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사옥은 부산진역 건너편에 있다. 부산일보 사옥으로 가기전에 부산진역을 들렸다. 지하철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던 육교가 아직도 있었으며, 주변 풍경은 그리 변화된 느낌이 없었지만 부산진역은 이미 폐쇄가 되어 접근을 금하였다.
오래전에 청십자의원을 드나들 때 작은 역의 광장과 광장에서 할머니들께서 채소나 과일등을 파셨는데 그 풍경은 시골의 작은 역처럼 정겨운 풍경이었다.
역 광장으로 가는데 경전철 공사중인 구간으로 새마을호가 통과하기에 그 꽁무니까지 오래 지켜보았으며, 역 광장을 약간 비켜 노숙자분들의 숙소가 있었고 그 앞에는 무료 급식소도 있었다.
도시의 이면을 폐쇄 부산진역 광장에서도 만났는데, 서울역과 자갈치등의 노숙자분들이 스쳤다.
그때는 추워서 이 분들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지금은 여름이니 이제 더워서 어쩌나 걱정이다. 주변으로 만취가 되어 도로변에서 그대로 주무시는 분들도 계셨다.
방송, 인터넷, 은행과 보험회사의 우편물, 광고전단지 등에서는 매일 돈을 판다고 난리들인데 그 돈을 이 분들에게 조금씩만 그저 드리면 안될까?
답답하였다.
부산진역으로 가자.
폐쇄역이지만 철도청의 홈피에는 다음과 같이 부산진역을 소개하고 있다.
부산진역
부산진역은 1904년 11월 10일 경부선 개통과 더불어 영업을 개시. 현재 역사는 1979년 10월 7일 신축되었으며 역세권 내에 동구청, 동부경찰서, 부산진세무서, 부산일보, 수정초등학교외 5개 학교가 있어 유동인구는 많으나 부산역, 지하철역이 인접하여 이용객 수는 1일평균 2,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역은 1-4부두(재래부두), 5-6부두(자성대부두)을 끼고 있어 부산항을 통하여 수·출입 컨테이너 화물을 전문적으로 수송하는 동해남부선, 우암선, 경전선 열차의 시·종착역이며 CY 합리화 사업의 일환으로 1999년 11월 1일 제 1단지 GATE를 설치 운용, 2000년 2월 1일 제 2단지 GATE를 설치 운용, 2001년 2월 1일 제 3단지 GATE를 설치 운용으로 1일 평균 14개 열차에 780TEU의 컨테이너를 적재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철도물류의중추역입니다. 장차 철도수송은 대량, 중량화물을 적은 비용으로 수송하는데 있어 타 교통수단보다 월등한 장점을 지니고 있고 환경 친화적인 요소로 인하여 더욱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주소 : 부산 동구 수정2동 79-3
전화번호 : 051-463-4580
부산진역은 2005년 4월 1일 부로 폐쇄된 역이며, 동해선과 경부선이 통과 하며, 지금은 역의 간판도 없는 역이다.
육교 위에서 담은 부산진역
진주역처럼 부산진역의 발자취가 이곳이 예전에 부산진역이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이다.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몇번이나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화물열차가 통과를 하였다. 안쪽은 공사중이라 접근금지였다.
왼편의 구멍이 있는 천막이 노숙자분들의 숙소이며 그 맞은편에 무료급식소가 있다.
부산진역 광장 오른편으로 '약방앗간' 백산약초가 있으며, 같은 건물에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 밥집과 작은가게, 화폐수집 가게가 있다. 백산약초에는 나이가 많은 할머니께서 자리를 지키고 계셨는데, 이 자리에서 30 여년 장사를 하였는데 올해 말 쯤이면 경전선 공사 관계로 철거가 될거라고 하였다. 옆의 가게들은 이전을 하였는데 할머니의 백산약초와 작은가게만이 역사를 지키고 있다.
백산약초 옆 건물은 '청십자병원'이다. 오래전에는 '청십자의원'이었는데, 지금은 확장이 되어 병원이 된것이다. 큰늠이 어릴 때 초량에 살았으며, 청십자의원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었으며, 아이나 어른 모두 청십자의원을 이용하였고, 그때 나도 다리를 수술하여 육교를 오르내리며 통원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
청십자병원은 성산 장기려 박사님께서 설립한 병원이다.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자그마한 키에 곱게 빗겨 넘긴 머리, 온화한 미소가 장기려 박사님이었다. 어린 아이를 업고 가면 손주 대하듯이 미소로 그렇게 맞아 주었으며, 목소리에도 정이 가득한 분이었다.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성산 장기려 박사 의사·자선가(慈善家). 평안북도 용천(龍川) 출생.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과대학·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0년 12월 월남하여 1951년 부산(釜山)에 천막을 치고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세워 인술(仁術) 봉사로 사회에 이바지하였다.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1975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해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으며,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 창설,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섰다. 1976년 국민훈장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 1995년 인도주의 실천의사상을 받았다. 노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받았다.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청십자병원 앞에는 낡은 벤치가 하나 있다. 잠시 앉아 보고 청십자병원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가니 변한듯 변하지 않은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병실이 이층이었는데 -
잔병치레를 그렇게 많이 하던 우리 딸이 스무네살이다. 이늠 안고 업고 다니던 육교를 두번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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