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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남양, 신석기 유적지 발굴 현장

by 실비단안개 2008.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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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해시 남양동의 8만여평에 첨단산업지 조성을 위하여 공사중입니다.

논밭이 있던 자리에는 공사 차량이 다니며, 마을 앞으로 산업용지 공사 중이고, 다른 한쪽은 유적지 발굴 현장입니다.

 

 유적지 발굴 현장은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줄 알았는데, 보름 전에 이어 오늘 그 현장에 다시 다녀왔습니다.

보름전 방문 시에 오늘 공개 설명회가 있다기에 오늘을 무척 기다렸는데, 유물의 무게를 떠나 우리 지역이 발굴 현장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설명회 시간보다 30분 먼저 현장으로 가니 마을 주민과 관계자들께서 계셨으며, 잠시 후 김해박물관 관장님께서 오셨고, 현장 설명회가 있었습니다.

설명회라고 하지만, 전문 지식이 없다보니 구경하는 수준이었는데, 발굴 담당 '동서문물연구원'의  김형곤 원장님께서 따로 자상한 설명을 주셨습니다.

전문 지식은 없지만, 나름 궁금한 점을 여쭙기도 하였는데, 그 부분과 웅천 도요지에 관한 설명도 부분 주셨습니다.

 

자료집 책자는 따로 받았습니다.

스캔으로 올리면 되겠구나 하였는데, 스캐너가 고장인지 색이 자료집의 색과 다르게 스캔되기에 방금 사진으로 담았는데, 자료집 사진은 현장의 사진처럼 선명하지 않지만, 필요한 자료이기에 그대로 올립니다.

 

6,000년전의 신석기 시대와 1,400년전의 삼국시대의 주거지인데, 출토품은 신석기 시대입니다.

설명이 서투니 자료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출처 : 신석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 마한역사교실에서 부분 가지고 왔습니다.

 

新石器時代의 社會와 文化

 

우리나라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문화가 성립하는 것은 후빙기의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마지막 빙기인 뷔름(Wurm) 빙기가 끝나고, 지구상의 기후는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으로 변하였다. 그로 인해 과거 구석기시대의 대형동물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전멸해 가는 대신 플랑크톤의 대량 서식으로 해산물이 풍부해졌다. 이 때부터 인간에 의해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개더미가 만들어졌다. 해안가에서 눈에 띠는 조개더미는 해안선의 변화와 당시의 주변환경이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또한, 지형과 해안선도 신석기에 들어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맥, 강이 형성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내륙지방에는 무수한 산맥이 분포되어 있어 단절된 지역상이 나타나기도 하나, 반면 큰 강과 해안선을 따라 통합의 양상이 나타나 안정된 생활기반을 바탕으로 문화의 전파와 확산이 이루어졌다. 산맥과 강에 의한 단절과 통합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자연환경은 신석기시대의 문화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문화가 서로 다른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개의 소문화영역으로 구분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 유적분포와 문화영역 구분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주거지, 무덤, 조개더미 등과 이러한 확실한 유구(遺構)외에도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포함층유적(包含層遺蹟)을 들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은 대부분 해안이나 강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석기문화의 특징은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빗살무늬토기(櫛目文土器)로 대표된다. 이것은 유적발굴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80% 이상이 토기이며, 여기엔 주민집단의 전통성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어 문화의 지역상을 밝히는 데 가장 적합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융기문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진흙띠를 말아붙이거나 손끝으로 토기 표면을 눌러 돋움으로써 돋을띠를 만들어 여러 형태의 무늬를 베푼 토기로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시문구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베푼 토기이다. 이 토기는 북쪽에서 내려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신석기시대 말기까지 계속 제작. 사용된 토기로 지역이나 시기차에 따라 그릇의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무늬를 베푼 공간과 내용에 차이가 있어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지역구분이나 편년을 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가 된다.
빗살무늬토기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함경도와 평안북도지방에서는 납작밑의 토기가, 중.서부.남부지방에서는 둥근밑의 토기가 출토되어 크게 두 지역군으로 구분된다. 또한 둥근밑의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지방과 남부지방의 토기로 구분된다. 이러한 결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 문화영역은 동북.서북.중.서부.남부지방의 네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서로 계통을 달리하는 문화의 주민들이 각 지역에 정착해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 유적(遺蹟)과 유물(遺物)


