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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고향 이야기/김달진 문학관

김달진 문학관의 4월, '시야, 놀자!'

by 실비단안개 200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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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 정덕수 선생님께서 수협앞에 도착한 시간은 4시 30분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택시로 문학관까지 가니 '시야, 놀자!' 강의 중이라 잠시 김씨아저씨에게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시 문학관 세미나실로 갔다.

3시부터 시작한 강의는 거의 마칠 시간이었고, 학예사님에게 손으로 인사를 하니 한사선생님이 누구냐고 묻기에 '한계령' 작사가이며, 시인 정덕수 님이라고 하니 '시야, 놀자!' 강의 후에 관장님께서 한사 선생님을 수강자들에게 소개를 하니 박수와 함게 야사모 회원과 오늘 한계령을 듣고 좋아 한사 선생님의 사진까지 찾아 올린 분이라며 감격해 하기도 하였다.

 

오늘이 '시야, 놀자!' 강의가 있는 줄 모르고 문학관을 찾았는네, 뜻밖에 많은 분들을 만났으며, 한사 선생님의 깜짝 방문으로 많은 분들이 놀라워 하셨고, 수강자들의 한계령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니 한사선생님께서 '한계령'을 낭송해 주셨다.

또 많은 분들이 한사선생님과 포즈를 취하였으며, 일행은 함께 안골의 밥집 '해도지'로 이동하였다.

 

▲ 한사 정덕수 님

 

▲ 이서린 시인

 

▲ 이성모 관장님

 

 

▲ 야사모 회원과

 

 

 

▲ 해군 생도들과

 

 

▲ 해도지랜드의 유채밭

 

▲ 해도지의 상차림

 

 

 

시인과 독자와의 만남 · 6
시야, 놀자!


초대시인 : 김기택 / 김이듬
기획 · 사회 : 이서린(시인)

일시 : 2008년 4월 5일(토), 오후3시
장소 : 진해시김달진문학관 세미나실

 

 

김 기 택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


눈이 피곤하고 침침하여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덮은 얼굴은 어두웠고 곧 어둠이 손에 배자
손바닥 가득 해골이 만져졌다
낸 손은 신기한 것을 감지한 듯 그 뼈를 더듬었다
한꺼번에 만져버리면 무엇인가 놓쳐버릴 것 같아
아까워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그 물체를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폐허를

해골의 껍데기에 붙어서
생글거리고 눈물 흘리고 찡그리며 표정을 만들던 얼굴이여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이여
자는 일 없이 생각하는 일 없이 슬퍼하는 일 없이
내 해골은 늘 너를 보고 있네
잠기 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을
선글라스만한 구멍 뚫린 커다란 눈으로 보고 있네

한참 뒤에 나는 해골을 더듬던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햇빛은 살로 변하여 내 해골을 덮더니
곧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뒤집어쓴 얼굴이 어색하여
나는 한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다리 저는 사람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 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젊은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는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두 개가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직선과 원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 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로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들.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들.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圓周)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 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 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우주의 일생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 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야오옹, 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터지는
제 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킨 제 모습에 화가 난 듯
고개를 숙이더니
굽은 등으로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동안 멀어져 갔다.

 

김 기 택 /
1957 안양 출생
1989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태아의 밤>,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이수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

 

김 이 듬

 

정동진 횟집


분이 다 풀릴 때까지 전처 딸을 팬 횟집

여자가 하품을 하며 손질한다. 바다는 전복

속을 뒤집어 놓고 입 큰 물고기의 딸꾹질로

연신 출렁댄다. 푸른 등을 돌린 다랑어 내장

같이 우린 칼등으로 서로를 기억의 도마 밖

으로 쓸어내고 싶은 거다. 자주 발라먹은 속

살에 질려 산중턱을 떠가는 흰 배 곧추선 닻

을 본다. 이름난 여행지가 대부분 그러하듯

실망스러운 벗은 몸을 보여주고 벼려온 파

혼을 감행하기 좋은 모래바람이 분다.

 

서머타임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넌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는 내 무릎을 베고

아니, 널 따라하지 않아
왜 남은 날들을 신경 써야 하니
잘하려니까 심장을 멈추고 싶잖아
난 일광을 낭비할 거야 날 낭비할 거야
낮에는 커튼을 치지
많이 걷지 않고 버스에서 곧잘 자
뭘 찾으려고 넌 거기까지 갔었니
내 모닝콜은 거슈윈의 자장가
내일 못 일어나도
여름은 살기 좋은 계절
여름은 죽기 좋은 계절
그럴 리 없지만
물고기는 수면 위를 날고 목화는 익어가는데
아빠는 부자 엄마는 멋쟁이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아라

 

