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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그림보다 아름다운 (남해)'독일마을'

by 실비단안개 2008.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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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삼동면 물건리 어부림에서 마주하면 산마루에 붉은색 지붕이  흘러내리는 듯한 이국적 마을이 눈에 들어 온다.

남해군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독일마을’로, 그 이름에 걸맞게 30여 채의 독일식 주택이 자리한다.

60, 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로 나가 일하던 교포들의 보금자리다.

 

독일마을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파독 근로자로 나갔던 교포들이 여생을 고국에서 보람되게 보내고자 하나둘 정착하는 곳이다. 지금은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묻히고 있지만, 파독 간호사와 광부는 한국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70년대 중반까지 파독 간호사와 광부는 무려 2만 명에 달했는데, 당시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국민 총생산의 2퍼센트에 이르렀다.

 

독일마을은 남해군(http://www.namhae.go.kr/)이 1997년 11월 독일 북부 도시인 노드프리슬란트와 자매 결연을 맺으면서 밑그림이 그려졌고, 남해군은 교류 과정에서 독일에 근로자로 나간 교포들이 조국의 향수를 잊지 못한 채 퇴직 후 귀국하여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교포들은 30여 년이 지났기에 문화나 생활 환경이 이미 독일인처럼 굳어 있어, 귀국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함께 모여 살면서 몸에 익힌 독일식 생활 양식을 한국에 전파하고 힘을 합쳐서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기를 희망했다.

 

남해군은 교포들의 이러한 바람을 현실화시키고자, 2000년부터 독일 교포 정착마을 사업을 계획했다. 부지는 2000년 6월에 해안 경관이 아름다운 데다가 ‘물건 방조 어부림’이라 불리는 크고 좋은 숲을 갖춘 상동면 물건리의 약 2만 7000평으로 정했다.

이곳에 283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반시설 공사를 포함해 독일식 주택 83동, 복지회관 1동, 독일공원 등으로 조성키로 했다. 그리고 독일마을 정착 희망자를 모집하기 위해 독일의 베를린, 마인츠, 본, 함부르크, 카셀 등지에서 네 차례 설명회를 개최했다. 자격 요건은 독일에 간호사나 광부로 파견 나가 20년 이상 거주한 교포로 한정했다. 그렇게 하여 2002년 6월 다섯 가지 유형의 독일식 주택 표준 모델 선정과 함께 150평 안팎의 64필지를 분양했다.

독일마을 앞으로 펼쳐진 방조어부림의 시원한 바다와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드라이브코스인 물미 해안도로와 더불어 2005년 독일월드컵과 함께 남해 보물섬의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가끔 물건리 도로를 달릴 때면 독일마을을 올려다보곤 하였는데, 어제 처음으로 독일 마을을 찾았다. 버스정류소에서 들길을 따라 200여미터 걸으면 독일식 뽀족지붕을 가진 집들이 나온다.

뜰에는 갖가지 식물과 소채가 가꾸이며, 빈 공간은 잔디가 깔려있다. 우리의 시골집 뜰은 아니지만 우리의 냄새가 그대로 전해지는 뜰이다.

기웃거리며 제법 걸었지만 인적이 없었다. 잠시 한무리의 관광객인듯 한 학생들이 지나가고 택배회사의 차가 휑하니 지나갔다. 한켠에는 새로운 뽀족지붕의 집을 짓고 있었고.

 

독일 마을 : http://germanvillage.net/

 

독일마을 풍경이다.

 

 

 

 

 

 

 

 

 

  

 

 

위의 사진에서 오른편으로 약간 보이는 나무 계단을 내려와 이웃집인 계단을 오르는데 인기척이 났다. 집 뒷편의 뜰에는 얼마전에 만난 대청부채가 피었고, 자주색매발톱, 모과꽃, 돌단풍등 많은 꽃들이 있었으며, 매실은 엄지손톱만한 열매를 달고 있었고, 빨래줄에는 겨울 웃가지들이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개가 두마리 있기에 옆집의 계단으로 내려와 뜰이 좋은 집으로 한발한발 오르는데 반가운 사람이 두분 보이기에 얼른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의 안내에 따라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가니 할머니께서 뭐 마실래 하시기에 쥬스를 달라고 하였으며, 혼자 마시기에 멋적어 "할머니는요?"하니 함께 드셨다.

할머니께서는 독일에 간호사로 근무하셨으며, 독일마을에 정착한지 4년째라고 하셨다.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기에 블로그 명함을 얼른 드렸다. 할머니께서 블로그 이름을 읽으시더니 할머니댁의 카페 명함을 주셨다.