1.유적(遺蹟)
유적은 160여 군데에 이르고 있으나 이중 발굴조사를 거쳐 유적의 성격이 확실히 밝혀진 곳은 50군데도 채 안된다. 이것은 각종 긴급발굴조사로 인해 순수한 학문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술발굴(學術發掘)이 부진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기인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근래에 남해안 도서지방의 조개더미유적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인골이 남아 있는 무덤이 조사되고 조개더미를 남긴 사람들의 주거지가 조사된 점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①주거지(住居址)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는 대부분이 움집으로, 여러 모양(평면 원형.타원형.방형.장방형)의 구덩이를 판 후 그 중앙부에 돌 또는 진흙으로 테를 둘러 화덕을 만들고 그 주변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형태이다. 움집터의 조사결과로 볼 때, 신석기시대인들은 주거지 어깨선까지 서까래를 내려박아 덮은 원추형집을 만들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한편에 출입구 시설을 두어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움집외에도 바닥에 돌을 편 부석주거지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과 바위그늘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적이 강이나 바닷가에 면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농경 외에 어로나 해산물재취 등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부석주거지는 당시 지표면에 돌을 깔아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원추형의 지붕을 덮어만든 것으로. 평양 청호리. 강화 삼거리. 등에서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있어 그 확실한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2.유물(遺物)
①토기(土器)
*남부지방
남부지방에서는 다른지역과는 달리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융기문토기가 토기의 겉면에 점토띠를 말아 붙이거나 기면양편을 손끝으로 눌러 돋혀 만든 무늬를 베푼 토기로 융기성의 폭에 따라 덧무늬와 돋을 무늬토기로 구분된다. 토기가 출토된 유적은 주로 해안가에 분포하나 최근 내륙강가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융기문토기가 출토된 유적은 거의가 조개더미 유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둥근밑의 빗살무늬토기가 이지역에 출현하는 것은 융기문 토기가 극성을 보이는 목도기부터이다. 그러나 목도기의 빗살무늬토기 문양은 음각에 의해 만든 점열무늬. 문살무늬 등 일부구연부무늬에 그치고 있다. 이 지방 빗살무늬토기의 기형은 둥근밑빗살무늬토기 외에 중서부 지방에서 출토 예가 없는 목항아리. 귀때형토기. 물결형아가리토기 등이 제작되고 붉은칠토기가 목도기(牧島期)에서부터 출현한다.

 

②석기(石器)
신석기시대가 구석기시대보다 발전되는 기술적인 요인의 하나는 석기를 제작할 때 갈아서 만드는 수법이 등장한 것이다. 석기는 종류에 따라 어로용. 수렵용. 농경용. 일상생활용으로 구분되며 이러한 쓰임새의 차이에 따라 도끼는 섬록암 등 단단한 재질의 돌로 살촉은 점판암 등 짜개지기 쉬운 재질의 돌로 숫돌은 편암 사암 등 잘 갈리는 성질의 돌로 만들어 사용한 지혜를 보여준다.
 
*어로용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석기로는 그물추가 가장 많으며 이밖에 이음식낚시와 작살이 출토되었다. 그물추를 보면 직경이 2-5cm인 납작한 강돌의 양옆을 때려내어 실걸이를 만든 것으로 투망이나 맞둘이의 밑에 매달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주로 강가에서 고기를 낚던 연장으로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부터 출토되고 있는데 동북지방이나 남부지방보다는 중.서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수렵용
동물을 잡는데 사용된 석기에는 살촉과 창끝이 있다. 살촉은 대부분 버드나무잎형. 보트형. 보트형의 밑둥을 판 양나래형이 유행했다. 양나래형은 밑둥 끝에서부터 만입된 형태와 밑둥 중앙부에 깊게 홈을 파준 형태가 있는데 전자는 동북지방에서 후자는 중서부지방에서 출토되어 지역차를 보이기도 한다.

