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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둔덕골의 청마 유치환 생가

by 실비단안개 2007.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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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조선문단, 1936)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다리(橋)위 양 옆으로 거제시 기, 새마을 기, 태극기가 8월 한낮 더위에도 힘차게 펄럭였고, 생가 입구의 제법 넓은 터엔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대문을 잇는 벽면엔 '청마길'하며, 청마의 고향임을 골목골목 알려주었고.

 

 

                           청마 유치환

1908 ~ 1967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
동래고보 수학. 연희전문 중퇴.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 등단.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발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
이른바 생명파의 한 사람으로 동인지 [생리]를 간행, 그러나, [시인부락] 동인으로는 활동 하지 않음.
경향 :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
-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은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았다.

- 곧, 강렬한 허무적 의지는 그 밑바닥에 생명의 뜨거운 꿈틀거림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간직한 것 때문임
1960년대에 부산에 정착, 부산고, 경남여고 등지에서 교사, 교장으로 근무
시집 : [청마시집](1940),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등
유적지- 유치환시비
- 바위시비(부산진역앞 수정가로 공원, 영도남여자상업고등학교)
- 깃발시비(에덴공원)
- 그리움시비(용두산 공원 '시의 거리')

●생명파(生命派) : <시인부락>(1936) 동인과 <생리>(1937)를 발간한 유치환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 생명의 의지를 추구한 1930년대 문학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 '시문학파'의 기교주의와 '주지주의시파'의 문명에 대한 시에 반발하여 생겨났다. 생명파의 대표 작가로는 서정주, 유치환, 김동리 등이 꼽힌다.

 (출처 : http://full.mireene.com/designef01.html)

 

 

청마의 출생지를 '통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법원도 통영의 손을 들어 주었다. 청마의 출생지는 거제 둔덕이다. 지금이야 다리 한나 건너면 거제와 통영이지만 그 시절에는 상황이 지금과는 달랐으며, 교육 기관 또한 변변치 못하였다보니 거주지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곳으로 유학을 가거나 이사를 하였다. 현재 청마의 생가는 통영과 거제 두곳에 있지만, 청마의 3딸들이 통영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여 통영의 생가에서는 안내판에 '생가'라는 말을 못쓰게 되었다. 법원에서 통영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생가가 바뀌는건 아닐것이다.

 

 

                          거제도 둔덕골 -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로 내려와 나의 부조의 살의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을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 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시방도 신농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 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한 기풍 속에 새끼꼬며
                                시서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뿔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의 묏가에 부조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슬레이트 혹은 슬래브지붕이 대부분인 마을 한 가운데 두 채의 초가가 의연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
안내판에 ‘1908년 7월 14일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의 5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고 적고 있는 청마 생가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마당가에 화단이 잘 가꿔져 있고 우물과 텃밭이 있다. 마당한켠엔 메주콩이 깍지채 말려지고 있으며, 처음에는 미군의 흔적인지도 모르는 딸가바지라고 부르던 군용모자가 두레박이 되어 장독대에 걸려있다. 장독대 앞으로는 붉은 고추가 말려지고.
'출생기'시화와 어머니 산소에 세운 '사모비' 사진이 걸린 마루가 있고, 방 두칸 사이에 안청이 있다. 섬마을에는 안청이 있었다. 안청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며 제기등과 함께 가정에서 소중하거나 때로는 소소한 물건등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루 아래에는 둘둘 만 멍석을 받침대로 하얀 고무신과 검정 고무신이 나란히 있다.

       

  

       

 

       

 

안청의 뒷문이 뭍과 달랐다. 바람이 많은 탓이었을까, 뭍의 도장 문처럼 나무문이었으며, 방바닥 역시 뭍과 다르게 아래로 꺼져있었다. 안청에는 누가 만들어 두었는지 수수깡 안경과 짚으로 만든 소품이 있었으며, 마루의 천장에는 밀짚으로 만든 곤충망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작은방의 모습인데 벽장이 낮다. 역시 뭍과 달랐다.

 

       

 

       

        ▲ 정지 

 

       

        ▲ 군불만 땔 수 있는 아궁이다.

 

       

        ▲ 정지벽으로 절구공이가 걸려있으며, 장독대, 절구, 우물, 텃밭이 있다.

 

       

 

       

        ▲ 두레박으로 변한 군용모자가 장독대에 있으며, 할머니와 어머니의 유일한 공간인 장독대 앞으로 고추가 말려지고 있었고, 일년을 사용해야 하는 수세미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 올망졸망한 삼남매가 청마 생가를 방문하여 잔디가 착한 마당에서 놀다가 지렁이를 발견하고는 신기하여 둘러 앉았다. 표정이 심오하다.

 

       

        ▲ 아랫채 옆으로 생가 설명과 화단이 있다. 화단에는 흰나도샤프란, 맥문동, 금송화등이 정답게 피어있다.

 

       

 

얼기설기 엮은 문에는 담쟁이가 이르게 열매를 맺었으며, 담장과 지붕에는 호박이 열심히 익고 있으며, 그 곁으로 석류나무가 그늘이 된다.

 

       

 

       

 

       

        ▲ 마을회관 맞은편에 건립중인 기념관

 

       

        ▲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붕의 짚에도 세월이 묻었다. 돌담장,  뜰, 어느것 하나 그저 자리한게 아니었다. 박보다 호박이 더 소박하였으며, 청마 생가 어디에도 화장한 사람 냄새가 나지않았다. 40여년전 여름방학 어느날의 외갓댁이었다.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뜻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만주에서 돌아온 청마는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이곳에 재직하였다.  
이무렵 이 학교에는 여류시인 이영도가 근무하고 있었고 이때 청마는 이 단아한 여류시인에게 연정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본래 생명에 대한 열애로 가득찼던 호탕한 시인 청마는 강물이 넘치듯 흘러내리는 생명의 열정을 적어 연인 정운에게 바치기를 20여년, 죽음 문턱까지 5천여통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누가 이토록 진하고 절절한 사랑의 밀어를 매일 새벽마다 잠 못들며 흘려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차라리 축축한 감정의 물기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의 폭발이었으리라. 

아직도 사랑한다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이영도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 달라는 말 한마디 못한 순정이 있다. 청마의 부인이다.

"그토록 목숨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어요"

진정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

 

청마는 1967년 2월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 부산대학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하였으며,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산록에 묻혔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산록에 묘지가 있다.(생가에서 1.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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