 안담과 바깥담 이중담(장)으로 탱자나무였지만, 새마을 운동으로 탱자를 뽑고 지금의 담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루에는 냉장고와 쌀뒤주가 있었습니다. 시렁도 있습니다. 명절때면 많은 음식을 하는데 우리 남해에서는 전이나 자반 등을 채반에 담아 시렁에 올려 보관을 했습니다.

* 시렁 :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해, 방이나 마루의 벽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들어 놓은 것.

 

 

정면 5칸인 안채는 방, 마루, 방, 방, 정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호입니다. 여느 시골집의 창호와 같은데 가운데 팔각형이 있습니다. 소통공간일까요?

 

 

정지에서 마루로 연결되는 곳의 유리문은 찬장이지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친정집도 비슷한 구조였거든요. 밥상을 차릴때 부엌에서 다 차리지 않고 이 찬장을 통하여 마루로 내밀면 마루에서 밥상을 차렸습니다. 다른 점은 방문위에 작은 창이 있었습니다. 환기용인 모양입니다.

 

 

안채앞의 계모당의 아궁이와 굴뚝입니다.

 

 

안채 측면에도 툇마루가 있었는데 큰시루(?)와 군용모자 두레박이 있었으며, 맞은편에는 복정(鰒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복정입니다.

복정(鰒井) 이라고 부르는 우물은 '전복우물'이라는 뜻으로  모은의 현손 이경성(李景成)과 그의 정부인 여주 이씨의 효행이 얽혀있는 유서깊은 우물입니다.

이경성(李景成)은 효성이 지극하여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습니다. 그가 현감 벼슬만 하는 것을 본 남명 조식 선생이 "어찌하여 더 벼슬을 하지 않는가"하니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벼슬을 더 하지 않는다"라고 답하였으며, 부인 여주 이씨 또한 시어머니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병으로 자리에 누운 시어머니가 하루는 전복회를 먹고 싶다고 며느리에게 말하자, 며느리는 백방으로 전복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어느 날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습니다.

며느리는 전복을 요리하여 시어머니에게 드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같이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이씨 부인은 전복이 먹고 싶었지만 시어머니를 위해 식성에 맞지않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시어머니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음에도 이씨는 그 후, 부모를 속인 죄책감을 한 평생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재상 유척기(1691-1767)가 경상감사로 왔을 때, 부임기념 백일장에 시제를 "평생불식(平生不食) 복어회(鰒魚膾)"로 내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효행이 널리 회자되었다고 하며, 이 복정은 600년전 모은 선생이 파서 사용한 것으로 아무리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채뒤안입니다. 텃밭이 있으며 사당이 있습니다.

 

 

안채옆으로 장독이 있고 장독 아래쪽(곳간채 뒤)에 석가산이 있습니다. 연못을 파서 가운데에 돌단을 쌓아 인물상을 세워두었습니다. 굴뚝은 자미정의 굴뚝입니다.

 

 

 

 

배롱나무꽃이 보이는 자미정으로 다시 왔습니다. 우리는 마루에 앉기도 하며 신발을 벗고 마루를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당에도 꽃이 피어 있으며 우수관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자미정 마루에서 바라본 대문입니다.

 

 

계모당과 자미정의 마당입니다. 목단이 피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듯 했습니다.

 

 

계모당의 대문은 종택의 대문입니다.

 

 

계모당 부분과 안채 부분, 사당이 약간 보이며 대문이 가려진 곳은 곳간채입니다.

 

 

계모당 대문간에서 본 배롱나무입니다. 약간 늦긴 하지만 고려동에 가길 정말 잘 했습니다.

 

 

 

수령 600년이 배롱나무 가지와 옆에 조성된 여름꽃입니다. 거름을 많이 했는지 설악초가 풍성하게 피었습니다. 목백일홍 옆에는 백일홍꽃이 피어 있기도 했습니다. 목백일홍과 풀백일홍은 다른 식물입니다. 백일홍은 국화과이며 목백일홍은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수입니다.

 

 

 

자미화를 뒤로 하고 종택을 한 바퀴 돌아 보기로 했습니다. 담장이 단아합니다.

 

 

고택에 보면 담장에 이런 구멍이 있는데 외부와 소통을 하고 외부 소식을 듣기도 하며, 집 마당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종택 뒷쪽입니다. 여기도 꽃이 만발했습니다. 안팎으로 꽃대궐입니다.

오래전 뒷집을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그 집도 꽃이 만발했더군요. 반갑긴 했지만 갈길이 바빴기에 눈으로만 보고 말았습니다.

 

 

텃밭가운데 있는 나무는 산수유나무입니다. 어떻게 아느냐면 고려동유적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 산수유꽃이 피어 있었거든요.

 

 

지대를 따라 담장이 층층입니다. 꽃이 심어진곳은 수로같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괜찮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마을 도로로 차들이 다니기도 하며, 근처에 제실이 있는데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 구경은 하지 못 했습니다.

 

 

효산정을 잠시 기웃거리다 고려교로 왔습니다. 이제 마음속에 담긴 신세계 동산정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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