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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와 국제시장, 추억하며 걷기

by 실비단안개 2009.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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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접수였지만, 진료가 생각보다 빨랐기에 예정대로 자갈치와 국제시장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부산 지리를 모르는 올케이기에 병원을 나와 바로 네비케이션을 켜, '영도다리'를 검색하여 잔머리 굴릴줄을 모르는 김양(네비)의 안내에 따라 토성동과 남포동을 둘러 영도다리로 접어 들었습니다.

오른편의 한약재상들이 그대로 즐비하며, 왼편의 롯데월드는 건물이 제법 올랐습니다.

 

"어머나, 이게 영도다리에요?"

(올케의 고향은 전남 여수이며 직장생활은 서울서 했기에 상황에 따라 여러 고장의 말씨입니다.)

보기에 허접한 시골다리같은 영도다리 위를 달릴 때 영도다리라고 하니, 영도다리가 대단하며 아주 먼곳에 있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영도경찰서를 지나 우회전하여 대평동(?) 바닷가에 주차를 하고 바다 건너 자갈치와 부산타워를 가르키며, 저건 부산타워고, 조기는 자갈치야 하니, 바닷물이 맑지 않아도 함께하는 풍경이 좋다며 주차를 이곳에 하고 국제시장을 가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큰아이를 영도에서 낳았으며, 당시 영도다리나 부산대교를 걸어 자갈치와 국제시장을 다녔기에 걸어 주위를 다니는 것은 지금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 비싼 땅에 무료주차가 가능할까, 마침 주차를 하는 분에게 "무료주차에요"하니 아니라고 하였기에 영도쪽의 다리 아래를 지나 잠시 대교동을 거쳐 자갈치의 주차장에 주차를 했습니다.

주차비를 낸다면 자갈치 시장까지 봐야하기에 굳이 영도에 주차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 대평동에서 바라본 용두산 공원의 부산타워

 

용두산공원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은 부산광역시 중구에 있는 공원으로 부산의 지방기념물 제25호에 속한다.[1] 용두산으로 불리는 언덕이 공원이고, 산정상에는 부산타워가 있다.

부산 남부의 남포동에 인접하고,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대청동에서 중앙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중앙동에서 부산호텔 근처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광복동에서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 갈수 있다. 부산항이나 영도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부산타워의 아래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노후화된 시설 및 정비를 위해, 2008년부터 민간자본을 통한 재창조 사업을 공모중이다. 옛 부산광역시 시청이 있던 자리가 용미산으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1957년 공원의 명칭을 우남공원으로 변경하였으나, 1966년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환원하였다.(출처 : 위키백과)

 

  ▲ 자갈치 공동어시장

 

자갈치 시장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건물이 대평동에서 보니 갈매기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자갈치 공동어시장은 남항일대를 중심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어시장으로, 개항 이후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였고, 현재에는 전국 최대의 수산물 집산 및 유통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활기찬 부산 시민의 모습과 서민들의 삶이 녹아나는 곳입니다.

 

  ▲ 영도다리

 

영도다리 옆으로 임시교량 공사중이었으며, 부산대교는 도색을 준비중인듯 했습니다. 옛날에 영도다리와 부산대교 아래에 고등어가 많이 잡혔는데, 얼마전에 보니 학꽁치 등을 낚더라구요. 오늘은 낚시하는 풍경은 만나지 못하고 왔습니다.

 

영도다리

길이 214.6 m . 너비 18 m. 1931년에 착공, 1934년 3월에 준공되었다. 영도다리는 개폐교(開閉橋)로 유명하였다. 선박이 통과할 때에는 다리의 중앙에서 양쪽으로 들어올려서 배를 통과시켰다. 다리 위에는 전차궤도가 부설되어 있었으나 1966년 9월 영도구의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로 개폐를 중지하였으며 전차궤도를 철거하였다. 1980년 부산대교가 건설되었다.

 

국민적 애환이 서린 곳으로 유명한 부산 영도다리가 오는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가 2010년 하반기에 다리상판을 들어올려 배가 지나갈 수 있는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부산시는 기존 영도다리를 확장 복원하기 위해 인근 북항 쪽에 길이 280m, 너비 18.3m, 왕복 4차로의 임시교량을 설치하는 공사를 2월중에 착공하며, 임시교량이 7월께 개통되면 기존 영도다리는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전면금지될 예정이다.

 

* 영도다리 풍경 더 보기 : 고갈비 골목과 영도다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는 중구 영주동에 살았으며, 코모도와 카톨릭센터를 지나 국제시장을 걸어 다녔습니다. 그길에 좋은 풍경 하나는 남일국민학교 건물을 덮은 담쟁이 넝쿨이었으며, 큰아이가 교과서를 잃어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교과서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자갈치에 주차를 하고 바람많은 골목을 걸어 보수동 헌책방 골목으로 갔습니다. 06년 1월,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블로거 뉴스에 송도했었는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으며,  얼마의 세월이 아닌데 저 또한 옛날의 헌책방 골목을 추억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내용 중 부분입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함께 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1950년 6.25 사변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에서 피난온 손정린씨 부부(舊.보문서점)가 보수동 사거리 입구 골목안 목조건물 처마 밑에서 박스를 깔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잡지, 만화 고물상으로 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등으로 노점을 시작한 것이 지금의 보수동 책방 골목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부산으로 피난 온 많은 난민들은 "국제시장" 일원등에서 정착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며 피난온 전국의 학교들이 구덕산 자락 보수동 뒷산등에서 노천교실로 많은 학교가 수업을 하였던 관계로 보수동 골목길은 수많은 학생들의 통학로로 붐볐다.

