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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유치환의 둔덕골과 통영의 깃발·행복

by 실비단안개 2008.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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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입동, 흐리다가 비 내리다가….

 

지난해 8월 거제 둔덕골의 청마 생가를 다녀왔으며, 역시 지난해 11월에는 통영의 청마 문학관을 다녀왔습니다.

 

* 지난해 8월 거제 : 둔덕골의 청마 유치환 생가

* 지난해 11월 통영 : 청마 유치환을 이야기하면, 나는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얼마전에 친일작가 명단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친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 유치환 약력 참고 : 둔덕골의 청마 유치환 생가

* 친일에 대한 자료 부분 : 청마 유치환을 이야기하면, 나는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비가 살풋살풋 내렸습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나무가 있으면 모든것을 안아줄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데, 방하마을 입구에도 커다란 나무가 있으며, 지난해 공사 중이던 기념관이 완공되어 1월에 개관을 하였습니다.

당시 거제시청의 관계자께서 댓글란에 생가의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여 사용하라는 답글을 드렸는 데, 그후 소식은 모르지만, 둔덕골 방문을 관계자에게 알리지 않고 방문을 하였습니다.(방문시에 연락을 하라며 연락처를 주었음)

 

늦게 확인을 하니 청마기념관 홈페이지(http://cheongma.geoje.go.kr/)의 '생가둘러보기'에 제가 담은 사진을 올렸네요. 블로그 주소와 함께요.^^

 

낯선이보다 오래전이라도 한번 만난이가 더 반가운 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먼저 생가로 갔습니다.

지난해 8월 많이 더웠던 날의 방문과는 달리 마음이 편안하였습니다. 뜰에 약력이 세워졌으며, 금송화가 마지막 빛을 발하고, 이엉을 엮어 두었지만, 고르지 못한 날씨 때문에 정지와 툇마루에 쌓여 있었습니다.

아궁이는 방금 불을 땐 듯 재가 있었으며, 마당보다 높은 곳의 텃밭에서도 깊은 가을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시인의 약력이 화단에 세워졌으며, 지난 여름처럼 여러가지 꽃들이 피고지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8월에도 느꼈지만, 정갈한 관리였습니다. 감히 뜀박질을 해서는 안될 풍경, 뛰더라도 헛기침 소리만 들릴 것 같은 생가의 풍경입니다.

 

기념관으로 가서 김달진 문학관 동네에서 왔다고 소개를 하고, '시애' 창간호를 드리려니 직원 한분이 봉투를 보시고, "김달진 문학관에 다녀온적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반가워했습니다.

얼마전에 '시애' 창간호와 시애 2호를 넉넉하게 얻어 왔지만, 그 사이 모두 나갔기에 창간호 한 권을 내미는 손이 죄송하였습니다.

 

  ▲ 청마기념관

 

청마기념관 : http://cheongma.geoje.go.kr/

친일여부를 두고 논란을 빚고 있는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묘소와 복원된 생가가 있는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에 청마기념관이 1월 2일 문을 열었습니다.

 

사업비 28억5천만원을 들여 2000년 5월 청마 생가를 복원하고 생가 옆 사유지를 매입한 거제시는 2006년 10월 기념관을 착공, 14개월여만에 개관한 것이며, 둔덕면 방하리 2천760㎡의 부지에 문을 연 기념관(건축면적 492.9㎡)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바깥 정원에는 그의 시 '깃발'과 '출생기'를 조각한 시비와 청동으로 만든 청마의 전신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1.2층 기념관은 둔덕면 전경과 청마의 생애와 시상세계, 자취를 주제로 그가 재학했던 부산 동래고보 학적부, 교원 발령장, 일기장과 초고(初稿), 사용하던 인장과 필기구, 그의 시가 수록된 잡지와 사진, 그림,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등 모두 225점의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마을회관 맞은편의 기념관 뜰

 

직원의 안내로 기념관의 전시관 내부를 담았습니다.

생가는 예스런 모습이며, 기념관은 아주 현대적입니다. 또 반가운 것은 김달진 시인의 모습이었습니다.

 

  ▲ 당시 함께 활동한 문인들의 사진이 있는 데, 서정주, 김달진 시인의 모습도 있습니다.

 

  ▲ 시인의 일생을 영상으로 소개를 합니다.

 

  ▲ 맞은편의 영상은 유족의 육성으로 청마에 대하여 읽을 수 있으며,

제가 앉은 의자는 활동 당시의 사진이 있으며, 조명과 의자의 구실을 합니다. 놀라웠습니다.

