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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외인(方外人)은 죄가 없다

by 실비단안개 2007.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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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출처 : http://blog.daum.net/mangch-com/3163275

 

 

‘시대의 비판자, 귀속을 거부한 자유인’이라는 부제가 맘에 드는데도 맘 같지 않은 것은 그만큼 치열함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이 나이에..하는 생각을 좀 떨쳐버리기 위해, 불씨삼아 부싯돌만 그어본다.


김시습이 살았던 시기는 세조의 왕위 찬탈과 같은 파란의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김시습은 이러한 혐오스러운 역사적 공간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과감하게 벗어 던질 수 없어 평생을 방외인(方外人)으로 살았다. 이 역사적 공간에서 김시습은 스스로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지키며 살려고 했기에 내면에 크나큰 상흔을 지닌 채, 평생 방랑과 은둔을 반복하였다


세상을 흘겨보면서, 휘파람 불었던 인물.. 진정한 자유인의 초상..

자유인을 탈색시켜 유교적 절의를 부각시킨 것은 후대인들이 조작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


참고로, 조선전기 문인은 흔히 조정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던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해 심성을 도야하던 사림파(士林派)로 나뉜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모순된 질서와 정치권력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그 밖으로 탈주하지만, 현실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인물.. 즉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불렀다


“개에게 뼈다귀를 주지 마라/ 떼로 모여 어지러이 다툴 것이니./ 그 무리와 어길 뿐 아니라/ 마침내는 주인과도 어긋나리라./….” 출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월당의 길은 이처럼 선명하게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로부터 탈주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발은 뜬구름이 아니라 탄탄하게 현실을 밟고 있다.

 

당연히 권력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다. 눈에 가시지만 차마 빼버릴 수 없는 방외인..  


흔히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절의(節義)의 화신’으로 칭송한 것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김시습을 이념적으로 전유하려 했던 후대의 집권 유학자들의 ‘이미지 조작’의 요소가 꽤 있다. 반면에 ‘광인’이라는 발가벗김은 제도 권력의 허물을 전가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율곡 이이가 지은 ‘김시습전’에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화려한 행차가 조정으로 향하던 때 일어난 일이다. 모두 길을 비켜서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내(바로 김시습이다)가  “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며 길을 가로막고 섰다는 것이다. (<-강중은 서거정의 자(字))


수행하던 벼슬아치가 놀라 김시습을 벌주려고 하자, 서거정이 “그만 두어라. 미친 사람에게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 그대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고 했단다.


권력에 배타적인 모습을 민중적 염원으로 그리다 보니 다소 과장되지 않았나 싶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 진도를 빼고 극적인 구도로 가져갈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 외에도 술에 곯아떨어진 김시습을 딴에는 수습하여 편안하게 집까지 모셔와 재웠더니, 다음 날 아침 신숙주의 집인 것을 알고는 간다 온다 말없이 침 탁 뱉고 나왔다는 등, 권력에 빌붙고 출세 지향적인 정치모리배를 뜨끔하게 만드는 일화가 많다.


한 가지만 더, 한명회와 관련한 것이다.

 

한명회가 늘그막에 한강 근처에 정자를 지어놓고 시를 한 수 걸어 두었는데 김시습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는..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의 '부(扶)'를 '망(亡)'으로,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의 '와(臥)'를 '오(汚)'로 각각 고쳐 써넣었다는 얘기다.


'청춘망사직(靑春亡社稷) 백수오강호(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개작시(改作詩)'를 보고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아마 요즘 같아선 이렇게 바꾸었으리라. 初期亡社稷 後期汚江湖)


하여간, 김시습은 사유와 행동, 저술을 모두 중시한 인물이었으며, 절의의 화신, 광인이라기보다는 시인이면서 사상가였고 고독한 영혼을 소유한 진정한 자유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방랑은 그에게 존재의 방식이자 문학의 한 길이었으며 세상과 만나는 통로였다. 그는 길 위의 삶에서 일탈의 자유를 찾았다. 그는 자신의 길 위의 삶을 탕유(宕遊)’로 표현하였다. ‘탕유’란 자유분방한 노닒을 의미한다.


평생 자신에 대해 전혀 꾸밈이 없었고, 모든 허위를 미워했던 그는 탕유할 수 있었기에 고뇌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자연과 역사, 민중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돌아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태어나 사람 꼴 취하였거늘/ 어찌해서 사람 도리 못 다 하였나/ 젊어선 명리를 일삼았고/ 장년이 되어선 자빠지고 넘어졌네/ 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운 걸/ 진작 깨닫지 못하였나니/ 후회해도 지난 일을 돌이킬 수 없기에/ 잠 못 이루고 가슴을 방아 찧듯 쳐댄다/ …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묘표를 만들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나의 마음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 년 뒤에 알아주리.” (‘나의 삶(我生)’ 중에서)

 

일생을 돌아보며 자신을 ‘꿈꾸다 죽은 늙은이(夢死老)’로 기억해 달라고 한 매월당..


當書夢死老(당서몽사로)  꿈꾸다 간 늙은이라 그렇게만 쓸지어다.. 누가 감히 이렇게 치열하게 꿈을 꾸다가 갈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본연성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 민본주의, 인간 평등사상을 실현하려고 애쓴 사람, 유·불·도를 넘나들었던 그는 사상을 ‘몸으로 살았던’ 진정한 자유인이다..


팔도를 떠돌다가 기력이 다한 말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몸을 기댄 그가 꿈속에 누운 것은 1493년 59세 때... 부도는 무량사 일주문 개울 건너 무진암 근처 부도밭에 있다고 한다. 경내에는 매월당이 살아 그렸다는 자화상이 보관되어 있다.


끝으로, 이 책 저자가 본 김시습을 소개하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시를 짓고 글을 썼던 문인으로서, 유가 성리학과 정통 유가 사관의 주제를 저술로 남긴 참여 지향의 선동가로서,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유교의 이상과 연결시키려고 고심했던 철학자로서, 몸과 생명을 중시하여 수련 도교를 실천한 혁신적 사상가로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동정한 인도주의자로서, 국토 산하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역사미를 발견했던 여행가로서, 그의 일생은 다양한 면모를 지녔으나 그 어느 한 가지도 그의 삶의 유일한 본질이라고 보지 않고 그 모든 면모가 한데 어우러져 때로는 고뇌에 찬 듯 신음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노래하는 하나의 자유인을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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