 

당시 사회는 어려워 서적의 출판문화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여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헌책이라도 구입할 수 있으면 감지덕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점 헌책방은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 성황을 이루었고 노점과 가건물이 하나 둘 늘어나 책방 골목이 형성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들의 '지식창고'역할을 하게 됐다.

 

60~70년대에는 70여 점포가 들어서 문화의 골목 부산의 명소로 자리 잡았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신의 귀중한 책을 내다 팔기도 하고 저당 잡히기도 하였으며 다시 자기가 필요한 헌책을 싼값에 되사 가서 학업에 충실할 수 있었다.

신학기가 되면 책을 팔고 사고 교환하려는 책 보따리가 가관이었으며 때때로 소장한 값진 고서도 흘러 들어와 많은 지식인 수집가들에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가족을 이별하고 피난 온 이산 가족들의 만남의 장소 이기도 하였으며 젊은이들의 추억을 만드는 장소로  이르고 있다."

* 더 보기 : 아버지 세대의 '지식창고', 보수동 책방골목

 

 

  ▲ 보수동 헌책방 골목 - 어린이 도서점에서 주인이 책에 묻혀 책을 읽고 있었으며, 도서 행사가 끝났지만, 벽에는 분홍바람개비가 돌고 있더군요. 딱히 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걸어볼만 한 골목인데 기웃거려보니 신간도 많지만, 일본 잡지도 많았습니다.

 

책방 골목을 나와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형님 영주동은 어디야?"하며 올케가 묻더군요.

우리가 영주동에 살 때, 올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동생이 부모님보다  나에게 먼저 인사를 시켰기에 올케를 처음 대한 곳이 영주동이며, 후에 또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동생은 우리와 함께 생활을 했고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연애를 한 거지요.

 

부평동 시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자꾸 옛날 이야기가 나오는데, 20년이 더 넘은 그때, 커피를 사거나 이쁜 그릇은 부평동 사거리 시장에 가야했습니다. 지금은 수입품이 널렸지만, 당시는 특별하다시피 했으며, 이곳으로 이사를 올 때 부산의 이웃이 10년이 넘었지만 방금 구입한듯한 '겐죠'커피잔 세트를 장만해 준 곳도 사거리 시장이며, 영주동 할머니(참 좋은 할머니가 계셨음)가 소개해준 한복집도 사거리 시장 내에 있었기에 역시 당시는 흔치않았던 개량한복을 수를 놓아 멋스럽게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국제시장 건너편에 있는 사거리 시장은 국제시장이나 자갈치 시장과는 다른 맛과 멋이 있었기에 무엇을 장만할 계획을 가지지 않더라도 가끔 걷곤 했습니다.

 

  ▲ 부평동 시장(사거리 시장, 깡통시장)

 

국제시장입니다. 여전히 상품들은 도로를 점거하였으며, 예전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 국제시장입니다.

 

부산 국제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48년에 단층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6·25전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국제시장은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했다. 속칭 '케네디 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창선동1·2 가의 의류도매 및 덤핑 시장은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가지들이 많이 거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보세 의류품 등이 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한편,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대규모 화재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산권의 도·소매시장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고 있다. 1968년 1월에 목조건물 3개동을 제외한 나머지 9개동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고, 상가대지 0.007㎢(2,177평)가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에게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1990년 현재 국제시장번영회에 등록된 상인수는 750명이며, 총점포수는 1,489칸, 하루평균 이용고객수는 2~3만 명이다. 주거래품목은 의류·일용잡화·가전제품 등이며, 기계공구상·직물점이 모여 있다.(출처 : 다음 백과)

 

 

명절 때면 아이 한복을 국제시장 2층에서 장만했으며, 일요일에는 점포들이 문을 닫기에 또 다른 노점상을 만나는 재미가 있던 곳도 국제시장이었습니다. 국제시장엔 세상의 모든것이 있는 곳입니다.

 

 

제법 걸었습니다. 위의 점포명을 보면 한자와 영어가 쓰여있고, 일본어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동구 초량동의 텍사스골목처럼 외국인을 상대하는 점포가 많았으며, 우리가 입는 옷과는 달리 대담하며 커다란 옷 등을 보고 웃기도 한 골목입니다.

