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사람이 있는 풍경

찾아가는 미술관, 마산 진동 권영호 화실

by 실비단안개 2008. 3. 5.
728x90

 

 이 포스트는

|보|리|수|동|산|돕|기| 권영호 그림展 초대장을 대신합니다. 

  

 

찾아가는 미술관, 마산 진동 권영호 화실

 

마산시 진동면 요장리 선창가에는 부부가 다정하게 그물을 만지고 그 앞으로 호수같은 바다는 여느 바다처럼 크고 작은 섬들이  착하게 조곤거린다.

크게 호흡하여 바닷바람을 마신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면 마신 바닷바람을 토하기도 전인데 반달은 바다에 떨어졌고  수많은 물고기들은 반달을 향하여 헤엄을 친다. 물고기들은 절집에서 볼 수 있는 목어(木魚)를 닮았다.

끝없을 것 같은 목어의 헤엄은 10여m에서 더는 바닷길이 없다는 알림을 하며 하얀 단층집이 나오고 문도 없는 대문에 권영호 畵室 돌문패가 있으며, 연꽃 봉오리를 본뜬 현관 좌우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목어가 보인다. 현관 위로도  ‘權永鎬 畵室’(권영호 화실)이라 새겨진 현판이 보인다. 권영호 화백(73세)의 작업실겸 생활공간이다.

 

 

현관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천장에는 폭 1.5m, 길이 10m 가량의 유리창이 설치돼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화실의 특징은 창문에서도 나타난다. 정면쪽 벽면 구석에는 목말을 탄 사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통과할 수 있을 높이의 창호가 있는데, 다른 창호와 달리 미닫이가 아니라 여닫이며 200호 이상의 대형 작품을 밖으로 내기 위한 창호이다.

"집을 짓는다기보다는 거대한 입체작품을 만든다는 기분으로 미술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편한 집을 지으려고 했다”며, 제자와 함께 6개월의 작업 기간을 걸쳐 화실을 완성시켰으며, 붓과 물감, 이젤과 캔버스가 자유롭지만 질서 정연하게 자리한다. 채색이 끝난 작품들은 다락방까지 채워져 있었다. 목어는 작품에서 나와 창문, 작업실의 공간에서도 헤엄을 치며, 통나무 조각으로도 있다.

 

 

작업실과 구분이 가지않는 생활공간인 침실 입구에는 '菊堂'이라고 새긴 현판이 있는데, 고향 마을 이름이다. 권영호 화백은 1936년 경북 포항 어귀의 산자락을 끼고 앉은 월성군 강동면 菊堂村에서 전형적인 시골 사람으로 태어나 뜰과 토담집을 보면서 자랐고, 바다 사람을 꿈 꾸며 포항 수산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지만, 유교사상으로 뱃사람을 '뱃놈'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아 국민을 이해 시키는 연극을 만들기 위하여 중앙대학교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연출 전공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1주일간의 학과 수업을 끝내고 미술로  전과하여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작품 활동과 함께 1976년부터 경남대 사범대학 교수로 봉직했으며, 2001년 은퇴후  사방이 고요한 바닷가 진동면 요장리에서 생활을 하며, 여전히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다.

 

초기의 작품세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바닷가 풍경으로로 일관되는데 소년시절의 꿈에 대한 짙은 향수다. 화려한 차림을 한 여인들보다 어시장에서 고기파는 여인들의 우중충한 옷색이 마음에 와닿고 고구마를 굽는 노인의 두툽한 장갑낀 손과 털모자에서 느껴오는 선이 좋아 서민들의 애환을 그렸다.

그러나 전람회에서 입상을 하여도 아버지가 작품을 볼 수 없음에 아파하며 아버지를 위하여 질감이나 마티에르라도 아버지에게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다. 가난의 땅에서 눈먼 아버지가 보지 못한 그 어두운 생애를 천의 색깔로 바꿔 칠하면서 그의 붓은 캄캄한 허방을 뭉개기 시작했다.

