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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해남 두륜산 대흥사, 이제는 풍경이다

by 실비단안개 2019.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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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일찍 나선다고 나섰지만 숲은 어두웠습니다. 어두운 숲으로 들어 오는 햇살은 눈이 부시게 했습니다. 매일 최고기온을 경신하던 때입니다.

두륜산 대흥사하면 떠오르는 건 금당천위의 심진교뿐인데 얼라아부지는 많이 걷는 숲길이라고 했습니다.

걷는 일은 늘 자신이 있기에 아무리 걸어도 그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다보니 심진교만 생각이 난 모양입니다.

 

 

우리는 유선여관 근처의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숲길을 걸었습니다. 일주문으로 들기전에 대흥사 안내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전통사찰은 300m이내에 주차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통사찰에는 대부분 문화재가 있는데 그 문화재 보존을 위해서입니다.

해남 대흥사는 안동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를 비롯해 경남 양산 통도사, 충북 보은 법주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와 함께 지난해 6월 30일 '산사, 한국의 승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우리가 한 번 간 절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봉정사와 부석사를 다녀 왔으니 대흥사를 방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입니다. 이틀전 방문한 강진의 백련사와 무위사, 전날 방문한 해남의 미황사가 대흥사의 말사입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대흥사의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는데,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金塘川)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 보이는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특징입니다.

대흥사에 가 보면 알겠지만 워낙 넓어 북쪽과 남쪽이 마치 다른 공간처럼 여겨지며, 대흥사는 사찰인 동시에 사당이 있기도 합니다.

또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대학 은사의 소개로 첫 인연을 맺었던 곳입니다. 제적과 함께 강제 징집돼 특전사를 제대한 대통령은 대학 복학이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사법시험 도전을 위해 1978년 해남 대흥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동원훈련 대상자였던 대통령은 예비군 훈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예 주소까지 대흥사로 옮겼으며, 대통령이 공부했던 선방은 대흥사 대광명전 구역내 동국선원입니다.

 

 

대흥사 종합안내에서 자른 가람 배치도입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부도전이 있습니다. 설명도 자세히 있습니다.

나즈막한 담장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와 탑비가 80여기 있는데,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입니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해 있어 더욱 유명합니다.

일주문옆으로 야영장이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부도전(浮屠殿)을 지나 반야교가 나오며 반야교 아래로 계곡물이 흐릅니다. 대흥사 가는 길은 다리를 8개(현무교, 이원교, 운송교, 홍류교, 강화교, 피안교, 반야교, 심진교) 건너야 대흥사 대웅전에 도착합니다.

숲은 계속 이어졌으며 해탈문((解脫門)을 만납니다. 일반 사찰에서는 천왕문이었는데 대흥사는 해탈문이었습니다.

 

 

 

숲가운데에 세원진 진정한 돌탑입니다. 조심조심 쌓은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사찰은 관람을 하지 않더라도 가는 길에 벌써 힐링이 됩니다.

 

 

 

頭輪山 大興寺, 解脫門

 

여러 길을 거쳐 대흥사에 들었습니다. 이곳은 남두륜산이 펼쳐져 있는데 신비로운 와불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얼굴, 손과 발이 나타나 있습니다.

 

 

와불처럼 보이나요?

이곳은 남원구역으로 전각들 뒤로 두륜산이 완만하고 푸근한 산세가 대흥사를 감싼듯 합니다.

 

 

동다실을 지나면 연리근이 나옵니다.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로 보호수입니다.

 

연리근(連理根)
(천년의 인연, 만남, 약속)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립니다.

 

 

그 다리, 심진교(尋眞橋)입니다.

'심진교'는 대흥사에서 가장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으로 건너가는 길목의 아름다운 홍교입니다. 선암사의 승선교와 벌교에서도 만날 수 있는 비슷한 홍교입니다. 무지개 모습의 이 다리가 아주 가끔 생각이 났는데 이제서야 다시 만납니다.

25년전, 그때는 아이들이 어렸으며, 필름카메라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컷 한 컷을 잘 찍어야 했지만 요즘은 디카시대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삭제를 하거나 편집시에 삭제를 해도 되니 사진을 찍을 때 두려울 게 없습니다.

또 그때는 인터넷이란 게 없었다보니 사진을 인화하더라도 우리 식구만 봤는데 풍경보다는 아이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장당 얼마에 인화를 하다보니 풍경은 마음에 담고 카메라는 아이들을 담았지만, 지금 아이들은 성인이며 노출을 원치않다보니 식구들이 여행을 하더라도 풍경위주로 찍습니다.

 

 

심진교를 건너면 침계루(枕溪樓)입니다.

침계루의 뒷면 '원종대가람'이라는 편액은 이광사가 썼으며, 침계루는 2층 누각 건물로 아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이며 위층은 널마루를 깔고 그 위에 법고·운판·목어·범종 등 사물(四物)을 봉안했습니다. 침계루의 벽을 보면 소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와 가재가 있습니다.

 

 

금당천으로 내려 갔습니다. 심진교를 더 오래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건 변함이 없습니다.

 

 

 

큰법당 대웅보전(大雄寶殿)입니다.

 

 

침계루와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의 글씨입니다.

인근의 섬 신지도에 위리안치되어 23년이란 긴 유배생활을 하며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학자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얽혀있어 더 관심을 끄는 현판인데요, 헌종6년(1840)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던 추사 김정희는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초의선사에게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라고 합니다.

