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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김해 봉황동 유적지

by 실비단안개 2007.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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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우리 나라 고고학상 처음으로 발굴 조사한 곳이다. 그 뒤, 1920년에 일본인 하마다 등이 발굴하기도 했고 1998년에 부산대 박물관에서 다시 발굴했다. 회현리 패총은 2001년에 봉황대 유적과 합쳐 사적 제2호 봉황동 유적이 되었다.

봉황동 유적지는 청동기 시대 금관 가야의 지배 계층들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이태 동안 가야 시대의 주거지와 고상가옥, 망루를 설치하고 기존 수목을 우리 나라 고유의 수종으로 교체하여 가야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봉황동 유적지 정문은 문이 없는 열린 유적지다. 사발 팔방으로 문 없는 문이 나 있고 순환 산책로가 겹으로 놓여 있다. 잔디밭 위로 돌계단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이른다. 정상이라고해야 높은 언덕에 불과하며,  봉황동 유적지의 중심엔 황세 바위가 있다. 이곳엔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바윗돌 위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황세바위 전설

가락국 9대 겸지왕 때의 일이다. 그때 황 정승과 출 정승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동량으로 서로 사이좋은 친구간이었다. 어느 날 이들은 굳게 약속을 했다. 두 집안 모두 같이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의형제를 맺고 서로 다르게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기로 하였다.
이후 불행하게도 몰락한 황 정승 집에서는 아들을 낳았다. 출 정승 집에서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출 정승은 몰락한 황 정승과 혼인하여 같이 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딸을 아들로 위장을 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황정승의 아들은 황세, 출정승의 딸을 여의로 이름지었다.

황세는 여의가 아무래도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어느 날 여의에게 이 바위 위에서 오줌을 누어 누가 멀리 가는가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여의는 삼대 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여의는 커갈수록 낭자티가 분명해졌다. 황세는 이번에는 거북내에서 같이 멱을 감자고 제의하였다. 여의는 마침내 여자임을 밝히고 혼인을 약속했다. 장군이 된 황세는 신라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가락 왕은 황세를 유민 공주와 혼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를 알게 된 여의 낭자는 황세를 그리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민 공주와 혼인을 한 황세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슬퍼하다가 여의 낭자를 따라 죽었다. 이를 비관한 유민 공주는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가 오줌누기 시합을 한 바위가 바로 황세 바위다. 여의 낭자가 순절하여 그 혼이 돌문으로 들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하늘문, 여의 낭자와 황세 장군이 앉아 놀았던 여의좌, 여의 낭자가 책을 읽었던 독서대가 있어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 정문에서 왼편으로 망루대(전망대)가 보인다. 3층이며 높이는 10m

 

 ▲ 황세바위

 

 ▲ 여의각 지붕

 

 ▲ 고상가옥(오른편) : 고상 가옥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사 때 사용된 특수 건물로 보인다.

 

 ▲ 움집 : 가야 시대의 집은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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