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푸른통영21'의 초대로 11월 7일에 통영으로 가서 8일에 블로거 바다里님의 안내로 함께 걷는 통영문화기행을 했습니다.
항남동의 문화마당에서 시작되며, 첫 번째 도착지는 초정거리인데, '초정(草汀)'은 시조 시인 김상옥(1920~2004)의 호며, 시인의 생가터가 있는 일명 '오행당 골목'이 초정거리로, 초정거리의 길이는 대략 180m로 바닥에는 시인의 시와 그림이 담긴 아트타일이 깔려 있습니다.
보도블럭 사이사이의 아트타일에는 김상옥 시인 뿐 아니라 이중섭 화가의 그림도 있으며, 버스정류소의 부스에도 지역의 예술인의 사진이 있습니다.
함께 걷는 문화기행은 초정거리 - 청마거리 - 중앙동우체국 - 문화동 벅수 - 통영향토역사관 - 세병관 - 간창골새미 - 서문고개 - 박경리 생가 - 공덕귀(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인) 살았던 곳 - 함안 조씨 정문 - 통영충렬사 - 정당샘 - 전기불터 -이중섭 살았던 곳으로 이어지는데…….
그중에 충렬사 풍경을 올립니다. 꼭 한 달전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충렬사는 도로 한복판에 있으며, 정원이 아름답습니다.
깊은 가을이 널려있는 출렬사에서 참배는 뒷전이었습니다.(장군님 죄송합니다.)
통영의 유래 중 - (출처 :http://www.tongyeong.go.kr/01about/01_01.asp)
주)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이 통영(統營)으로 선조37년(1604)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통영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충무시(忠武市)의 본 지명은 통영군이고, 통영군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라 하였으며, 통영이나 충무시의 탄생은 삼도수군통제영과 충무공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3년 거제군이 분리해 감. 통영군-1읍(통영읍) 6면(龍南·光道·道山·山陽·閑山·遠梁) 1955년 6월29일 통영군 원량면이 욕지면과 사량면으로 분리됨 1955년 9월 1일 통영읍이 충무시(忠武市)로 승격되면서 통영군과 분리됨 - 충무시 : 16동(道泉·西湖·明井·港南·中央·文化·太平·東湖·貞梁·北新·坪林·仁坪·堂·美修·鳳坪·道南) - 통영군 : 7면(龍南·光道·道山·山陽·閑山·欲知·蛇梁) 1967년 5월 29일 광도면 안정출장소를 설치 1973년 통영군의 용남면 무전리가 충무시에 편입(행정동-북신동) 1973년 7월 1일 남해군의 갈도(葛島)가 통영군에 편입 1985년 충무시 북신동에서 무전동이 분리되어 행정동으로 되고, 인평1동과 인평2동이 인평동으로 통합됨 1995년 1월 1일 충무시 통영군을 통합, 도농복합형태의 통영시 설치 (7면 20동 1출장소) 1995년 3월 2일 산양면이 산양읍으로 승격됨 1995년 5월 1일 행정동 중 중앙·문화동을 문화동으로, 평림1·2동을 평림동으로, 도남1·2동을 도남동으로 통합(1읍 6면 17동 1출장소) 1998년 1월 1일 행정동 중 서호동 및 구 평림2동, 명정동을 명정동으로, 항남·문화·태평동을 중앙동으로, 동호동과 정량동을 정량동으로, 인평동과 평림동중 구 평림1동을 인평동으로, 당동과 도천동을 도천동으로 통합(1읍 6면 11동 1출장소) 1999년 8월 16일 행정기구 통합에 따라 안정출장소 폐지, 광도면에 통합(1읍 6면 11동)
* 갱신일자 : 2008 . 7. 31
국민학교 출신입니다. 6학년 때인가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진해시의 변두리 시골 학교였지요. 당시는 창원군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창원시가 생기고 의창군이 되었다가 진해시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만큼 고장의 역사도 파란만장 합니다.
당시 2학급이었으며, 한 반은 60명 전후였지요.
수학 여행지는 충무 일원이었으며, 우리는 군함을 타고 갔는데, 멀미를 많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촌늠(님)이 차를 탈 일, 배를 탈 일이 있나요.(중학교 수학여행은 기차로 서울로 갔었는데, 기차 멀리도 했음)
그래도 어찌어찌 충무에 닿았으며, 처음으로 여관(?)이란 곳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또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얼음과 소금이 들어 있던 아스케키가 아니었음)을 먹었습니다. 왜 베스킨 라빈스에 가면 동그란 숟가락으로 떠 주는 아이스크림요.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것 보다 새로운 문화(?) 체험이 더 신선했으며 소중했던 수학여행이었는데,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아이들과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충무였습니다.
지금은 통영이라 하지만, 충무라는 명이 더 정겹습니다.
누군가를 만난 때, 한 번 만난 이보다 두 번째 만나는 이가 좀 더 친숙한데, 풍경도 마찬가집니다. 오래전 풍경이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아~ 그때 - 이렇게 되니까요.
충렬사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고, 가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면 단풍 구경을 하세요.
늘 이야기하지만, 정말정말 사진은 부족합니다. 그래도 사진으로 만난 풍경을 실제 만난다며, 아~ 여기였구나 - 라고는 할 수 있을 겁니다.
* 충렬사 자세히 보기 : 통영충렬사 http://tychungryolsa.or.kr/
▲ 충렬사 사당입니다. 보통 문이 열려 있기에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없는데, 당시 푸른통영21 김형진 위원장님과 바다리님이 기둥의 글을 설명한다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정침(正寢)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주련에 쓰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은 노량해전 때 우리 수군과 연합함대를 구성했던 명(明)나라 도독 진린(陣璘)이 이충무공의 훈공을 일러 『 해를 깨끗이 씻고 구멍난 하늘을 때운 공(浴日補天之功)』이라고 극찬을 했던 말에서 따왔으며, 『맹산서해(盟山誓海)』는 이충무공의 정성으로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고,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감동하더라(警海魚龍動 盟山草木知)』 에서 따온 글귀이다.(충렬사 홈피에서)
여러 풍경을 담다보니 차례도 헷갈리며,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그날도 당연히 어긋난 학생이었구요. 하여, 통영시청 게시판과 메일, 개인에게 추가 질문을 부탁하였는데, 아직 답이 오지않네요. 또 제주도 풍경도 헷갈려 어제 제주시청과 통화를 하였지만, 시원한 답은 받지 못하였기에, 웹을 뒤져 세 곳에 질문을 해 둔 상태인데, 역시 답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 부탁 -
개인의 답은 큰 기대를 않습니다만, 관계기관에서는 지역민이 아니더라도 질문이 있다면 성실하게 답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지금 마음이 살짝 다쳤습니다.:(
▲ 이상 충렬사
▲ 충렬사로 가기 전, 세병관에서 만난 아기 - 남매같았는데, 오래비의 모습을 담아주고 있더군요. "찍어줄까"하니, 여자 아기가 오래 된 연인처럼 오래비 어깨에 팔을 두르더군요. 아기들의 카메라로 몇 컷 담아주었습니다.
전국민의 취미가 사진찍기가 맞는 모양입니다.
통영에 가면 고향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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