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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수로왕릉 - 김해시

by 실비단안개 2006.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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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199.

가야(伽倻)의 시조.
[개요]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신화]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다.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 구지가).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그리고 천신(天神)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다.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뒤를 이었다.
[신화의 해석]

 

이 신화는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이는 북방에서 이주한 유이민집단이 낙동강 하구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하여 초기 국가를 형성해나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수로가 6개의 알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표현은 가락국[金冠伽倻]을 중심으로 여러 가야국들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3월에 목욕재계로 잡스러움을 떨쳐버리고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 뒤 하늘의 권위를 부여받은 수장(首長)을 선출하는 내용에서 국가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풍속과 정치운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수로왕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지역에 존재했던 수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 계속 받들어졌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관리를 위해 위전(位田)을 설치하고, 능묘의 제례를 후손이 계승하도록 했다. (출처 : 다음 백과)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나머지 설명은

'수로왕릉과 구지봉'(http://blog.daum.net/mylovemay/9256800)에 있으며, 건물의 이름은 이미지에 나와 있기에 사진만 올리며, 담장을 위주로 찍었음.

 

  • 신화
  • 신화의 해석

 

 

 

 

 

 

▲ 수로왕릉 - 사적 73호이며, 왕궁(봉황대)의 동북쪽 평지에 있는데, 원형봉토분으로 높이는 약 5m이다. 고려문종 때까지의 제사기록이 가락국기에 전하며,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도굴을 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647년(인조 25년)에 왕명에 의해 묘비를 세웠고, 1865년(고종 2년)에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신어문양이 새겨진 납릉정문 등의 전각이 있고, 능의 뒤편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2기가 남아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춘추대제를 치르는데, 제례행사가 독특하여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왕비릉과 달리 담장이 따로 있다.

 

 

 

 

 

 

 

 

 

 

 

 

 

 

 

 

 

 

 

▲ 구중궁궐의 능소화 - 수로왕과는 상관없는 전설이지만 능소화의 전설을 잠깐 보자.

 

능소화의 전설


이 꽃을 ‘구중궁궐의 꽃’이라 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답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아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번도 찾아 오지를 않았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겠지만, 아마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 까지 기거 하게 된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 오기만을 기다렸답니다.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너머너머 쳐다보며, 안타까이 기다림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답니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 내지는 영양  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 초상조차도 치루어지지 않은채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라고 한 그녀의 유언을 시녀들은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 때, 빈의 처소 담장에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으니 그것이 능소화입니다.

덩굴로 크는 아름다운 꽃이지요. 아무튼 능소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이 담장을 휘어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잎의 모습이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 합니다. 
한이 많은 탓일까요, 아니면 한 명의 지아비 외에는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루드베키아 - 해바라기와 비슷한 꽃으로 요즘 많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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