시계포와 가전제품 수리점이 많았었는데, 오늘보니 수리점은 보이지않고 판매점들은 여전하였으며, 조금 나가면 유나백화점과 미화당백화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 곳 모두 없어졌으며, 광복동 약방골목에서 보니 국제시장의 입구마다 그 골목의 특색을 알도록 조형물을 설치하여  '만물의 거리, '아리랑 거리'등으로 표기를 해두었더군요. 오랜만에 걷는 광복동의 산뜻함이 좋았습니다.

 

 

  ▲ 광복로라고 해야 하나요, 여긴 일방도로이며, 도로가 직선이 아닌 파도모양입니다.

 

남포동 극장가 앞을 지나 제화골목으로 갔습니다. 유명제화점의 구두부터 수제화까지 모든 구두를 만날 수 있는 골목이었는데, 유명제화점이 부분 이전을 하였으며, 요즘은 수제화를 찾는이가 적어서 그런지 제화골목 또한 예전의 풍경이 사라졌으며, 음식점 등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습니다. 서면에 밀려 남포동과 광복동은 차츰 사라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친구와 몇 번 밥을 먹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찾지 못해 제화골목의 밥집으로 가서 해물탕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침을 건넜기에 배가 많이 고팠거든요.

 

  ▲ 해물탕 -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많이 추웠습니다. 하여 올케가 해물탕을 먹고 싶다더군요. 국물은 시원하였지만, 내용물이 그리 신선하지 않아 밥집 이름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밖에서 본 풍경은 분위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 부산극장

 

남포동의 극장가입니다. 남부민동의 친구를 만날 때 부산극장 1층 맥도날드나 앞에서 만나곤 했는데, 영화는 아주 오래전에 봤으며, 지금의 민들레 영토 자리가 부영극장이었으며, 자갈치 입구 동명주차장이 예전엔 동명극장이었습니다. 훗 -

 

우리는 방금 밥을 먹었기에 길에서 주전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리나 골목에서 먹는 걸 즐기지도 않구요. 부지런히 자갈치로 가겠습니다.^^

 

 

자갈치시장입니다. 설명절을 앞두었기에 시장에는 해산물과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딱히 무얼 사야 한다는 생각이 없더라도 자갈치는 행복을 충전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소지품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 자갈치 시장이기도 한데요, 아이가 어렸을 때, 친구와 함께 자갈치 시장을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가방 앞으로~" 하더군요. 돌아보니 경찰이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도록 가방을 앞쪽으로 매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때는 잘 넘겼는데 몇 년 후 광복동에서 아이의 신발 구입 후 자갈치로 갔는데, 지갑에서 몇 푼만 꺼내 상의 주머니에 넣고 지갑은 아이의 배낭에 넣었지요. 찬거리를 장만하면서 돈이 더 필요하기에 배낭에 손을 넣으니 지갑이 없더라구요. 배낭의 옆지퍼가 열렸구요. 난감했지만, 수습을 해야 했기에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카드를 중지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다행이 차비 정도는 남아 있었기에 집에는 무사히 왔지만 지갑과 주민증 등 아무것도 돌아 온 게 없습니다. 후에 생일 선물로 친구가 괜찮은 지갑을 선물로 주더군요. 이후로 아이의 배낭에 지갑을 넣지 않으며, 산으로 사진 작업을 갈 때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혼자일 때 배낭을 메고 가지않습니다, 배낭기피증이 단단히 걸렸습니다.

 

그래도 자갈치는 늘 나를 추스리게 하며, 힘을 주는 곳입니다.

 

 

  ▲ '자갈치 아지매'라는 말이 옛말이 될 듯 합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할머니들입니다. 작은 통에 불을 피워 추위를 녹이며 떡조개를 까고 계십니다. 자갈치 곳곳에서 만나는 풍경입니다. 오늘날 부산을 있게 한 힘이며 지금도 부산의 힘입니다.

 

충무동쪽으로 가는 골목의 꼼장어구이집과 횟집들입니다. 부산의 맛이지요.

* 자갈치 꼼장어 구이 - 2년전의 풍경이며 꼼장어구이 동영상도 있습니다.

 

 

  ▲ 생선회와 꼼장어구이만큼 자갈치에서 유명한 돼지껍질볶음과 감자탕입니다. 다가가도 모르고 드셨기에 떨어져 담았습니다. 

 

  ▲ 자갈치에는 많은 선박이 드나들며, 먼 바다로 나가는 이들 또한 많기에 웬만한 옷가지와 물품들은 자갈치에 있는 점포에서 구입을 합니다. 품질과 가격 모두 낮은 편인데,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고마운 물품들입니다.

 

자갈치 시장은 충무동 시장 앞까지 이어지며, 새벽엔 새벽시장이 서기도 합니다.

충무동 새벽시장에는 파치생선과 밤 사이 부산으로 온 고만고만한 야채와 곡식 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곳이었는데,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충무동 새벽시장을 따라 송도로 달리는 맛도 괜찮았습니다.

 

기록을 하다보니 20대와 30대 중반까지 부산에서 열심히 살았네요.

오늘은 올케와 함께 한 시간이었지만,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한다면 더 많이 수다스러워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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