언니네 이발소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쓴 머리를 쑥 내밀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 편 이발소로 데려 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그고 문질렀지요 뻣뻣했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어나온 눈이 따가울까 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 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어디쯤이었을까
나는 사내를 끌어올린 구덩이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듯 도로를 헤집는데 사내는 일을 마친 성기처럼 안으로 쑤욱 들어가 얼굴만 내민 석인상이 되었네요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
어디쯤에서 잘못되었나 고민하다가
광한루 지나
만복사지 옆 비탈길에서
비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레일 없는 기차


몇 해 만에 기차를 탔습니다. 정하지 않은 목적지로 떠나보긴 참 오랜만이네요. 파파야 나무 숲 속을 걷고 있는데 파랗게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나는 만돌린을 안고 해변에 누워 있었습니다. 추워서 노란 모래 사자 입 안에 다리를 집어넣고 잠들었습니다.

네, 깜빡 잠자는 꿈을 꾼 게지요. 놀라 눈을 떠보니 내 머리는 낯선 사람의 어깨 위에 놓여 있네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의 구레나룻에 닿은 머리칼. 누군가 우릴 보면 먼 데 도망하는 연인쯤으로 알겠지요.

어쩌죠? 후다닥 고개 들고 미안해요 말해야 하는데 이 언저리, 무릎까지 빠지는 모래 언덕에 내 이마를 대고 조금만 더 잠들지 몰라요. 당황한 듯 굳어 있는 더운 베개가 이토록 설레는 꿈을 준다면.

모르는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기차는 울며 흔들립니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시끄럽지 않아야 할 텐데. 지진을 감지한 박쥐가 입 안에서 기침이 되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습니다.

다시 눈떴을 때 나는 혼자 긴 등받이에 기대어 있길 바랍니다. 구멍 난 희뿌연 의자에 손가락을 벌린 채. 닿지 않는 건반을 두드리는 환청, 발소리가 들리고 해사한 햇살을 가르는 동굴을 지나 그림자들은 해변으로 흘러갑니다.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나의 열쇠는 피를 흘립니다 내 사전도 피를 흘립니다 내 수염도 피를 흘리고 저절로 충치가 빠졌습니다 내 목소리는 굵어지고 주름도 굵어지고 책상 서랍의 쥐꼬리는 사라졌습니다 소문대로 난 일 년의 절반 지하실과 지상을 공평하게 떠돕니다

나의 눈에서 물이 흐릅니다 한쪽 눈알은 말라빠졌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까지만 털이 수북합니다 음부의 반쪽에선 생리가 나오고 오른쪽 사타구니엔 정액이 흘러내립니다 백 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

하하하 농담 그냥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는 말을 요즘 유행하는 환상적 어투로 지껄인 겁니다 말도 하기 귀찮다는 예 바로 그 말입죠

자자 내게 제모기와 쥐덫은 그만 보내시고요 이가 들끓는 가발도 처치곤란입니다 도려서 얹어놓은 과일들 이 모든 쓰레기는 충분해요 머리맡에 양초든 향이든 피우지 마세요 죽겠네 정말 꽃무더기 따위 묶어오지 말라니까요

죽은 장미가 그랬죠 너는 아름답구나

지금은 뼈만 남은 늙은이와 놀다 쉬는 참입니다 매일 한두 명과 그러고 그러지만 어떤 날은 여자애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정신이 나갑니다 공동묘지로 허가 났나요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관이 막힌 지도 한참 됐어요 하긴 정신차린다는 말의 뜻도 모르지만 제발 축언은 닥치고요 축복도 그만 좀 주세요

지하실엔 매달 공간이 없답니다 정원에도 파묻을 자리가 없구요 누군 나더러 불러들였다는데 제 발로 찾아와 발가벗는데 난들 별 수 있나요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내게 없는 걸로 주세요 가령 고통이니 절망 허무랄까 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전에만 있는 그 말의 뜻이 통하게요 안 될까요 그럼 견딜 수 없는 같이 흔해빠진 문구를 써먹을 수 있는 어쩌구 저쩌구 혹은 질투라는 단어에 적합한 대상을 보내주세요

누가 봤을까요 나도 못 봤는데
그러나 나는 아름답네요

 

세이렌의 노래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로 나와

내 날개 아래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 낡은 배로 가자

갑판 가득 매달려 시시덕거리던 연인들

물속으로 퐁당

물고기들은 몰려들지, 조금만 먹어볼래?