  

*농경용
농사를 짓는 데 사용된 석기로는 낫. 보습. 괭이. 도끼. 갈돌. 갈판 등이 있다. 낫과 보습은 중.서부지방의 유적인 지탑리, 금탄리, 암사동에서 주로 출토되어 지역에 따라 농경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이밖에 화전을 일구는 데 벌목용으로 사용된 도끼와 곡물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던 갈판과 갈돌도 직접적인 농경구는 아니지만 농경에 부수되는 석기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상용구
일상생활에 사용된 석기로는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데 쓰는 도끼 끌 대패 자귀 곡물이나 도토리 등 열매를 분말로 만드는 데 쓰는 갈돌 갈판 그리고 의식주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칼. 송곳. 가락바퀴. 발화석 등이 있으며 이러한 석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망치돌과 숫돌이 출토된다. 이밖에도 생활필수품인 칼. 송곳. 톱 그리고 실을 꼬기 위한 가락바퀴도 출토되었다.  

 

 

 

 

▲ 이상 자료집에서

 

 

 ▲ 월남 마을 앞의 발굴 현장 : 하루의 작업이 마무리가 되면, 발굴 현장은 덮개로 덮여지며, 새날에 다시 열어 작업을 합니다.  

 

 

  ▲ 발굴 도구들 - 호미의 끝이 낫처럼 날카로웠습니다.

 

발굴 현장인데,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려우며, 흙으로 시대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푸른선은 '추정선'인데, 이미 발굴을 마친 지역입니다.

 

 

 

  ▲ 흙이 항아리 모양으로 있었는데, 출토품 중 빗살무늬 토기의 흔적입니다.

 

  ▲ 9월 22일

 

  ▲ 발굴은 아주 조심스러웠습니다. 현장의 출토품은 작은 바구니에 담겨졌으며, 나중에 따로 분류가 됩니다.

 

 

  ▲ 교과서에서 배우고 박물관에서 본 빗살무늬 토기의 흔적입니다.

 

  ▲ 김해박물관 관장님께서 설명중입니다.

 

  ▲ 삼각형의 화살촉이 보입니다. 돌 화살촉이며, 수렴용입니다.

 

  ▲ 모든 출토품은 고유의 이름표가 있습니다. 출토 지역이며, 모든 유물은 국가에 귀속되기에 나중에 따로 번호를 부여 받아 출토품들은 두 개의 이름표를가진다고 하는데, 우리가 박물관에서 만나는 모든 유물들이 두 개의 이름표를 가져 기록이 되어 있지만, 전시시에 가려지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 김해박물관 관장님과 현장 팀장님(여자분)

 

  ▲ 많은 설명을 주신 '동서문물 연구원' 김형곤 원장님

 

  ▲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 현장

 

  ▲ 삼국시대 유적지 현장

 

발굴 작업은 마무리 단계이며, 이러한 주거지는 여러 곳에 분포하기에 영구 보존이나 이전 보존이 되지 않고, 산업용지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 된다고 하지만, 고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 설명이 매끄러우면 기록으로 남기는 저나 읽는 분들이 수월할텐데, 무지는 오늘도 역시 죄가 됩니다. 

모든 유적지의 발굴 현장은 관계자 외는 출입이 금지가 된다고 하며, 함부로 촬영도 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동서문물 연구원 김형곤 원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포스팅은 관계자의 허락하에 하며, 중요 자료이기에 스크랩은 허용않습니다.(현재 미공개 유적지며, 관계자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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