 

  ▲ 전시실의 벽 부분인데, 돌을 쌓아 칸을 나누어 시를 소개하며, 헤드폰을 착용하여 시낭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직원이 담아주었습니다.

 

직원과 함께 시인의 산소를 찾았습니다.

 

청마는 1967년 2월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 부산대학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하였으며,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산록에 묻혔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산록에 묘지가 있습니다.(생가에서 1.2km)

 

산소로 가는 길은 시멘트 길이었으며, 차량 진입이 가능하였고, 산소 주변으로 들국화와 쑥부쟁이등 우리 들꽃이 많이 피어있었으며, 부모님은 합장이며, 부인 권재순 여사와 나란히 청마다리와 바다가 보이는 곳에 계셨습니다.

 

산소 입구에 주차가 가능하며, 주요 시가 비에 새겨져 있고, 청마의 흉상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산소는 오른편을 돌아 가는데, 사진에 보이는 산소가 아니며, 조금 더 걸어야 합니다.

 

 

 

하천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 청마다리가 있으며, 둔덕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진의 청마다리 오른편으로 청마의 시비가 있습니다.

 

 

청마의 흉상을 보면 안경을 착용하였는데 청마의 다른 사진과 동상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통영에서 한산신문을 받았는데, 통영의 청마 흉상 안경이 사라졌더군요.(아래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 청마다리

 

면 소재지 하둔마을 어귀에는 청마 유치환 고향시비동산이 있고, 청마교라고 명명한 아름다운 다리가 있는데, 방조제 뚝과 청마고향시비동산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아래는 청마교 맞은편의 시비입니다.

 

거제시에서 가장 많이 내세우는 청마의 시가 '거제도 둔덕골'이었는데, 이는 인접한 통영시와 서로 청마가 자기 행정구역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기에 생가라고 못을 박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03년 청마의 딸 3명은 "청마가 1908년 거제 둔덕면 방하리 태어나 1910년 통영 태평동으로 이사했다"고 주장하며, 청마출생지가 통영이라고 주장한 통영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확실한 공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출생지가 거제라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었습니다.

 

둔덕골 기념관의 뜰에도 '거제도 둔덕골'이 누워있습니다.

 

거제도 둔덕골 /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로 내려와 나의 부조의 살의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을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 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시방도 신농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 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한 기풍 속에 새끼꼬며
시서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뿔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의 묏가에 부조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둔덕의 기념관 관계자들은 누구도 청마의 생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그만큼 '생가는 거제도다'라고 믿고 싶으며, 믿고 있는 듯 합니다.

거제대교를 건너 통영입니다.

 

아침을 건너고 거제의 비원 식물원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만으로 버틴 하루였기에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통영에서 푸른통영21 위원장과 시청 관계자들을 만나 횟집으로 갔습니다.

 

통영 방문이 예정되고 블로거 바다里(http://www.seabr.co.kr/main.htm)님에게 "통영에 갑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흔적 한번 남겨준 적이 없었기에 생략을 하였는 데, 횟집에서 관계자 한분이 그러더군요. 통영의 유명한 블로거 한 분을 소개하겠다고.

그 블로거가 바다리님이었습니다.

바다리님에게 역시 유명 블로거를 소개하겠다며 연락을 하였구요.

 

바다리님과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아주 가끔 방문을 한 블로그였으며, 포스트의 질은 최상급인 블로그였지만, 늘 바쁨을 핑계로 오래 머물지 못한 블로그였지요.

 

나야 바다리님의 합석을 조금전에 알았지만, 바다리님은 실비단안개를 횟집에서 처음 소개를 받았기에 놀라워 하더군요.

이미 우리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 상태였으며, 얼마전에 바다리님께서 댓글까지 주셨거든요.

 

술잔이 오가고, 또 다른 관계자께서 '한산신문'을 주었는데, '청마의 흉상 안경 어디로 갔나' 기사가 1면에 있었습니다.

* 참고 : 청마흉상 안경, 어디로 갔나

 

함께 한 이들은 바다리님과 다른 한분을 제외하고 지난 가을에 이미 자리를 함께 한 이들이며, 당시 통영의 청마문학관장님께서 열변을 토하기도 한 청마의 생가의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묘하게도 관계자 한분이 거제 둔덕에서 통영시로 출근을 하는 이었는 데, 청마의 출생지와 친일에는 관심을 갖고 싶지 않으며, "오로지 청마의 시가 좋다"라고만 말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명쾌한 정답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매운탕으로 식사를 한 후 일어났습니다.

바다리님과는 좀 더 시간을 보냈는데, 다른 포스트에 이야기가 이어질 겁니다.

