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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더 빛나는 진주성과 촉석루

by 실비단안개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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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비실마을로 가는 길에 진주성을 스쳐갔기에 나중에 진주성에 가보자고 했더니 비실마을 방문 후 진주성으로 갔습니다.

공북문 근처의 유료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공북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공북(拱北)'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으로,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진주성의 정문으로 나와 있으며, 2002년 5월 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하였습니다.

 

공복문을 들어서면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고 맞은편에는 비둘기가 한가로운데 언젠가 여름에 진주성을 방문했을 때 배롱나무 꽃이 인상적이었는데 비둘기와 배롱나무 꽃을 다시 만났습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제1차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하나 조선 군대와 의병군이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고 일본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저 진주성을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습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물리쳤습니다.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갔는데,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전투입니다.

 

촉석루에도 배롱나무 꽃이 피었습니다. 진주는 유등축제를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유등축제 때의 등 재질로 만든 여러 조형물이 있었는데 다른 곳에도 있었습니다. 외지인이라 그런지 유등축제는 그다지 마음에 닿지 않는데 말입니다.

 

진주를 대표하는 촉석루입니다.

촉석루(矗石樓)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입니다. '촉석루'라는 명칭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촉석루는 남강(南江)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어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으로 1241년(고려 고종 28)에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1725년(영조 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주 고적 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중건한 것입니다.

 

촉석루에 오르면 남강과 진주성 성벽이 보이며 수목이 빛나는 여름이면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입니다.

 

촉석루도 밀양 영남루만큼 현판이 많은데 남장대(南將臺) 현판입니다.

 

矗石樓

 

영남제일형승(嶺南第形勝)
* 形勝 : 지세나 풍경이 뛰어남.

진주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합니다.

외에도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습니다.

 

의암에서 오를 때 보는 촉석루입니다.

 

촉석루는 팔작지붕에 다락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하였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벌목한 것이라고 합니다.

담장 밖에서 보는 촉석루입니다.

 

마침 진주성 옛 사진전이 있었습니다. 어디서나 옛 사진은 소중하며 추억을 불러옵니다.

 

계명대학 박물관 소장인 '진주성 성도'입니다.

 

1927년도의 촉석루 사진인데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를 예술이라고 해야 할지 훼손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촉석루에서 내려다보면 의기사가 보입니다.

의기사(義妓祠)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임진왜란 당시(1593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는데, 장수 출신 논개의 성은 朱 씨며 기생이 아닌 의병장 최경회 부인으로 2차 진주성 전투 때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은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에 올라서 시 한 수를 읊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촉석루의 세 장수는 한 잔 술을 들이키며 강물을 가리키며 웃네.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는데 저 물결 흐르는 한 혼도 죽지 않으리." 

- 참고 : https://news.v.daum.net/v/20210721122608176

 

의기사는 주논개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1688~1744년)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했다고 합니다.

 

논개의 영정과 비와 오죽입니다.

 

촉석루 아래의 남강과 의암입니다.

 

의암 사적비에는 논개가 진주 관기라고 되어 있는데 하루빨리 바로 잡았으면 합니다.

 

촉석로와 의기사 옆으로 쌍충각이 있는데, 쌍충각은 임란시에 의병을 모아 싸운 제말 장군과 조카 제홍록의 공을 기리어 정조가 세운 비각입니다.

 

쌍충각은 진주성벽을 따라 있으며, 진주성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석축 된 성의 둘레가 약 1,760m(4,359척), 높이는 약 5~8m(15척)이며, 성내는 촉석루, 김시민 전성각적비, 의기사, 서장대, 북장대, 창열사, 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공연장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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