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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가락국 마지막왕 구형왕릉(仇衡王陵)

by 실비단안개 2007.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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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금서면 왕산(王山).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본 구형왕릉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가 있는 해발 923미터의 산이다.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이곳에 묻혔으니 산 이름은 당연히 왕산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별궁인 수정궁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산청읍에서 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30분쯤 달리면 금서면 화계리 면소재지가 나오고 산길을 따라 약 1킬로미터쯤 올라가면 피라밋처럼 생긴 구형왕릉을 만날 수 있다. 구형왕릉은 자연석을 모아 피라밋 형식으로 쌓다가 봉우리를 동그랗게 만들었다. 일부 학자들은 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180여년전에 발견된 왕산사기(王山寺記)에 의해 왕릉임이 증명되었다. 

 

 

경호강을 거슬러 올라 류의태 약수터 안내 표지가 있었지만 공사 관계로 출입은 하지 못하였다.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명의 유의태가 약수로 사용했다는 약수터다.

류의태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도 "千蚓水"(萬蚓水라고도 함)를 먹어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써야 한다며 물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로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류의태 선생 활동시 한약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 아래 자리잡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산청군 홈페이지에서)

 

 

▼ 구형왕릉 

 

 

전구형왕릉(사적 214호, 1971.02.09)

상세설명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산청군 홈페이지에서)

 

 

 

 

 

 

전문설명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돌무덤은,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에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왕궁(太王宮)에서 돌아가시자 시호(諡號)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 제10대 양왕의 능으로도 전하며, 양왕은 신라왕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고도 전한다. 

이 무덤은 형식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40㎝,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석수가 각각 1쌍씩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설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요구가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헌 산천조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에 있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기로는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산청군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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