 

11월 8일

서호시장에서 시래기국으로 아침밥을 먹고 약속을 한 김형진위원장과 바다리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걷는 통영문화기행입니다.

우리의 숙소는 동피랑 아래의 나포리모텔이었으며, 문화회관이 보이는 '통영문화마당'광장에서 첫 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통영을 걸어보면 통영이 '깃발'의 고장임을 압니다. 깃발은 유치환의 깃발과 거북선의 방위를 알리는 깃발, 세명관과 충렬사의 깃발, 통영의 연까지 깃발이 됩니다.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조선문단, 1936)

 

 

10월 초, 진해 김달진 문학제와 같은 때에 통영에서는 '청마깃발축제'가 있었으며, 주무대가 청마문학관과 청마의 거리, 통영문화마당광장이었습니다. 지금도 축제의 흔적이 있으며, 지역민들은 광장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고, 관광객들은 잠시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는데,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순한 그림들이 정겨웠습니다.

 

  ▲ 대전에서 통영을 찾은 이들이 광장에 차린 상

 

  ▲ 동피랑이 보이는 광장

 

문화가 넘치는 도로와 골목을 걸어 중앙동, 일명 오행당 골목 입구의 박경리 시비 '양극'이 있는 근처에서 전날 소식인 한산신문의 청마 안경이 우근님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역시 모든것은 관심을 가지는 만큼 보이는 모양입니다.

 

바다리님과 우근님이 부러진 안경을 들고 한껏 웃습니다. 

 

 

 

 

청마 흉상은 청마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통영시 문화동 중앙우체국 앞에 시비 ‘향수’와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통영 중앙우체국은 청마가 ‘편지의 시인’으로 불릴 정도로 그가 통영에 머물던 젊은 시절 5,000여통의 편지를 정인인 정운에게 직접 보냈던 곳으로 유명한 우체국입니다. 
바다리님이 청마의 흉상에 안경을 대어 봅니다. 귀 쪽으로 보면 안경테의 부러진 자국이 있습니다.

씁쓸한 풍경입니다. 무슨 이유로 지역의 문인 흉상의 안경을 파손시켰을까요.

 

  ▲ 통영중앙우체국이며, 사진의 오른편 '1위'가 쓰여진 건물 옆으로 '시선집중'이 있는 데,

시선집중은 당시 청마의 정인 정운이 수예점을 경영하던 자리입니다.

 

위의 사진 가운데 붉은 우체통을 보아주세요.

 

 

  ▲ 당시 여기는 나무의자가 있었다고 하며, 청마는 수예점(현 시선집중)을 바라보며, 정운에게 연서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문 안에 있고, 그 모습을 엿보며 쓴 연서는 절절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우체통 옆에는 대표적인 시,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뜻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중앙우체국에서 조금 더 걸으면, 청마의 부인이 운영하던 '문화유치원'이 있습니다. 현재 유치원은 운영되지 않으며, 충무교회이고, 사진의 '통영기독교백화점'의 간판을 보면 예수의 얼굴이 있습니다.

예수의 얼굴은 그려진 게 아니며, 세월에 찢어진 모습인데, 예수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주인장을 만나고 싶어 서점 안으로 갔지만, 아무도 없기에 만나지 못하고 왔습니다.

 

청마거리는 통영의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거리에는 시인이 사랑했던 여인 이영도 여사에게 5,000여통의 편지를 보냈던 중앙우체국 앞에 '행복'이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고, 또 거리에는 시인의 부인이 운영했던 '문화유치원'이란 문패가 아직 있습니다.

 

아직도 사랑한다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이영도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 달라는 말 한마디 못한 순정이 함께 있는 거리가 청마의 거리입니다.

숨을 몰아 쉬게 하는 거리입니다.

 

세병관 맞은편에 '통영시 향토 역사관'이 있습니다.

향토 역사관은 1997년에 개관한 연건평 558㎡ 규모의 향토전시관으로, 통영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각종 물품과 영상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데, 개인이 30여년간 수집한 물품들입니다.

 

  ▲ 푸른통영21 위원장님과 향토 역사관 관장님

 

우리는 문제의 청마 흉상 안경을 다시 이야기 하였습니다.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흉상에 부착된 안경이기에 다시 제작하여 착용케 해야 하며, 파손 된 안경은 보관을 하여 파손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통영의 청마 문학관은 방문을 하지 못하였지만, 청마의 거리에서 청마의 많은 것들을 만난 시간이었는 데, 거제와 통영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거제 둔덕에 '거제도 둔덕골'이 있다면, 통영에는 청마의 '깃발'과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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