8년여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자신의 편액을 떼고 다시 원교의 편액을 걸어줄 것을 부탁하며, 새로 무량수각의 현판을 써주는데 현재도 대흥사에 가면 원교와 추사의 편액이 한 공간에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만했던 천재가 시련을 겪으면서 예술적 깊이와 안목이 넓어지고 태도도 겸허해졌다고 할까요.

 

 

대웅보전의 주련과 백설당의 굴뚝이 보입니다.

 

 

대웅보전의 측면입니다. 기둥에 세월의 무게가 보입니다.

 

 

대웅보전옆에 응진당과 산신각 있으며 응진당 옆에는 3층석탑이 있습니다.

응진당(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이 탑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합니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으로 보물 제320호입니다.

 

 

 

북원 일곽의 산신각 좌측에 자리한 청운당(靑雲堂)은 스님 및 재가 종무원들의 대중방으로, 현재 요사채 및 스님들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앞에 걸린 능소화를 찍었는데 청운당도 찍혔습니다.

 

 

응진당·산신각(應眞堂·山神閣)입니다.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합니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 1917년 헌괘되어 있음을 살필 때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진 것은 아닌 듯 하다고 합니다.

 

 

소원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원지입니다.

 

 

대웅보전 중정의 서편을 가로막아 널찍하게 자리잡은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사중의 대중방으로 이용되는데 전시장이었습니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실내에는 이지연의 '산수유랑'전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침계루벽면에도 전시 소식이 있습니다. 진행중이니 대흥사에 가시면 관람하면 되겠습니다.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원과 남원이 있습니다. 다시 남원으로 갑니다.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을 뜻하는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입니다.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 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하며 수련이 피어 있었습니다. 마음 心하니 산청의 수선사가 생각납니다.

 

 

 

스님들의 요사채인 정진당입니다.

 

 

사리탑입니다.

 

 

남원의 오른편에는 서산대사의 사우인 표충사와 그 부속건물인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재, 명의재, 보련각 그리고 최근에 증 개축한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표충사 뒤편에는 대광명전,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진 대광명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흥사는 차의 성지입니다.

차문화(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1786~1866)인데 39세에 '우리나라 차의 성지'라고 불리는 일지암이라는 암자를 지었습니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립니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습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강사인 완호윤우(琓虎 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습니다. 법호 초의와 茶가 잘 맞는 듯 합니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의 성지인 일지암에는 가지 못 했습니다. 대흥사가 너무 넓었으며 식구들이 모두 따로였거든요.

일지암은 초가에 방 한 칸이 전부여서 소박하기 그지없는 암자입니다.

 

 

표충사 호국문입니다.

표충사(表忠詞)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조 도총섭이 되어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습니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글씨까지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장군샘입니다. 샘물이 솟아오르는데 일명 용천수라 하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옵니다. 

오랜 옛날 큰병에 걸린 스님이 이 물을 마시고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이 자정 무렵 물이 소용돌이치며 추녀에까지 솟구쳐 오를 때 마셨던 모양입니다. 이후로 모든 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니다. 약을 달이거나 찻물을 끓일 때 용천수를 최고로 여겼다는 설화이며, 장군샘이라는 이름은 고산 윤선도가 붙였는데, 이곳을 찾은 고산이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이 능히 장군을 배출할 만한 샘이라 칭송한데서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표충사(表忠祠)입니다.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습니다. 표충사 일곽의 풍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합니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입니다.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표충비각입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인데 물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성보박물관 뒤를 걷다보니 부도 2기가 있었습니다. 너무 멀리간건지 에어컨 실외기가 많이 있었으며 소음이 요란하여 얼른 박물관마당으로 내려 왔습니다.

 

 

 

 

성보박물관 뜰에 하트모양의 잔디뒤로 한국차의 전통을 살린 동다송비가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정리한 한국다도의 고전 '동다송'이 새겨진 동다송비는 2007년에 건립되었습니다.

동다송비는 초의선사가 40여년간 일지암에 머물며 정리한 한국다도의 고전이며 중국 차와 한국 차의 특징, 차 끊이기, 차 마시기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대흥사의 이른 가을입니다. 아이들에게 연락을 하니 동다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동다실은 차와 소품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약 2시간 정도 지났나 봅니다. 그 사이 해가 중천에 있었습니다. 대흥사와 주변은 원래의 색을 찾았으며 우리는 이동을 합니다.

 

 

대흥사를 들때의 빛과 해가 많이 났을 때의 부도전이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부도전의 출입문 진화문( 眞化門)입니다.

 

대흥사 일주문입니다.

一柱門은 사역으로 들어가는 첫번째문으로서 대흥사 성역(聖域)의 문지방에 해당되며, 유선여관을 지나 구림리 숲길 끝자락에 있으며, 어칸에는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 편액하였습니다.

 

 

대흥사 마지막 걸음이 될 길,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해탈과 열반으로 건너 간다는 피안교를 건너왔습니다.

피안교를 건너면 유선여관과 주차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흥사에 들때의 도로를 달려 나오는데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대흥사에서 나올 때는 옆의 산길로 나와야 한다는 걸 몰랐기에 다시 주차장쪽으로 올라가서 우회하여 해남을 빠져나와 벌교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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