들리지? 내 목소리,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

너와 나 오래 입 맞추게

 

별 모양의 얼룩


베란다다 이불을 털다 소녀가 떨어진다 무거운 수염들과 단단한
골격의 냄새가 묻은 이불을 털다 한 여자가 떨어져버린 저녁, 피
가 번지는 잿빛 구름속으로 타조 한 마리 날아가는 지방 뉴스가
방영되고 기차를 타고 가던 그들도 앞부분이 무거운 문장의 자막
을 읽게 될 것이다

순식간이다 얼룩이 큰일이다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추위는 시작
된다 냄새나고 화끈거린다 두근두근한다 몰래 홑청을 바꾸고 펴
놓았다 개킨다 올리다가 다시 내린다 이불 속 깃털을 뽑는다 큰
타조의 날개는 사라지고 발간 민머리 누더기, 이상한 얼룩이 묻은
이불은 논리가 없다 귀찮아 걷어찼다가 다시 껴안는다 제대로 꿰
매지지 않는 기억은 비벼댈수록 스며들고 씻을수록 번져간다 어
느새 늙고 추악한 소녀를 돌돌 말고 있다

천상에서 이불을 털고 있나 검은 구름을 뚫고 희뿌연 깃털들이
뽑혀나오는 저녁, 자살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들이 집을 떠날 때
나는 거울을 보며 마구 머리칼을 자르고 있었다 첫눈 내리던 밤이
었고 넓고 푹신푹신한 이불이 베란다 아래 펼쳐져 있었다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고 난 눈을 뜬다 의사만 조금 웃는다 태어나던 순간
에도 이랬을 것이다

 

거리의 기타리스트


길거리의 여자는 기타를 껴안고 있다 젖통을 밀어 넣을 기세다 어떻게든 기타를 울려 구걸해야 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더 조급해진다 기타의 성기는 소리이므로 딸을 걷어차기 시작한다.
착지가 서툰 빗줄기는 보도블록에 닿자마자 발목을 부러뜨렸다 비가 지하도를 기어간다 질질 끌려간다 난폭한 여자의 팔에 기타가 매달려 있다 걸을 수 없는 조건을 가졌다
담배를 물려다 말고 여자가 소리를 만지작거린다 기타는 여자를 경멸하므로 여자를 허용한다 자라지도 않고 떨림도 없는 기타의 성기에는 매듭과 줄이 있다
스무 장의 신문지와 스물 한 개의 철근이 뒹구는 지하실이다 팔 백 해리의 슬픔과 팔백 해리의 공복과 백만 마일의 바퀴벌레도 늘어나는 것이 죄인 줄 안다
기타리스트는 딸을 안고 있다 다시 보면 기타가 여자를 껴안고 있는 자세다 기타는 기타리스트의 목을 조르고 있다 죽을까 말까 망설이느라 성장을 못한 딸의 손목이다
잔느 아브릴의 어머니는 딸에게 매춘을 강요했으며 기타처럼 모성이란 다양한 것이다 여자는 얼떨결에 기타를 갖게 되었다 여자는 기타를 동반하여 계단을 굴러가고 난간을 넘어가 세상을 추락한다 놀랍게도 어떤 모성은 잔인한 과대망상이다
기타는 기타케이스 안으로 기타리스트를 밀어 넣는다

 

어제의 만나(manna)


가죽가방이 생기면서 나는 자주 앉기 시작했다
꽃에 앉고 개미 위에도 앉는다
벌레가 나비를 끌고 간다

물가에 앉아 가방을 연다 강력한 자석으로 여며진 입구다
기름으로 가득 찬 가방의 입구에
심지를 일으켜 불을 붙인다
켜본 지 오래되어 나는 몹시 난처하다

시꺼멓고 오래된 더러운 기름이 필요하다
몽상가들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러나 이제 새 기름만 출렁이는 가방은
균형을 잡고 타들어가지 않는다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가방에 집착했으므로 멀리 갈 수 없었다
배가 빵빵했으므로 먹기 시작했다

물가에 앉아 물속을 보는 일도 지루해진 저녁
개미가 나비를 끌고 가고
청소부는 나무를 흔들고 있다
내일치의 낙엽을 미리 떨어뜨리려고
어둔 나무를 발길질하고 연장으로 두드린다

소장(所藏)했던 하루의 허기가 가라앉으면서
내일 지불해도 좋은 세금 따위를 미리 대비한다
기름진 가죽가방의 자력은 쇠붙이들을 잡아당기고
지하철 승차권이나 검은 기억의 바코드부터 삭제하고 있다
난 언제부터 강 건너 앉을자리부터 살펴대기 시작했을까

 

12월


저녁이라서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決心과 망신亡身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떼가 죽을 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는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아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겠니?

 

김달진 문학관 행사 때마다 느끼는 일은 이성모 관장님, 집사님, 학예사님의 열성이다.

저분이 과연 관장님일까 싶을 정도로 궂은 일도 마다않으며, 학예사님 또한 손님 대접과 행사 준비에 알뜰하고, 집사님께서는 묵묵히 뒷일까지 맡아 하신다.

우리나라 공무원 모두가 김달진 문학관의 직원들처럼 헌신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고, 이서린 선생님 역시 문학관을 많이 아끼신다. 오늘도 그러셨다. "우리 문학관 - "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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