겔베하우스 다음 카페였다. http://cafe.daum.net/gelbe

 

  ▲ 겔베하우스

 

오전에 나갈때 약간 쌀쌀하기에 가디건 위에 반코트까지 걸쳤기에 덥다고 하니 베란다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셨으며, 다정한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항에서부터 카메라 세례를 많이 받았기에 카메라 공포증에 걸릴 정도라며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에 놀랐다고 하셨다.

독일마을의 연련층은 노인연령층이다보니 휴식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요즘은 관광객이 많아 쉴 여유가 없으며, '환상의 커플' 세트장이 철거가 되었데, 광광객은 여전히 그 세트장을 찾고 화단등에 마구 드나들며 주민들에게 여러가지 불편을 준다고 하셨다.

 

독일 마을을 모두 걸어 보았기에 질문을 드렸다. 쓰레기문제, 가스, 의료시설등등.

쓰레기 수거는 문제가 없는데, 요즘 들어 수요일에 비가 계속 내렸다보니 재활용 수거가 제대로 되지않았으며, 도시가스면 좋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염려가 되는 것은 생필품 구입과 의료시설이었다.

참고로 독일마을에는 상점이 없다.

생필품은 남해읍내나 삼천포등에서 구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울의 따님이 주문을 하여 택배로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집과 비슷하다. 우리 역시 시골이다보니 세제와 휴지도 온라인 주문으로 택배로 받는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위료시설이었다. 남해군은 의료시설이 열악한 지역인데, 더군다나 어른들만 계시는 독일마을에 보건지소도 없으니 한밤중에 갑짜기 앓기라도 하면 정말 걱정인데, 당국의 관심이 필요하다.

 

현재 독일 마을에는 32세대 중 7세대의 외국인 세대가 있으며, 공사는 계속 중이다.

생활은 연금이 나오니 그리 큰 어려움은 없으나 군에서 민박을 권하기에 민박 손님을 받는데, 주말에 한팀 정도만 받으며, 멀리서 다니러 온 친척을 대하듯이 한다고 하셨다. 할머니댁에는 방가로가 따로 있다.

 

할머니께서 2층으로 안내를 하여 컴퓨터에 접속을 하여 카페 구경을 시켜주셨으며, 나는 내 블로그를 열어 보여드렸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다음에 분명 또 방문을 할테니 그때는 오늘보다 더 반갑고 다정하게 맞아 달라고 하고 독일마을을 나섰다.

 

웹 여러곳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1964년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연설중에 파독 근로자와 박대통령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는 2006년 박근혜 전 한라대표의 아데나워 재단 초청연설문 중 부분(전문 :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section=section5&uid=3496)이다.

 

저는 이번에 독일로 오면서, 한국과 독일간의 남다른 인연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독일은 한국과 저에게 정말 특별하고도 고마운 나라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은 기억 못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독일과 한국이 얼마나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는지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이 경제개발을 시작하던 1960년대 초, 한국은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었던 가난한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그나마 남북으로 분단되고,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기아에 허덕이고,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경제개발 계획을 세워놓고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광부와 간호원으로 와서 일하며,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돈을 모아 고국에 송금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저는 1964년 12월, 차관을 빌리기 위해 서독을 방문했던 저의 아버지께서 함보른 탄광에 찾아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때, 그 눈물을 닦아주었던 뤼프케 대통령의 손수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돕겠노라고 손수건을 건네며 말씀하셨던, 뤼프케 대통령의 따뜻한 격려는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용기를 주었고,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손수건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반을 만든 역사적인 손수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상황은 달랐지만, 두 대통령 사이에는 무엇인가 뜨거운 내면의 감동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도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독일이 제공했던 차관 1억 5천만 마르크는, 이후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경제개발에 너무나 소중한 종자돈(seed money)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한국에 이전해 준 선진기술과, 산업 역군을 육성하기 위한 직업훈련 프로그램도 한국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부고속도로 역시 당시 독일을 방문하셨던 아버지께서 아우토반을 직접 주행하신 후에 구상하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독일과 한국의 관계는 단순히 국가간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과 눈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전후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산업국가와 통상국가로 발돋움했고, 동시에 자유민주주의를 이룬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이러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독일 같은 진정한 친구가 있었던 덕분이라는 것을 한국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대한민국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신 독일정부와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지금 비록 홀씨만 남았지만 내년에는 더 많은 꽃으로 피어 날 할미꽃.

 

 

  ▲ 태극기가 낡았었다. 남해군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 물건 어부림에서 본 독일마을

 

그림같은 집에 아름다운 분들이 계시니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마을이 독일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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