 

                                     ▲ 아버지의 초상 1972 

 

70년대에는 "흙, 만물이 오고 가는 곳. 내 할아버지 할머니도 가셨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가신 곳, 그리고 언젠가 나도 갈곳이기에 흙이 좋아 흙을 그렸다." 이렇게 옛날에 대한 그리움의 흔적은 한결같이 이어지며, 유화물감과 나이프등을 사용하지만 우리것을 그리는 화가이니 서양화가로 불리는 걸 싫어한다. 비린 어시장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노파를 보다가, 차츰 나이 들면서 영원한 흙의 속살에 파묻히다가, 한지 문살에 비친 햇살을 주무르기도 하였다. 모두가 그와 우리의 생활이며 정서인 것이다.

 

                                     ▲ 양지 1978

 

                                      ▲ 붓꽃 1988

 

한지문에 대한 추억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침 햇살에 스미는 따스함이 정겨우며, 밖에서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느끼며 침을 삼키던 기억과 서민의 정은 90년도를 전후로 바다의 풍어제를 테마로 한 그림에서 목어와 연꽃이 함께 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불교에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목어를 직접적으로 그리게 된 데에는 1985년경 옥천사의 절에서 본 목어가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물고기의 자태는 점점 서로 입을 맞추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기호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물고기는 집단으로 혹은 남북으로 쏠리기도 하며, 마침내 하나가 되는 거대한 이동과 만남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그가 꿈 꿔 왔던 그 세계로 인간이 갖는 '회귀본능'의 세계이다. 그도 한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 목어 1989

  

14세 어린 나이에 한국동란을 겪으며, 이때부터 돈벌이를 직접하였고, 가난한 가정의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 동기들보다 늦게 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뱃사람을 꿈 꾸었지만, 뱃사람을 '뱃놈'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아 국민을 이해 시키는 연극을 만들기 위하여 대학에 진학을 하였지만, 재능보다는 단체 생활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작품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경우 낯선 방문객에게 화실과 그림 구경을 기꺼이 허락한다. 

 

그의 눈빛은 온화하다. 그의 표정에는 한줌의 욕심도 찾을 수 없다. 은색의 수염은 연륜만큼 빛이나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던 만큼  조그마한 일에도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이제 많은 이들에게서 받은 것을 다른 누구와 나눠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난해 자신이 재직(1976년 - 2001년)했던 경남대에 작품 101점을 기증하기도 하였으며, 3월 26일- 4월 1일까지 청련암 아이들이 꿈을 키워가는 '보리수 동산 돕기 그림전'을 '마산대우백화점 갤러리'에서 하며, 수익금 전체는 보리수 동산에 전달된다.

 

|보|리|수|동|산|돕|기| 권영호 그림展

2008. 3. 26(수) - 4. 1(화)

초대일시 - 2008. 3. 26(수) 오후6:30

 

대우백화점갤러리

마산시 신포동 2가 28번지 8F

Tel. 055. 240. 5000(교환) 6827(갤러리)

 

* 화환·화분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 확대가능

 

☆.. 이미지중, 아버지의 초상, 양지, 붓꽃, 목어는 화첩 'Kwon, Young-Ho'에서 스캔하였음을 밝힙니다.

 

 그외 -

 

 

 

        ▲ 권화백님은 자상하시다. 작품 외에도 질문 모두에 친절하게 답변을 주셨다.

 

        ▲ 소박한 침실에는 지인으로 부터 선물 받은 작품 몇 점이 있다.

 

 

 

        ▲ 자매 1970, 권화백님의 따님 모습이며 다락 입구에 있다.

 

        ▲ 작품을 찍을 때 뜰의 긴의자를 이용하였다.

 

        ▲ 달을 향하는 목어, 회색담장에 화백님의 작품이다.

 

        ▲ 그냥 오기가 섭섭하여 - 사진 왼편으로 목어 담장이 보인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